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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Jan 22. 2020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어떻게 될지

구약 에스더를 읽고 나서 든 생각

어젯밤 에스더를 읽었다. 

구약성경 에스더는 흥미진진한 역사 소설 같아서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서양사에도 나오는 이른바 ‘바벨론 유수’ 시대를 배경으로 왕후가 된 에스더Esther가 대적의 음모로 멸망하게 된 도성의 유대 민족을 극적으로 구해내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이 이야기의 가장 유명한 구절은, ‘왕의 부름 없이 왕에게 나아가는 모든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명령을 어기고 자기 민족을 살리기 위한 굳은 의지로 왕 앞에 선다는 에스더의 결심 ‘죽으면 죽으리이다’이다.

죽음을 무릅쓴 에스더의 위대한 결심과 실행으로 인해 멸망 직전의 유대인들에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그런데 실은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 앞부분을 보면 에스더의 사촌오라비 모르드개가 사자를 통해 왕후에게 이렇게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위급한 때에 너 혼자 왕궁에서 죽음을 피하리라 생각하지 말아라. 만일 네가 두려워서 입을 닫고 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민족은 어떤 방법으로든 놓임과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네 아비의 집은 이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모르드개는 ‘꼼짝없이 죽게 된 우리가 믿을 구석이라고는 왕후의 자리에 오른 너밖에 없으니 제발 왕에게 잘 말해서 우리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왕의 총애 받는 왕후가 된 사촌여동생에게 전하는 모르드개의 충고와 권면은 실로 담대하다. 설령 왕후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당장의 안위를 택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즉 유대 민족은 어떠한 경우라도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신뢰를 전제한 뒤, 이어지는 메시지를 통해 망설이던 에스더의 마음을 움직인다. 네가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이때를 위한 섭리인지 누가 어떻게 알겠느냐 하는 말이다. 당연히 의문이나 의심의 말이 아니다. 바로 이때를 위해 마련된 신묘막측한 주권자의 섭리일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전언이다.


이 구절을 곱씹어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요즘 일상 전반에 대입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버린 결과가 이것을 위함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속상해하고 원망하는 대신 이 상황은 무엇을 위함일까 곰곰 생각해 보는 일.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무시로 절망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라도 담대히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당장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지금의 실패와 아픔이, 어려움이, 고난이 이것을 위함인지 과연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접신接神이 필요하지 않다. 절대자로부터 영감을 부여 받아 초월적 능력을 행하는 일이란 보통 사람에게 허락된 일이 결코 아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요구한 것은 유대 민족들이 사흘 밤낮 금식을 행해달라는 것이었다. 겸손하고 경건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 마음을 오로지하여 낮추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이후에 담대히 행동으로 옮길 때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가.


침착하자. 기다리자. 관찰하자. 생각하자. 시도하자. 꾸준하자. 그리하여 언제든 준비되어 있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성급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어떻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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