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찬란 Jul 03. 2024

전무후무할 가족여행2





여행지에서의 아침은 유독 일찍 찾아왔다. 근면이 몸에 밴 부모님은 일찌감치 씻고, 옷을 챙겨 입고, 이방 저방을 괜히 들락거렸다. 그만 일어나라는 은근한 기상 신호였다. 킹사이즈 침대에서 함께 잠들었던 우리 세 자매는 그 신호를 애써 못 들은 척 꾸물거렸다. “에구구 몇 시야?” “몰라.” 잠꼬대처럼 대화를 중얼대며 뒤척이다가 결국 언니가 먼저 일어났다. 전날부터 수영장에 눈독 들이던 초등학생 아들이 물안경을 찾아달라며 찾아왔기 때문이다. 방문이 활짝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아빠가 커튼을 젖혔다. 넓은 통창으로 무지막지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딸들,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아우 눈부셔. 몇 신데 벌써 이 난리야.”

셋째가 퉁퉁거렸다. 나도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엄마가 헝클어진 머리를 싹싹 쓸어주었다.

“어여 일어나. 우리는 벌써 산책까지 하고 왔다아.”

아빠는 밖으로 삐져나온 나와 셋째의 발바닥을 번갈아 가며 꽉꽉 주물렀다. 우리는 눈을 감은 채 이불 속으로 발을 숨기느라 난리를 쳤다. 참 오랜만의, 어쩌면 조금 낯설기도 한 실랑이였다. 집에서라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나 할 일을 하였을 중년의 딸들은 그러고도 한참 노부모의 애를 먹이다 느릿느릿 일어났다.      


한 시 반에 호핑 투어가 예약되어 있어 오전을 한가하게 보내고 싶었지만 조카의 성화에 못 이겨 수영장에 들어갔다. 조카는 물안경만 끼고 수영장을 자유자재로 휘젓고 다녔다. 엄마와 셋째는 썬베드에, 언니와 나, 아빠는 물 위에 팔을 둥둥 띄운 채 겅중겅중 걸으며 조카를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은 모두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매년 바다로 강으로 피서를 다녔는데도 그랬다. 수영도 못하는 우리가 어렸을 땐 물에서 어떻게 놀았을까? 튜브를 타고 놀았던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신나게 노는 방법을 알았던 그때가 까마득했다.


나는 조카를 따라 물안경을 끼고 물속에 엎드렸다. 길게 뻗은 몸이 쑤욱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 팔다리를 움직이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물에 잠겨 떠다니는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아 장난기가 솟았다. 물속에서 조카와 신호를 주고받은 후 슬금슬금 움직여 언니와 아빠의 다리를 잡았다. 놀란 두 사람은 도망치며 물을 뿌렸다. 마침 수영장에는 우리뿐이었다.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한바탕 놀고 나니 우리보다 더 늦게 일어난 큰 녀석들이 아침을 먹고 합류했다. 아빠는 수영장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발만 담그고 있는 손녀 앞에 가선 양손을 맞잡고 물을 모아 물총처럼 뿜었다.

“요거 봐라, 신기하지?”

딸들은 노는 법을 잊어버렸는데 아빠는 아니었나 보다. 그 모습을 보자 튜브 세 개에 첫째, 둘째, 셋째를 하나씩 넣고 긴 줄을 달아 끌고 다니던 아빠, 무릎 위에 딸을 앉히고 무릉계곡의 경사지고 판판한 바위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던 아빠, 빈 음료수 캔을 잘라 작은 물레방아를 만들고, 입으로 뻐꾸기 소리를 내던 아빠가 죄다 생각났다. 다행히 손녀는 철 지난 코미디 같은 할아버지의 장난에 웃음을 터트렸고, 언니와 나와 여동생은 저마다 떠오른 옛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함께 웃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유년기가 척박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는 걸 새삼 발견했다.      


유쾌하게 시작된 하루는 호핑투어에서 정점을 찍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사 투어가 더할나위 없이 빠르고 흥겹게 진행된 덕이다. 승선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우리의 댄싱머신 아빠가 반응했다. 그 옛날 관광버스에서처럼 앞으로 나선 아빠 주변에 스텝들이 장단 맞추며 불을 지피자 함께 탄 다른 팀들이 술렁였다.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술렁이기만 할 때, 댄싱머신 2호 언니가 출격했고 승객의 절반인 우리 가족이 환호했다. 서먹하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통성명도 하기 전에 승객들은 춤으로 하나가 되었다.


음악이 잠깐 잦아들고 과일과 맥주를 먹는 동안 자리로 돌아온 언니는 어느새 각 팀의 인원들과 다 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저기 저쪽은 따님이 부모님 모시고 온 거고, 맞은편은 대학교 친구, 그리고 이쪽은…….”

역시 뼛속까지 아빠 딸이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그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했다.      


순식간에 친해진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한결 자유롭고 즐거웠다. 새침데기 같던 아가씨들이 언니와 하이파이브하고, 예민한 사춘기 조카가 마이크를 잡고 열창했다. 아빠 못지않게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엄마도 한 곡 할만한데 이번엔 지긋이 웃으며 여행을 즐겼다. 나는 오히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불안해하거나 조바심 내거나 혹은 지나치게 격앙돼 있지 않은 상태의 엄마를 보는 일이 처음인 것 같았다. 안정감이 느껴졌다.

우리들은 둥글게 손잡고 스노클링을 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카약도 타고 노을이 질 무렵에는 선상에 나가 인생샷도 찍었다.


요트 위에서의 다섯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충분히 즐겼으므로 아쉽지는 않았다. 엄마는 아빠 손을 잡고, 나는 딸의 어깨를 감싸안고, 언니의 큰아들은 물에 젖은 짐을 어깨에 멨다. 허리에 손을 짚은 셋째 뒤에서는 신혼부부가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렇게 거뭇하게 그을리고 지쳐서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엔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에너지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쓰고 다시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의 충만함만이 우리 사이에 잔잔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이전 22화 전무후무할 가족여행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