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문은 열어야지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소리 '딸랑'

by Mira Kang

15년 전, 나와 남편, 그리고 당시 2살이던 큰 아이는 한겨울에 미국에 왔다. 미국의 첫인상은 아주 황량했다. 미국의 동부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우선 해가 너무 빨리 저문다. 오후 4시만 돼도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안 그래도 추운데 어둡기까지 하니 더 춥게 느껴졌다. 상가와 주택가가 구분되어 있어서 뭘 하나 사려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맨해튼 같은 도심을 제외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게문도 빨리 닫는다. 어떤 마트는 저녁 8시, 어떤 곳은 저녁 9시, 그나마 한인마트가 제일 오래 해서 밤 10시. 나는 이 세 가지 특이점이 서로 작용을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너무 어두워서 사람들이 안 다니다 보니 가게들이 문을 빨리 닫는 건지, 가게가 문을 빨리 닫으니 안 그래도 어두운데 사람들이 더 안 다니게 된 건지, 사람들이 안 다니니 어차피 어두워진 거 문을 빨리 닫은 건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미국 동부의 저녁은 어둡고 사람이 없고 가게들도 문을 빨리 닫는다는 점이다.


소비자로 한평생을 살다가 판매자가 되니 생각이 바뀌었다. 소비자일 때는 일찍 문을 닫는 판매자들에게 서운했다. 늦은 시간에 필요한 게 있어 나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판매자가 되니 솔직한 심정으로 편하고 살고 싶었다. 문을 늦게까지 열자니 벌써 피로감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장이 편하면 고객이 불편하지 않은가. 두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 결국 어려운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소비자로 느꼈던 불편한 점을 해결하는 게 좋은 판매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밤새 보안을 위해 환하게 켜져 있는 실내불과 상반되게 '문 닫음'이라고 적힌 푯말이 영 마음에 안 들었었다. 어떤 날은 늦은 시간에 쇼핑하고 싶은 날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가게는 다른 화장품 가게보다 늦게까지 운영한다. 보통 화장품 가게들은 저녁 6시에서 7시에 문을 닫는다. 우리 가게는 가을에는 밤 9시까지 문을 연다. 겨울에는 저녁 8시, 여름에는 밤 10시까지 열 예정이다. 그래서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좋다. 퇴근 후 저녁식사를 하고 들르는 단골들이 많다. 회식하고 발갛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고기 냄새가 밴 옷에 방향제를 뿌리려고 들린 고객, 주말 약속을 위해 쿠션을 사야 한다며 아직 가게가 열어 다행이라는 고객, 일이 고되었는지 기분 전환한다고 립제품을 하나 고르며 마음을 달래는 고객. 모두 늦은 시간 우리 가게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시간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이 유한하고 미확정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언젠가 죽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는 시간이 많아도 모을 수 없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미리 당겨 쓸 수도 없다. 다만, 지금을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 가게는 무조건 문을 연다. 최대한 늦게까지 연다. 미국 마트만큼 늦게까지 연다. 날씨와 상관없이, 휴일과 상관없이 연다. 미국 전체가 쉬는 감사절, 성탄절, 새해에도 우리 가게는 열려 있다. 아무도 안 와도 열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열면 손님이 온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온다. 연휴 아침에 갑자기 받은 식사 초대 자리에 가져갈 선물을 사러 오기도 하고, 타주에서 놀러 온 가족과 함께 추억을 만들러 오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연휴에 혼자 지내는 고객은 무료함과 적적함을 달래러 오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고객들은 우리 가게가 열려있어서 반가워한다. 사장인 나도 우리 가게를 찾아준 고객이 반갑다.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딸랑' 소리를 내며 와준 그들이 고맙다. 그렇게 우리는 소중한 지금을 우리 가게에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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