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초조해지는 건 언제나 마지막 날이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정도로 긴 여행을 해보지 않아서 일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엔 늘 그랬다. 그중에도 특히 이번은 유독 짧게 느껴졌다. 인원이 많았고, 다소 갑작스러웠고, 각자 생의 전환점이라 할 만한 변화를 겪느라 지쳐있었고, 무엇보다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해외여행이 처음인 남편과 미성년자 아들 둘, 나는 예민보스인데다 환경변화에 취약한 딸, 여동생은 전남편과 두 아이(다행히 성인인 두 아이는 알아서 잘 놀았다)가 있었다.
내가 독립하며 전남편, 딸과 함께 제주로 이별 여행을 다녀온 반면 여동생은 서류상 정리를 하고도 가족 간에 이렇다 할 감정적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이혼한 마당에 웬 이별 여행이냐 싶겠지만 누군가의 귀책 사유나 법적 다툼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전 관계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의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이건 순전히 내 짐작이다. 막상 여동생은 심신이 너무 지쳐있어 긴 이야기를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둘째 날의 호핑 투어를 끝으로 단체 일정을 마치고 하루의 자유시간이 남았다. 나는 피곤하다며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딸아이 얼굴을 한 번 보고 부모님과 조식을 먹으러 갔다. 지치지도 않는지 아빠는 새로운 메뉴를 찾아 그릇에 덜어 오고 전날 사진을 열어 보기도 하며 분주했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왠지 좀 골똘해 보였다. 그럴 때면 걱정이 되곤 하는데 위암 수술 후 완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엄마는 종종 급성 위장장애를 겪기 때문이었다. 혹시 속이 불편한 게 아닐까 싶어 슬슬 걱정이 될 무렵이었다.
“우리, 전에 묵었던 숙소 아직 있을까?”
그제야 나는 이번 여행의 시작이 지난 여행이었고, 엄마가 내내 우리가 갔던 곳을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맞다. 거기 예약 불가라고 되어 있어서 나도 궁금했어요.”
우리가 전에 묵었던 ‘코히바 빌라’는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배기에 있었다. 오고 가기는 번거로웠지만 대신 탁 트인 전망과 바다와 이어진 듯한 인피니티 풀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예약만 가능했다면 이번에도 그곳에서 묵고 싶었는데 어쩐 일인지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한번 가볼까?”
“그럴까. 슬슬 걸어가면 이십몇 분 걸리겠다.”
내가 지도 앱을 켜서 거리를 가늠하자 엄마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길이 어렵지 않아 부모님이 앞장 서고 마침 식사를 마친 언니가 내 뒤를 따라왔다. 투박하고 한산하던 뒤쪽 해변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액티비티를 즐기러 온 외국인들로 북적였다. 그들을 지나 언덕을 올랐다. 흙길이던 언덕도 걷기 편하게 보도블록이 깔려 있었다. 얼마쯤 걷다 엄마는 아예 신발을 벗어버렸다. 양손에 신을 들고 경쾌하게 걷는 모습이 꼭 소녀 같아 뒤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길가에 늘어져 하품하던 누렁이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틀었던 것 같은데.”
길눈 밝은 아빠가 말하자 엄마가 맞다고 손뼉을 쳤다.
“그때 한 차에 우리 다섯이 몽땅 타서 요기서 차가 멈췄잖아. 그래서 남자들이 내려서 밀고. 맞지?”
“맞네, 거기네. 그때는 도로포장이 안 돼서 엄청 털털거렸는데.”
길을 걷다 보니 오래전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코히바 빌라’ 앞에 서서야 우리는 잠잠해졌다.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시원시원한 건물과 야자수,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분위기 있던 길은 간데없고 다 쓰러져가는 폐허뿐이었다. 내심 짐작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엄마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차고 아빠는 건물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남아 있는 그때의 흔적을 찾았다. 나도 잠긴 울타리 너머로 우리가 묵었던 객실이 어디쯤이었나 가늠해 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십 년이란 이런 시간이로구나, 번성했던 것이 쇠락하고 마는 쓸쓸하고 영락없는 시간. 그동안 우리 안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스러졌겠구나. 앞으로도 그럴 테지. 그러자 무엇을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애틋함이 차올랐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지 못한 채 나는 멀미를 견디듯 그 감정을 되새김질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깨어 있었다. 마음이 분주해졌다. 언니는 부랴부랴 세 남자를 챙겨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막내는 마지막 마사지와 기념품 예약을 하느라 여전히 바빴다. 여동생도 피곤한 몸을 일으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아이들과 전남편 Y를 데리고 나갔다. 대체로 식성이 좋았던 Y가 여행 와서는 특유의 향 때문에 제대로 먹질 못했던 모양이다. 제각기 흩어져 반나절을 보내고 저녁에는 마지막 수영을 했다. 때마침 숙소 측에서 버블파티를 연 덕에 음악과 조명과 거품 사이를 누비며 한껏 즐길 수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맥주와 안주를 테이블에 차려놓고 물속에서 돌고래처럼 불쑥불쑥 고개 내미는 자식들에게 한 입씩 먹였다. 우리는 먹으면서 웃고, 웃으며 먹고, 아무 이유 없이도 깔깔 웃었다.
밤이 되어 식구들이 잠들고 뒷정리까지 마치고 나자 언니와 나, 여동생만 남았다. 늘 할말이 많은 사이였지만 이번 여행에선 셋만 있어 보질 못했다. 언니와 나는 졸리다는 여동생을 억지로 끌어내 테라스로 갔다. 파티가 끝난 수영장은 잠잠했고 왼쪽 해변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좋았다.”
“좋았어, 진짜.”
남은 맥주에 과자를 먹으며 중얼대다 우리도 이내 차분해졌다. 그러다 다른 가족에게 말하지 않은 우리만의 여행 소감을 주고받았다. 주로 부모님과 남편,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번 여행이 서로의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힘이 될지,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같은. 우리 이야기였지만 우리 이야기가 아닌 것들이었다.
“좀 더 있어야겠지?”
“아마도.”
“그땐 엄마, 아빠랑 우리 세 자매만 올까?”
“그래. 인간적으로 막내는 빼주자.”
우리는 그러고도 한참, 해변을 군데군데 밝히던 조명이 꺼질 때까지 두런거리다 여행을 마무리했다.
* 길고 긴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는 장마가 꽤 끈질길 모양입니다. 장마가 끝나면 또 무더위가 시작될텐데 걱정이네요.
저는 23회차로 상반기 연재를 마치고 한 달 간 방학을 하려 합니다. 사실 매주 연재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일하면서 쫓기듯 글을 쓰다보니 아무래도 완성도가 떨어져 독자분들께 죄송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학을 마치고는 조금 느슨하게 연재를 해볼까 합니다. 일주일은 너무 빠듯하고 이삼 주? 잘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기간을 조절해가며 글을 충분히 다듬어 내놓을 수 있는 간격을 찾아 연재를 이어가겠습니다. 몇 달간 날 것의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여름 건강히 보내시고 곧 다시 만나요^^
*참! 그리고 자랑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요.
<우리 맹렬하고 안쓰러운 자매들> 13화 '토마토의 맛'이 독립 문예지 <베개 9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기대 없이 응모한 글을 눈 밝고 마음 따뜻한편집자님께서 알아봐 주셨어요.
힘 내라고 응원해주신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베개>는 '등단이라는 승인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문학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모토로 창간되어 올해로 7년을 맞이한 참신하고 멋진 독립 문예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