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별' 사람들이 다-있다!
세계적인 전시회에서 하루 동안 회사 부스를 운영하다 보면 하루에 작게 잡아 500명, 많게는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전시는 보통 10시에서 6시로 8시간 정도니까 대충 시간당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보시면 된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하루 온종일 만나다 보면 문자 그대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는데, 전시 3일 차쯤 되다 보면 ‘그동안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하지만 전시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백인백색이냐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다. 찾아오시는 분은 많지만 이분들은 크게 9가지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아마 해외에 어떤 전시를 가든 이 구성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 짐작한다. 그럼 2019년 모바일 월드 콘그레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떤 군상들이었을까?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전시회에는 늘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이 엄청난 수의 기자단을 보낸다. 보통 많은 기자분들이 그 전시에서 ‘가장 핫한 것’을 찾아다니는데 이번 전시회의 경우 그것이 ‘폴더블 폰’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계신 분들도 하루 걸러 한 번씩 ‘삼성이 최고네’ , ‘화웨이가 낫네’에 관한 ‘MWC 폴더블 폰’ 기사를 보셨을 것이다.
자극적인 메인 디시가 끝나면 기자분들은 삼삼오오 모여 '부스 투어'를 다닌다. 대개 부스를 잡은 회사가 투어 일정을 잡아주고 1시간 정도 기자 간담회를 진행하는 식이다. 간담회가 끝나면 기자분들은 직접 전시회를 돌며 꼬치꼬치 질문을 하고 전시 담당자(나)는 열심히 대답을 한다. 하지만 이 인터뷰 순간은 아주 조심해야 하는데, '내가 말한 그대로' 기사가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기사는 기자 분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대로 각색된다. 인터뷰가 끝나고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 또 확인해야 나중에 '이게 뭔 소리예요!!'하고 전화통이 터지는 대참사를 막을 수 있다.
외신들의 경우 취재 방식이 약간 달랐다. 내가 만난 외신들은 글로 기사를 써가기보단 카메라를 들이밀면서 60초에서 100초 정도 질문-답변식 인터뷰를 따가는 경우가 많았은데, 아마 나중에 편집 할 요량인 듯싶었다. 이렇게 인터뷰를 따간 기자분의 경우, 전시가 끝난 뒤 이메일로 장문의 질문지가 날아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영어로 인터뷰를 응대하는 것이 많이 불편했는데, 3일 차쯤 되면 똑같은걸 하도 많이 한 나머지 뇌에 자동 재생 기능이 생긴다.
학생들은 내가 전시를 하며 가장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주변 지역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현장학습을 목적으로 전시회에 방문하는데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돌아다닌다. 귀여운 것은 MBA 대학원생들이건, 고등학생들이건 다들 숙제 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6인 1조 쯤으로 모여 나 같은 부스 담당자들을 졸졸 찾아다니고, 우리를 만나면 길고 긴 인터뷰를 이어간다. 처음에는 이런 게 귀찮기도 했는데, 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긴장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감화되는 느낌은 덤이다.
내가 만난 학생 중 제일 어린 친구는 14살짜리 중학생이 꼬마였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랑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상에 이 나이 때부터 스타트업 부스를 돌아다니며 현장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조그만 애가 조목조목 질문까지 하니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다시금 힘이 솟았던 기억이 난다.
전시가 3일이나 계속되다 보니 고목나무가 아닌 이상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 전시 담당자들은 '좀 쉰다'는 명목 하에 다른 전시자들을 기웃기웃 거릴 수 있다. MWC는 스페인에서 하는 전시답게 전시자들도 스페인 사람이 가장 많은데 눈대중으로 한 25퍼센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 다음은 근처에 사는 유럽 사람, 북미 사람 순이며, 중국이나 일본 대만 기업들도 종종 보이는 정도다.
