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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Oct 07. 2018

판사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아서왕 이야기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은 명예로운 행동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요새 사법 농단과 재판 거래 관련된 수사로 정신없이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동안 수많은 압수수색 영장과 구속 영장을 기각하셨다고 하더군요. 청렴결백한 사법부를 검찰의 외압으로부터 지켜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법원은 도무지 조사할 수가 없는 곳인가봐요.

오늘은 긴히 전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짧은 글을 하나 올리려고 합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허락해 주신다면 잠시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영국 남지방 어딘가에 아서왕과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살았답니다. 바로 고결한 기사도를 자랑으로 삼는 '원탁의 기사단' 이었는데요. 랜슬롯, 가웨인, 이런 이름을 아마 한 번쯤 들어보신 적이 있겁니다.  하루는 이 기사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행복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보름 동안 이어져온 파티에는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갑자기 흥겨운 연회장의 문이 불쾌한 소음과 함께 벌컥!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온몸이 에메랄드 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녹색 기사'가 풍채도 당당하게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화들짝 놀라 토끼눈을 뜨고 있던 왕과 기사단 앞 거구의 녹색 기사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가 듣기로 이곳의 기사들이 그토록 대단하다던데 그렇다면 나와 '목 치기 게임'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 지금 내 목을 먼저 쳐라. 하지만 내 목을 치는 사람은 바로 1년 뒤 오늘, 자신의 목을 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여기가 기사중의 기사들이 있다는 아서왕의 궁전인가?


원탁의 기사단은 모두 녹색 기사의 기괴한 음성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아서왕이 직접 나섭니다. '오냐! 이놈 내가 직접 네놈의 목을 쳐주마!' 하지만 충성스러운 기사단이 왕의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때 가장 기사다운 기사로 유명했던 '가웨인 경'이  발자국 앞으로  공손히 말합니다.


'폐하 저 무례한 자의 목은 제가 치겠습니다. 저에게 저자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여유만만해 보이는 녹색 기사의 태도가 어쩐지 께름칙했지만, 용감한 기사 가웨인 경은 커다란 도끼를 휘둘러 녹색 기사의 목을 단번에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몸뚱이만 남아있는 녹색 기사가 자신의 목을 번집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1년 뒤 서쪽있는 자신의 성으로 찾아와 약속을 지키라'고 잔뜩 호통치고는 연회장을 떠나버립니다.

약속 지키시오. 난 분명히 말했소.


불쌍한 가웨인 경,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지만 다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바짝바짝 애가 탔습니다. 동료 기사들은 요술일 뿐이니 무시하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스스로는 '진정한 기사'로서 약속을 지켜야만 했기 때문인데요. 결국 가웨인 경은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두고 '목을 쳐지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온갖 난관을 헤치고 녹색 기사가 말했던 장소에 도착하니 커다란 성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웨인 경은 침을 꿀꺽 삼키고 성안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를 맞이한 것은 험악한 녹색 기사가 아니라 푸근한 인상의 성주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웨인 경의 열혈팬이라며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줍니다. 가웨인 경의 기사도와 명성에 대해 익히 들어봤다는 이유였는데요. 뜻밖의 행운을 만난 가웨인 경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아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성주의 아내가 가웨인 경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 그를 계속 유혹했던 것이지요. 성주가 자리를 비우는 때면 의 아내는 가웨인 경을 찾아가 대놓고 추파를 던집니다. 침실로 뛰어드는 일도 부지기수였죠. 하지만 기사 중의 기사였던 가웨인 경은 여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동시에, 요리조리 그녀의 을 피해나갑니다.


드디어 대망의 크리스마스 날이 밝았습니다. 가웨인 경은 깔끔히 목욕재계를 하고 '목잘리기 위한' 길을 나섭니다. 그때 성주의 아내가 다시 한번 가웨인 경의 침실로 끈질기게 달려드는데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런 유혹을 합니다.


