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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Feb 05. 2019

세상에서 제일 예쁜 키보드를 사기까지

키보드 구매까지 5일간 겪었던 심경변화


다가오는 설을 맞아 나에게 주는 선물로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 장만했다. '2018년 한 해 동안 버둥거리느라 고생 많았어 토닥토닥’ 이런 생각에 건네는 셀프 보상이었다. 그런데 이 조그만 선물이 나에게 오기까지 지난 1주일간 벌어졌던 내적 갈등이 괴-앵-장히 심했기에 오늘은 이 작은 종이에 당시의 고민들을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앞으로의 미래에도 '지름 요정'과 사투를 벌일 수많은 동무들이 부족한 감상을 조그만 후레시로 삼을 수 있길.

1일 차: 운명적인 만남


흔히 무언가 갑자기 엄청나게 사고 싶은 감정을 일컬어 ‘뽐뿌가 온다’는 말을 쓴다. 이 말은 대체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지만 ‘심장이 (욕심에 눈이 멀어) 두근두근 펌프질 하는 싸구려 감정’을 정확히 묘사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 키보드와 나의 만남도 딱 ‘뽐뿌’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연히 유튜브 채널에서 보게 된 ‘스웨디시 에디션 키보드’는 매사 북유럽식 깔끔함을 동경하는 나에게 이케아 한복판에 들어서는 것 같은 포근함과 청량감을 동시에 선사해주었던 것이다.


완전 예쁜 키보드


해당 유튜브를 한번 틀어보니 이 키보드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내 취향이었다. 우중충한 사무실을 환하게 밝혀줄 알록달록 예쁜 배색,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저소음 흡음재 처리, 그럼에도 키캡 하나하나 신경 쓴 태가 나는 꼼꼼함이 일품이었다. 이때 유일한 흠이라면 제품의 가격이었는데, 무슨 키보드가 15만 원이나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은 키보드의 세계를 좀 공부하여 이게 비싼 가격이 아니란 걸 알지만 당시에는 이게 세계 최고가 키보드라고 생각했었다.)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생각이 들자 간사한 전두엽은 ‘넌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키보드가 꼭 필요했다’며 자기 합리화 시작해주었다.


2일 차: 미래의 나를 위한 배려심


작고 예쁜 ‘알록이’를 구입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자 생선가시처럼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과연 키보드의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고민은 만일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저  비싼 키보드를 덜컥 구매했다가 하루 이틀 뒤에 ‘더 예쁜 게 있으면?’, 혹은 ‘더 싼 게 있으면’ 미래의 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열심히 발품 팔고 노력하면 3일 뒤의 나는 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지 정도의 ‘배려심’ 비슷한 심사였다.


그때부터 기계식 키보드의 역사와 종류, 타 키보드와의 비교 시연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꼼꼼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때마침 금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방안에 들어박혀 찬찬히 공부(?)하기 알맞은 시간이었다. 청축, 갈축, 적축, 무접점 등등 온갖 종류의 키보드 브랜드를 전부 섭렵하고 나서야 미래의 나에게 ‘이 정도면 3일 전의 나도 충분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이 세상 모든 재화가 그렇겠지만 키보드의 세계에서도 싼 게 비지떡이고 비싼 것은 이유가 있었다. ‘스웨덴 알록이’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키보드였던 것이다.


이렇게 종류가 다양하다


3일 차: 현자 타임


한참을 ‘알록이’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지혜의 시간이 찾아왔다. 대체 나는 무엇을 바라 이런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전날 키보드 공부에 밤을 새우느라 컴퓨터 학원 숙제도 제대로 못하고 강남 가는 버스에 앉아있으려니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었던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옛이야기 속 스님께서는 난초 하나를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셨다고 했다. 그러나 큰스님은 그 어여쁜 난초에 매여 수행은 게을리하셨다고. 얼마 안가 불의의 사고가 생겨 난초가 죽자 큰스님은 깨달으셨다고 한다. 소유란 결국 굴레일 뿐이라는 걸.


부질없다 집착들


법정 스님의 말씀을 단전에 오롯이 새겨 넣자 키보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키보드란 그저 사무용품이란 미명 하에 나를 근무지에 옭아매는 예쁜 쇠사슬일 뿐, 그런 굴레를 기쁜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다니, 이 IT소작농 같은 인간아,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이 같은 다짐으로 스스로를 일갈하며 고통스러운 소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세상이 환해지고 이제는 키보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금 하루하루의 일정에 치여 사무실을 쏘돌아다니기 바빴으니 그렇게 욕심 해방의 문이 보이는 듯했다.



4일 차: 알고리즘의 습격


키보드의 반격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3일 동안 내 구글 아이디가 ‘파랗고 노란 키보드’가 있는 인터넷 화면을 너무 많이 봐왔던 것이다. 침대에서 잠들기 직전이면 꼭 아른아른한 그 이미지를 한 번씩 검색하고 곯아떨어지곤 했으니 그때의 욕망들이 인터넷에 속속들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간사한 크롬이 ‘쿠키’라는 달콤한 미명 아래 내 욕망의 흔적을 쇼핑몰들에 마구 팔아넘겼고, 이제 수많은 쇼핑몰들이 ‘고객 추천 알고리즘’을 핑계로 들어 등장하는 웹페이지마다 기계식 키보드를 보여주고 있었다. 유약한 인간의 마음은 견물생심인지라 다시금 키보드를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쯤 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나라는 인간의 소비행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평상시에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고작 15만 원 조차 못쓰는 것이냐며 스스로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이 생각을 했던 때가 침대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었으니 새벽 2시쯤 되었을 때였나. 오롯하게 누워 골똘히 고민하고 있던 차, 무언가에 홀린 듯이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주저 없이 결제 버튼을 눌렀다.

5일 차: 행복 


다 쓰고 보니 대학교 때 마케팅 원론에서 배운 소비자 행태를 비슷(?)하게 따라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알록이는 바로 다음날 배송이 왔다. 회사에서 반들반들한 키보드를 꺼내고 톡톡톡 글자를 쳐 내려가려니 사무실에 작은 즐거움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더불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키보드에 대해 물어보니 쉽게 말을 나누기 어려웠던 동료들과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다. 그제는 갑자기 옆 부서에 과묵한 팀장님 한분이 총총 찾아와 대뜸 키보드에 대해 물으시기에 (너무너무 탐나신다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조금 친해지기도 했다.


자리에 앉으면 기분이 좋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키보드를 얻은 데는 꽤나 까다로운 내적 갈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사고 보니 나와 하루 종일을 함께 하는 '작은 사치'는 생각보다 큰 즐거움을 준다.  단순히 의 만족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삭막한 사무실에서 주변 사람과 재미있는 일화를 위해서라도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는 게 맞는 것 같다. 매일 마주하는 생활용품에 조그만 뽐뿌가 오는 순간이 있다면 너무 크게 저항하지 마시길. 그 ‘잇템’이 생각보다 오래가는 소확행 하나를 마련해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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