재미있는 점은 한국 스타트업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정부나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자본금을 지원하고 해외 행사를 중계하는 우리나라 문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간중간 돌아다니면서 15개 정도의 업체를 방문했었는데, 카이스트에서 온 학생들, 경기 창조경제 혁신센터에서 온 청년들, 스타트업 캠퍼스에서 온 사업자들이 많았다. 모두 피곤에 찌들어있지만 활기찬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보며 동병상련의 묘한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커다란 할인 혜택이 돌아가는지, 그냥 동네 주민 같아 보이는 분도 간혹 있었다.(이 전시는 입장료가 수십만 원이라 아무나 들어오기 어렵다. 다만 지역 주민에게는 할인을 제공한다고)이런 주민들 중에서는 스페인 호호 할아버지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들은 에코백을 하나씩 들고 룰루랄라 돌아다니셨는데, 우리 부스에 와서는 태블릿을 살금살금 눌러보셨다. 내가 숨어있다 대뜸 말을 거니 혼비백산하며 놀라셨던게 생각난다. (숨어있다 말을 거는 동양인 1) 조금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할아버지께서는 자기는 이 행사를 매번 오는데 올 때마다 재미있고 즐겁다며 내년에 또 보길 바란다는 덕담까지 해주셨다. (할아버지.. 전 너무 힘들어서 내년엔 아마.. 안 오고 싶....)
전시에는 해외 기업 관계자들도 많이 참여 한다. 이건 나라별로 특색을 한번 정리해봤다.
영국: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가 활발한 것 같았다. 그리고 사업 실무적으로 여러 가지 조언을 주시는 분이 많았다. 뭐랄까 전반적으로 이 사람 꽤 스마트한데..? 싶으면 영국 사람이었다. 내가 교환학생 때 만났던 진상 잉글리시들과 달라서 놀라웠다.
스페인: 너무 많이 만나서 특징을 하나만 뽑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다만 부스의 특성 탓인지, ‘사회적 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시는 분이 많았다. 스페인에서는 우리 서비스가 언제 론칭되냐고 물어보시는 분도 꽤 있었다. 아직은 계획이 없다고 하니 화내시는 분도 있었다. (농담 식으로)
브라질: 개인적으로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관계자였다. 콘퍼런스에서 내 발표를 듣자마자 우리 부스로 와서 발표에 대한 소감을 조목조목 얘기해주신 분이었는데 아직도 그 초롱초롱한 눈빛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일본: 전반적으로 진짜 열심히 들으신다. 총 5분 정도 만났던 것 같은데 하나같이 골똘히 들으셨다. 그리고 다들 영어를 잘못하셔서 자기 의견을 말하면 우물우물하셨던지라, 내 비루한 일본어로 '아노-' 하고 말을 시작하면 속사포 같은 질문을 쏟아내셨다. 대부분 매너도 좋고 경우도 바르신 분들이었다.
인도: 인도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 인도 사람들은 스테레오타입 그대로다.(캐나다 유학시절 믿고 거르는 인디아라는 말이 있었다. 읍읍) 어떻게 오는 사람마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이었고, 캐리어 하나에 온갖 잡동사니는 다 넣고 부스 한복판에서 책임자랑 미팅을 잡아달라며 떼를 부렸다. 요즘도 요지를 알 수 없는 메일을 계속 보내는데 갑갑하다.
한국: 우리나라는 좀 극과 극이다. 진짜 멋지고 총명한 분들도 있는데 이상한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누구 아냐?’고 물어보며 본인 인맥 자랑하시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일단 제가 사회생활이란 걸 1년밖에 안 해본 초짜여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전시 주최자들은 헤드셋을 머리에 끼고 각종 행사나 전시를 총괄하시는 분들인데 가끔 무언가 물어볼 일이 있으면 늘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응대해주신다. 동시에 이들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 듯이 ‘좋은 시간 보내고 있어요?’ (두유 헤브 그레잇 타임?!!)라고 물어보는데 이건 아마 직업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와 잘 안 맞는 분들이었다. 일단 이분들은 너-무 인싸여서 말 그대로 항상 열정 과잉 상태다. 뭐 인사 한 번이라도 하려 치면 훠후! 예아! 유 디드 그레잇! 이라는데 대체 뭐가 그레잇 인지도 모르겠고, 항상 눈빛도 굉장히 초롱초롱해서 나 같은 집돌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에너지를 뿜고 계신다. 와, 이 정도 에너지가 있어서 전시회 전체를 이끌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세계적인 전시라고 항상 대단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말 사진만 찍으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이들을 ‘프로 사진꾼’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사람들은 부스에서 뭘 전시하는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알리고 싶어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회사에서 나를 여기에 보내줬으니 대충 보고서 용으로 사용할 ‘멋져 보이는 사진’을 찍고 관광지에 놀러 가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 ‘외국인(보통 백인들을 찾아다님)’, ‘번쩍번쩍한 부스’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디멘터처럼 지나다닌다.
