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하는 사과

먹는 사과보다 하는 사과가 인생에 백번 유익하다

by 수페세

먹는 사과는 다 좋아하지만 하는 사과를 모두 좋아하긴 어렵다. 그래도, 좋아하긴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 한다.

인생에 먹는 사과는 없어도 되지만 하는 사과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사과는 관계를 결정한다. 사과는 상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과는 하더라도 잘 해야 한다. 요즘 듣는 사과는 전부 독사과인 것 같다. 저 유명한 개사과부터 누구는 숱하게 들었다는 일본사과가 그렇고 '그래, 잘못했다 치고' 식의 적반하장 사과도 그러하다. 내 실수다, 고치겠다, 심려 끼쳐 송구하다. 이런 말이 그리 어려운가. 실수는 안 하면 좋지만, 실수에 대한 인정과 사과는 오히려 관계를 반전하기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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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와 잘못에 사과를 왜 안 할까? 내 보기에 네 가지 정도 이유가 있다. 첫째, 의도한 행동이라 안 한다.작정하고 그랬으니 저항에 부딪쳐도 잘못이나 실수로 인정이 안 된다. 둘째, 상대를 얕보기 때문에 안 한다. 자신이 우위에 있으니 만만한 상대에게 도발을 쉽게 감행하고 심지어 짓밟아도 되는 줄 안다. 그래서 툭하면 너 몇 살이야?가 튀어나온다. 셋째, 머리가 나빠서 사과를 안 한다. 뭐가 잘못인 줄 아예 모른다. 넷째, 열등감 때문에 사과를 안 한다. 잘못을 인정하면 진다고 생각한다. 우기면 우길수록 더 큰 손해가 발생해도 알량한 존심마저 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착각한다. 전형적인 콤플렉스, 열등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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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본 일이다. 지하철로 퇴근하던 중 어느 역에서 어떤 남자가 탔는데 내 옆으로 오더니 가방을 내려놓으며 내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의 다리를 툭 쳤다. 여자가 다리를 꼬긴 했지만 전철이 크게 붐빈 것도 앞으로 발을 내민 것도 아니어서 바로 앞에 서 있던 나도 불편을 못 느끼던 상황. 남자는 굳이 가방을 앞쪽으로 밀며 여자의 다리를 친 거였다. 놀란 여자는 남자를 쳐다봤지만 이내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남자는 들으란 듯 '에혀'라면서 한숨을 쉬었는데, 다음 정거장쯤서 가방을 여자쪽으로 발로 더 밀었다. 가방에 또 한번 다리가 부딪친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다리를 한쪽으로 비켰다. 다음역에서 문제가 터졌다. 남자가 여자 정강이를 발로 툭 찬 것이다. 그랬더니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아저씨, 왜 남의 다리를 차요? 그러자 남자, 니가 다리를 똑바로 하고 있었어야지,라며 맞받았다. 제가 아저씨한테 무슨 피해를 줬는데요? 그리고 말로 하면 되잖아요. 라고 여자가 소리쳤다. 당연히 전철 안 모든 사람들 이목이 집중됐다. 남자는 분위기 파악이 되는지, 이런 싸가지 없이. 라고 웅얼거리며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여자는, 싸가지는 니가 더 없네. 얻다 대고 반말이야. 너 나 알아?라고 더 힘차게 소리쳤다. 할 말이 없어진 남자는 에이, 하더니 입을 닫고 시선을 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과는? 뻔하지. 남자 망신.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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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사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호가 증진된다. 발끈한 여자가 일어나며 실수로 내 팔을 쳤다. 순간 여자는 앗,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남자가 밉살맞던 나는, 괜찮아요,라고 즉시 양해했다. 그리고 속으로 여자를 응원하며 잘한다 잘해, 연신 고소해했다. 한편이 된 것이다. 사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가방으로 다리를 쳤으면, 아이쿠 죄송. 해야 하고 상대는, 괜찮아, 해야 한다. 불편한데 다리 좀 풀어주세요, 하면 네, 하고 풀면 된다. 이것이 정상적 인간들의 정상적 소통 방식이다. 문제는 남자가 처음부터 다리꼰 여자가 아니꼬와 일부러 가방으로 친 게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사과는 없다. 첫 번째 이유다. 의도적 도발. 게다가 상대는 만만히 보이는 작고 젊은 여성. 두 번째 사과 안 할 상황이다. 세 번째 네 번째는 단정할 수 없지만 틀림 없다. 머리 나쁘고 열등감에 쩔어 산다. 망신 당했고 등 뒤에 멸시 가득한 시선이 꽂힌 채 그는 하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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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숱하게 하고 수시로 잘못할 수 있다. 인간이니까. 그러니 인정하고 사과하자. 뭐가 죽고 살 일이라고 인간됨을 버리냐. 최근에 내가 만난 가장 비루한 남자의 찌질한 뒤통수를 보며 든 생각. 짐승처럼 되진 말자.


이것도 사과라면 사과.


이런 쪼잔한 사과보다 기왕이면 통큰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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