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페세 Mar 23. 2023

집밥의 가격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값으로 매긴다면

오래전 누가 내 얼굴을 보고 글을 잘 쓰게 생겼다고 했다. 굴욕감을 느꼈다. 

글 쓰는 사람의 스테레오 타입이란 게 뭔지 모르게 슬쩍 와닿았기 때문이랄까. 

잠시 울컥했다. 제길. 이건 아닌데..


뭘 잘 하게 생긴 사람이 따로 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홍여림 작가는 적어도 요리를 잘 하게 생기진 않았다. 

총명하고 센스 있고 어여쁘고 예의 바른 그를 개인적으로 안 지 비교적 오래됐지만 

그래서 자주 또는 가끔 보여주는 반전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하지만, 요리까지 잘 할 줄은 몰랐다. 


그의 인스타 공식 보도에 따르면, 

자신이 '애기씨' 또는 '똥강아지'라 부르는 

(하지만 일종의 숭배대상 같기도 한) 

딸 아나를 위해 '행랑어멈'을 자처하며 매일매일 요리를 배우고 밥을 짓는다 했다.


책에도 소개된 인스타 포스팅에 이런 문장이 있다. 


"성가시고 쓸데없는 참견 없어 좋고, 

시샘과 방해 없이 오롯이 혼자인 시간이 고요하며, 

스리슬쩍 요행을 바라는 수작들이 껴들 수 없는 과정들이 무척 평화롭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왜 요리를 하는지 짐작이 된다. 

음식도 그릇도 예뻐서 사진만 보면 어디 미슐랭 스타 요리 같은데, 

실상은 집에서 시도할 수 있는 집밥들이다. 

(그래서 주류나 음식 포스팅에 하트를 잘 안 누르는 나는 그의 요리 포스팅을 좋아라 탐독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글 잘 쓰게 생긴 나는 실상, 요리도 꽤 한다. 

수험생 딸아이 야식 조공으로 단련된 몇 가지는 수준급으로 할 수 있다. 

비록 글만 잘 쓰게 생겼지만 요리를 더 잘하는 나는 

요리라고는 전혀 못하게 생긴 홍여림의 인스타 메뉴를 몇 가지쯤 따라해보기도 했다. 

지난 연말엔 딸아이와 무려 뱅쇼도 만들어봤다. 

만만히 보고 시작했다간 "쌍욕을 하게 된다"던 밤조림 말고 간단한 솥밥이나 가지조림 같은 메뉴.


어느 여름, 저자와 사적으로 만나 '예의는 지능의 문제'라는 화두로 신나게 공감하며 수다를 떤 적 있는데, 

연관을 따지자면 요리는, 아니 집밥은 정서와 관련 있다. 

사랑이나 관심, 공감능력 같은 것들. 

우리 엄마들이 그랬듯 집밥은 어쨌거나 고단한 거니까, 

고단을 이겨낼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게 집밥이다. 


물론 지능도 좋아야 한다. 

있는 재료를 가지고 맛을 조합하고 풍미를 창조해내는 일이란 

센스 이상의 지능이 필요한 분야가 틀림 없다.


험악했던 2020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모바일 교보 주문은 홍여림의 <고단해도 집밥>이었다. 

신년 첫 독서로 한 번에 읽고는 책장 아닌 식탁에 올려두었다. 

메뉴 말고도 중간중간 들어간 살림이며 주방도구 에세이가 맛있게 읽힌다. 


그는 어쩌면 밥하기보다 글쓰기를 더 잘 하는지도 모르겠다. 

글도 못 쓰고 요리도 전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책까지 쓴 걸 보면, 

사람 보는 내 눈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긴 하다.


그새 4쇄를 찍었다니까 곧 후속이 나올 텐데, 

2편은 냉장고에 재료 따위 없어도 만드는 '뭐없어도 집밥'으로 해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가지를 좋아하니, '가지로 만드는 백가지 요리' 같은 것도 괜찮겠고.


요리를 취미로 하지 않아도, 재미 있게 한방에 쭉 읽을 수 있는 책.

당신께도 후련한 일독을 권해 드린다.


#고단해도집밥 #홍여림 #yeolimh #백쇄고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