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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Oct 12. 2018

이토 히로부미는 그저 나쁜놈인가

일본이 '한국의 원수'를 존경하는 이유


정답부터 말하자면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인 입장에서 나쁜놈이 맞습니다.


이토는 한국통감을 지내는 동안 대한제국을 내부에서부터 야금야금 무너트려 갔습니다. 외교권 박탈, 고종황제 퇴위처럼 한국침략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이토의 작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의 최후는 한민족의 역사를 망가트린 악당으로서 손색이 없을만큼 드라마틱한데요. 조선 식민지화를 마무리 해가던 시점, 이토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습니다. 이쯤되면 과연 만큼 뼛속까지 철저한(?) 제국주의자가 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이토히로부미(왼쪽)와 친일파들(오른쪽)


그러나 만약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무슨 답변이 나올까요? 몇년 전, 도쿄대 법학부 친구들과 함께 일본 국회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이드를 해주신 교수님을 따라 한참을 끄덕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메인 로비에 도착하니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버젓이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 절대악'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는 '당신이 왜 여기에?'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그때 일본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어떤 사람이야?' 친구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이토상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


조금 보수적인 성향의 친구에게서 나온 답변이긴 했지만 현재 대다수의 일본인들에게 이토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인물, 죽는 순간까지 메이지 천황(일왕)에게 가장 신뢰받았던 인물,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기억되는 인물. 이 모든 타이틀을 얻기까지 이토 히로부미 개인의 인생사에는 누구못지 않게 굴곡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그 수많은 굴곡 중 '한국인의 원수' 이토가 '일본 국회의 한복판에 서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국회의사당 메인로비 : 맨앞 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때는 1881년 11월 일본이 서구식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습니다.(이때 조선에서는 영남지방 유생들이 개화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던 영남만인소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내무경, 지금으로 치자면 경제부총리 정도의 높은 직책에 있었는데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이토는 일본 지도부에서 아주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토는 이때 이후로 우울증과 노이로제에 걸려 건강이 갈수록 악화됩니다. '술 한병을 비우지 않으면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이었지요.

그가 노이로제에 시달린 이유는 바로 '헌법'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서구식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유럽처럼 헌법을 통해 국회를 설립하고 근대적인 정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부는 아직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요. 그러다보니 핵심 지도층이 반으로 갈려 '그냥 무시하자'는 의견과 '뭐 그깟 헌법 대충 만들면 되는거아니냐'는 의견으로 투닥투닥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미국에서 헌법을 공부했었던 이토는 '헌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만들어야 하지만 그것을 나라에 맞게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토가 괴로웠던 것은 바로 이런 '맞춤형 헌법'을 만들 사람이 일본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오랜 고민 끝에 내무경의 자리를 내려놓고 본인이 직접(!)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영국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를 제외했던 이유는 국왕의 권한을 철저히 제한하는 영국 헌법이 천황을 하늘같이 여기는 일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독일에 도착한 이토는 독일의 외교가와 정치인들을 만나는 대신 곧바로 베를린 대학의 그나이스트와, 빈 대학의 슈타인을 찾아가 배움을 간청합니다. 자신에게 일본을 발전시킬 선진 헌법에 대해 지도해달라는 이유였지요.

이토(오른쪽)에게 독일 헌법을 교육한 슈타인(왼쪽)


막상 헌법을 공부해 오겠다며 베를린 대학에 들어간 이토였지만, 사실 그는 독일어를 전혀 못했습니다.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 그것도 가장 어렵다는 법률을 이토는 어떻게 공부했던 걸까요? 비결은 경험에 있었습니다. 이토는 비록 독일어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일본 정부의 모든 요직을 두루거치며 근대 법률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과거 유학시절, 미국 헌법을 샅샅이 공부해둔 경험 덕분에 독일법을 이해하는데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요. 그는 슈타인 교수의 지도 아래 , 난해한 독일 헌법 이론을 영어로 한단어 한단어 번역해가며 꼼꼼히 소화합니다. 그때의 공부가 얼마나 즐거웠던지 이토는 자신의 동지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독일의 헌법과 행정에는 전문적인 언어가 너무도 많아 이를 영어로 간신히 해석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런 법들의 장단점에 대해 논할때면 진실로 잠자고 쉬는 것조차도 전부 잊을 만큼 재미있습니다. ... 조금이라도 (일본의 헌법을 위한) 핵심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이제야 마음 편히 죽을 곳을 찾은 기분입니다.


2년 간의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한 이토는 정부의 젊은 인재들과 함께 '일본 최초의 헌법'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나쓰시마에 있는 별장에 틀어박힌 이토는 일본을 서구 열강처럼 만들겠다는 무시무시한 일념 하나로 고통스러운 창작조차 기쁜 마음으로 몰두합니다 . 당시 그는 어린 신진 관료들이 지위가 높은 자신 앞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토론을 시작할때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반드시 모두 털어 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4달간 이런 격론을 통해 만들어진 '제국헌법' 초안은 이후 여러차례 수정을 거쳐 '근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뼈대로 탄생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토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가 대한제국에 저질렀던 비열한 일들을 생각하면 이런 '원한'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테지요. 하지만 이런 미움이 한발자국 더 나아가 '이토를 무시하자'는 의견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당장 네이버 인물사전에 '이토 히로부미'를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댓글이 베스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쁜놈이면 몰라도 되는걸까요


그러나 이토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는 '무서운 열정'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헌법과 내각, 그리고 국회를 만들어낸 '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거를 가진 그는 오늘날 기세도 당당하게 국회 로비의 한복판에 서서 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안중근 의사(장군)의 희생과 순국을 기리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처단했던 악당 이토가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토를 '그저 나쁜놈'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기 보다 '상대로 두기엔 끔찍할만큼 무서운 인간' 이라고 여기며 알아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이토 유키오, '이토 히로부미' ,선인, 2014

이성환,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선인, 2009

일본 위키피디아, '이토 히로부미' 항목

네이버 인물사전, '이토 히로부미'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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