다른 나라 사람 중에서도 이런 종류의 진상들이 있었지만 슬픈 점은 ‘한국 사람’이 유의미하게 많았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셋은 대기업 둘에 공기업 하나였다. 이런 사람들은 서비스 설명은 하나도 듣지 않는다. 아직 말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알겠다!’고 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만 찍는다. 그리곤 도망치듯 후다닥 부스를 나서며 ‘아 나 이 아이디어 너무 좋아! 껄껄!’ 이런 말까지 서슴없이 뱉어댄다. 그런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수백만 원을 들여 저 사람을 여기까지 보낸 회사가 불쌍해지고, 회사에서 그의 출장비를 벌어왔을 직원들까지 가여워지는 것이다. (이런 문화는 정말 없애야 한다. 해외 출장으로 놀러 가는 분들 반성하시길! 사진은 올릴까 하다가 참았다)
도둑에 관해서는 진짜 할 말이 많다. 유럽 여행을 가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메이플 스토리에 ‘커닝 시티’쯤으로 보시면 된다. 그냥 열 사람 걸러 한 사람 정도는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미안해요 스페인 사람들) 본인의 정신 건강과 재정 상태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나만 해도 대학생 시절, 배낭여행 둘째 날 가방을 통째로 다 잃어버린 덕에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 전시 내내 가자미 눈을 뜨고 다녔다. 이렇게 하루 종일 온신경을 곤두세워야만 사고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번 전시도 희생양은 있었다. 같이 갔던 일행분들이 첫날은 여권을, 둘째 날을 지갑을 잃어버리셨다. 심지어 둘째 날에는 ‘너 어제 여권도 잃어버리고 조심해야지 진짜’ 하며 하하호호 떠들고 있던 사이 도둑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들고 가 버렸다. 결국 희생자 두 분은 첫째 날도 경찰서에서 3시간을 보내시고 둘째 날도 똑같은 일정을 반복하셨다. 심지어 도둑맞은 지갑에서 정지했던 신용카드가 계속 결재 시도되고 있는 걸 발견하시곤 스페인 도둑(대개의 경우 집시)의 무시무시함에 다 함께 몸서리쳤다.
마지막으로 함께 전시를 진행한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난다. 같이 간 부서의 동료들, 부스 제작 대행사, 현지인 도우미들까지. 전시를 하는 중에는 너무 바빠서 서로 소리도 지르고 나쁜 말도 하며 떽떽거리지만 끝나고 나면 이제 떠난다는 생각에 엄-청 아쉽다. 사람은 누구나 고생을 함께하면 친해지는지라 고작 3-5일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어도 예전보다 훨씬 끈끈한 마음이 생기는 듯하다. 나름 전우애 비슷한 감정이랄까.
이렇게 돌이켜보니 참 별별 사람 다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뭐 계약을 따온 것도 아니고 돈을 벌어온 것도 아닌지라 회사 입장에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옹골찬 전시회였다. 누군가 그럼 내년에도 가야지!라고 한다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매일 숙소에 도착해서는 침대에 그냥 퍼질러질 만큼 하루하루가 고되고 힘들었는데, 그걸 또 하고 싶지는 않다.(군대가 좋았지만 또 가기 싫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다음번 MWC 전시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냥 관람객으로, 전시장 걱정 안 하고, 마음껏 누리면서 다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