기사님이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시니 사랑의 징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초록색 허리끈입니다. 이 끈을 매고 계시면 어느 누구도 기사님께 털끝 하나 상처 입힐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된 마법이 깃든 보물이기 때문이지요. 부디 이 선물을 받으시고 항상 뜨거웠던 제 사랑을 영원히 기억해 주십시오.
저를 사랑해주세요 기사님

원래 같다면 이렇게 사랑이 담긴 선물절대받지 않는 가웨인 경이지만 1시간 뒤면 목덜미에 도끼를 맞는다 생각하니 동공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결국 가엾은 가웨인 경은 잔뜩 점잖빼면서 허리끈을 받아 자신의 갑옷 속에 몰래 묶어 놓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녹색 기사가 가웨인 경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약속대로 모가지를 늘어트리라고 협박하는데요. 가웨인 경은 초록색 허리끈을 믿고 오들오들 떨며 목을 들이밉니다. 무시무시한 녹색 기사는 도끼를 있는 힘껏 내리치려던 찰나, 가웨인 경의 목에 작은 생치기 하나남긴 채 무기를 거둬들입니다. 그리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나, 녹색 기사는 사실 당신이 묵었던 성의 성주요. 당신이 그동안 내 아내가 던진 유혹에 빠지지 않고 기사로서 명예를 지키는 것을 보며 그대를 죽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오늘 초록 허리끈을 받은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길 바라오. 그렇기에 당신 목에 조그만 상처 하나는 남겨 놓겠소.
녹색기사 앞에 목을 내미는 가웨인 경

녹색 기사의 아지트에서 빠져나온 가웨인 경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터덜터덜 아서왕의 궁전으로 돌아옵니다. 허리춤에 매져 있는 초록 허리끈, 그리고 목에 난 조그만 상처와 함께였지요. 이 증거들은 헛된 유혹에 빠졌던 가웨인 경의 부끄러움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성에 도착하자 동료 기사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된 일이냐며 그간의 경위를 꼬치꼬치 깨묻습니다. 가웨인 경은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이 저지른 부끄러운 행동을 아서왕과 동료 기사들 앞에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곤 자신이 기사로서 해서는 안될 부끄러운 짓을 했다며 용서를 구하지요.


이 소식을 들은 아서왕과 동료 기사들은 가웨인 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 누구도 지난 크리스마스에 가웨인 경만큼 용감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들은 감출 수 있었던 굴욕을 스스로 고백하며 반성하고 있는 가웨인 경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서왕은 원탁의 기사단에게  같이 초록색 허리끈을 매자고 제안합니다. 비록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그것 겉으로 드러내고 항상 반성하고 있는 가웨인 경이야 말로 가장 명예로운 기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사도를 지키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상징하는 초록색 허리끈


재판장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비록 구성원 일부의 잘못이었지만 그것을  함께 나누겠다며 초록색 허리끈을 맨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단이 바보 같아 보이시나요? 아니면 명예로워 보이시나요? 저는 감히 말씀드리건대 부끄러운 허리끈을 고백하고 공유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명예롭게 행동할 수 있는 '진정한 기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 거래는 정말 잘못된 범죄이지만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사법 농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오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런 과오를 끝끝내 인정하지 않고 감추는 일만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그 누구도 재판장님을 '명예로운 기사'라고 인정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러니 부디 지금부터라도 초록색 허리끈을 단단히 매시고 한층 더 명예로운 '정의의 수호자'로 거듭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 하에서도 재판부만은 양심적인 판결을 했던, 그 시절의 명예로움을 일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원작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translated by Jessie.L. Weston

사진 출처:


표지: '카멜롯의 전설, 스크린 캡처

뉴스 보도: JTBC 사회 2부 김지혜 기자

그림:
1. Jac Poreman,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story map

2. Emaze,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사법농단, #인문학, #영문학, #가웨인 경과 녹색기사, #부끄러움, #명예,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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