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서 힘들지만 먼 만큼 애틋한 길
얼마 전 '대학교 이름을 딴 지하철 역'과 '원래 대학교'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측정한 랭킹을 볼 일이 있었다. 후보로는 서울의 온갖 유명한 학교와 지하철역이 등장했는데 그중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했던 곳이 바로 내가 통학하던 '서울대입구역' 이었다.(왠지 뿌듯) 베스트 댓글 중에 역 이름을 '서울대 저 멀리'역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이 역의 이름과 위치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서울대입구역에 내리면 역 이름에 단초를 준 서울대는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데, 그 이유는 학교가 커다란 구릉을 하나 너머 아주 저~ 멀리 있는 까닭이다. 걸어서 학교로 들어가려 하면 25분 정도가 걸리며, 그나마도 끔찍한 오르막이 있는 탓에 대부분 시내버스나 셔틀버스를 탈 수밖에 없다. 큰 눈이 오는 날, 혹은 졸업식처럼 대규모 행사가 있는 날이면 역에서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데 버스로만 30분이 넘게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이 '고난의 길'을 해결하는 것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일종의 숙원 사업 같은 느낌이었던지라,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지하철에서 학교까지 무빙워크를 설치하겠다'처럼 유치한 공약(空約)들이 공개적인 지지를 받곤 했다.
지난 5년 동안 통학 생활을 했던 나는 학교가 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최대 피해자였다. 다른 학교 같으면 10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버스 줄을 기다리느라 20분씩 날려먹는 날이면 '역을 왜 이 딴 데(?)다 지어놔서' 혹은 '학교를 왜 저 구석에 박아놔서' 나를 괴롭게 하냐며 무던히도 궁시렁거렸더랬다. 한 번은 너무 급한 일이 있어 학교까지 뛰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이런 미련한 짓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만 얻은 날도 있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싫어했던 길인데 막상 졸업을 하고 보니 때때로 그리워지는 것이다. 너무나 멀고 힘든 길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많은 추억과 고민을 함께 나눈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역과 학교 사이에 놓인 이 길은 나와 친구들에게 좋은 대화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연극부 생활을 오래 했었는데, 성격이 유독 까탈스럽던 탓인지 연습 도중에 동료 배우들, 또는 연출, 스태프들과 싸울 일이 많았다. 그렇게 울적한 날이면 이 길은 친구와 화해하는 장소였다. 먼저 사과하기는 싫고, 내가 미안한 것은 있는 저녁이면 '야 오늘 걸어갈래?'라는 말을 툭 던지는 것이 유치한 자존심을 세우며 사과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25분 정도 짧은 오르막과 긴 내리막을 함께 걸으며(하굣길은 난이도가 훨씬 쉽다) 지하철역에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친구와 순댓국을 먹으러 가자며 화해한 상태였다.
이 길은 혼자 걷는 날에도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 되어서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정말 깊었는데, 그럴 때면 마음이 너무 답답한 나머지 혼자 청승맞게 걸어 다니곤 했다. 그때 했던 생각이란 것이 보통 '나는 왜 지난 4년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는가', '전공을 2개나 했는데 왜 둘 다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걸까', '지금이라도 고시를 시작해야 하나'와 같은 갑갑한 생각들이었다. 답도 없는 고민들이었지만, 30분 동안 길을 걷고 나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도 혼자 터벅터벅 걷고 나면 생각이 어느덧 상쾌해지는 '산책의 마법'이라는 것을 말했는데, 나도 아마 여기서 비슷한 것을 체험했던 것이리라.
사람마다 누구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애착길'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역과 학교 사이의 이 길이 한참 정이 든 '애착길'이었던 모양이다. 졸업을 한 뒤 시간이 조금 지난 요즘은 회사를 마치고 명동역 한복판을 15분 정도 가로질러 퇴근을 한다. 늘 관광객과 노점들로 북적거리는 이 거리는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고 지나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날들이면 비록 길고 험하긴 했지만 친구와 대화하며, 또는 혼자 사색하며 걸을 수 있었던 '나만의 애착길'이 때때로 마음 깊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