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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오 Apr 24. 2019

<리틀 드러머 걸> 찰리의 '노화' 드라마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The Little Drummer Girl)

  돌아보면 살면서 참 많은 사람과 만났다. 어려서 함께 놀던 놀이터의 친구들부터 조금 전 내게 영수증을 건네 준 카페의 점원까지. 식사를 함께 했던 사람과 그럴 기회가 없던 사람.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사람과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 지난주에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과 어제 잠자리에서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함께 사랑에 빠졌던 사람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 나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 사람과 내가 남긴 흔적에 아쉬움이 남는 사람.


리틀 드러머 걸 (The Little Drummer Girl, 2019) 출처 : 다음


  <리틀 드러머 걸>을 보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단둘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자신을 좋아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다. 분명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앞으로 더 좋아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내 앞에 나타났고, 자꾸만 나를 찾았고, 또다시 말은 그렇게 했다. 그녀가 스쳐간 자리에는 마치 도로 위 스키드 마크처럼 검고 굵고 진한 상처가 남았다. 그녀의 말을 들을 걸이라고 생각해봤자, 이미 일은 벌어지다 못해 전부 끝나버린 후였다. 덕분에 나는 많은 사람을 잃었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잃게 될 것이었다. 마음에 패인 지저분한 상처와 두툼하게 잡힌 주름에 이는 바람이 너무 시렸다.


  그 일을 겪으며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가벼이 여겨지고, 여러 사람에게 속아버린 탓에 나 말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그렇다고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리거나 대인기피증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어디서든 두 발은 조금 벌린 채 여차하면 자리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틀 드러머 걸 (The Little Drummer Girl, 2019) 출처 : 다음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상처는 시리지 않았다. 흉터는 남았지만 그것도 역시 점점 옅어질 것이었다. 그동안 마음에 흉터는 많아졌고 어떤 것이 왜 생겼는지 구별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꽤 잘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됐다. 비록 아쉬움을 참아야 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과거의 상처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뭔가 물에 잠기는 것처럼 흠뻑 빠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다행인지 가슴에 뭔가 끈 같은 것이 연결되어 나를 붙잡아 매달고 있는 것 같았다.


리틀 드러머 걸 (The Little Drummer Girl, 2019) 출처 : 다음


  찰리가 가디를 만나 사랑하게 된 것이 잘 된 일인지 아니면 불행한 일인지 나는 잘 알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만남이 배우로서 살아온 그녀의 삶을 다르게 바꿔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다른 관객을 상대로 다른 연기를 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 그녀는 변했다. 물론 그 변화의 원인이 순전히 우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너무 일방적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녀의 감정은 그런 일방적인 시나리오와는 무관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의 이런 변화를 '성장'이라 말한다면 좀 무례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성장'이라는 것은 어쨌든 무언가가 '자라서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고단한 과거로 인해 가치관을 바꾼 것은 분명 커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을 왜곡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성장'이라고 까지 태그를 달아버리는 일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이 찰리의 이야기를 '성장'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좀 의아한 일이다. 뭐 물론 창조자가 그렇다면 그런것이니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길 마음은 없지만, 이쯤 되면 이것이 찰리의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 '노화 드라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찰리의 시간이 흐른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리틀 드러머 걸 (The Little Drummer Girl, 2019)

연출 박찬욱

출연 플로렌스 퓨,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 마이클 섀넌


리틀 드러머 걸 (The Little Drummer Girl, 2019) 출처 : 왓챠 플레이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의 작품

열정적인 이상주의자이자 영리한 배우 찰리.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빠져든 그녀는 거대한 비밀작전에 휘말리고, 현실이라는 연극 속에서 일생일대의 배역을 맡게 된다.

출처 : 왓챠 플레이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The Little Drummer Girl, 2019) 디렉터스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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