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섭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래서 오늘 섭리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섭리(攝理)는 몰아잡을섭, 이치리 자를 쓴다. 영어로는 프라비던스(Providence)로 번역된다.
사전 뜻풀이에 의하면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의 원리와 법칙'을 뜻한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전지전능한 신이 세계의 생기사건들을 관장하는(Vorsehen) 것,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내 이름이기도 하다. 섭(燮, Sup) 리(李, Lee). ^^
모든 것, 그러니까 내게 일어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흐름과 사건들, 현상들, 일의 과정과 결과들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나의 존재와 내게 주어진 것,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
언젠가 예준이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기 23:13)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내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고 원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거면 안 들어주시는 거야?"
그때 나는 즉답을 못했던 것 같다.
아니, 대답을 했으나 내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못해준 것 같다.
"글쎄,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여야 하겠지?" 라는 정도의 말.
힘들어하고 있던 딸에게 그 말은 아무런 도움이나 위로가 못되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나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래.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 섭리에 의한 것이야'라고 생각하는 건, 긍정일까 체념일까?
그래서 한동안은 기도를 할 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차마 못하기도 했다.
거머리의 두 딸처럼 다고다고 하는 것이 염치없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보다는 내가 달라고 매달렸는데 안 주시면 그 실망과 좌절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미리 해두는 소심한 방어막 같은 것이라고 할까.
하나님 뜻이면 이루소서. 합당하시면 주옵소서.
모든 것이 섭리다,라고 인정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내 책임이 면해지는 기분. 벗어나는 느낌.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벼움 같은 것.
그래서 섭리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섭리를 미리 알 수는 없다. 알면 그건 섭리가 아닐 것이다.
교묘하시고 세밀하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예고편을 계속 보여주시면서 우리 생을 관장하실 리는 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진행될지 일의 결과가 무엇일지 모르는 건 내게 불행인가? 복인가?
그때 딸과 나눈 대화는 이랬다.
"예준아, 이 모퉁이를 돌면 어떤 풍경이 나올지 미리 아는 게 좋을까, 모르는 게 좋을까?"
예준이는 바로 대답을 안했던 것 같다.
다음 장면이 무엇일지 아는 것은 안심이다.
물론 나쁜 게 아니라는 전제에서다. 이긴 축구경기를 재방송으로 보는 것과 같다.
마음 놓고 관람하면 된다. 결과를 아니까.
재방송에 간절함은 필요없다. 경기는 이미 끝났고 변개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우리 인생은 재방송이 아니다.
삶(Life)은 라이브(Live)이고, 라이브가 삶이다.
생방송이다. 언제나 여전히 진행 중이고 다음 슬라이드의 내용을 알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이고 섭리이다.
나는 바라는 것을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묵묵히 멈추지 않고 내 앞의 길을 걸어가면서 다음 모퉁이를 도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진실로 그러하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그것이 맞는 것이다.
일의 결과를 미리 알고자 애쓸 필요 없다.
뜻대로 안 풀린다고 전전긍긍, 좌불안석, 자포자기할 일이 아니다.
섭리. 그분을 앙망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걸어가는 것이다.
막연한 기대나 헛된 소망이 아니다. 의지할 대상이 있고 가야할 목적지가 분명하고 동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안다면 일희일비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것이 은혜이고 은혜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