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쓰지요, 나를.

왜 쓰냐는 질문 그리고 글감

by 수필버거

글 쓰는 사람을 굳이 갈래 짓자면,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시작한 사람과 써야 할 말이 차고 넘쳐서 펜을 든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다. 나는 전자의 인간이다.


브런치 작가 초기에 나는 왜 쓰는가, 왜 쓰고 싶은가를 정리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이 쓰고 싶었고 기왕이면 브런치 작가가 되면 폼도 나고 동기부여도 될 것 같아서 몇 번을 떨어지고도 기어이 통과한 직후였다. 느닷없이 쓰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쓰지 않으면 속에서 곪아 문드러질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거 아니면 죽는 일도 아닌데도, 브런치 작가의 문을 몇 달 동안 (나로서는) 끈기 있게 두드렸다. 제법 욕구가 강했구나 싶다.


한 번에 척 붙지 못한 반발심이었을까, 출간 작가란 가당찮은 꿈도 꿨고, 은퇴 후엔 글로 밥벌이를 하는 희망도 가졌다. 작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니, 왜 쓰고 싶은지를 그럴듯하게 정리해놓으면 오랫동안 쓰는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되는 게 맞지 싶은데, 나는 '왜'를 아는 것이 동력을 찾는 일이라 여겼다.


책 ‘글쓰기의 쓸모’(손현 저)에 나오는 인터뷰에서 인용한다. 인터뷰이 고수리 작가는 방송작가이자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에세이스트이며 인기 브런치 작가다.


고수리 작가 : “유년의 기억, 사무친 순간, 꿈의 기록, 살아있는 말. 네 가지는 제가 그동안 글을 써오면서 필요했던 글감이에요.”

< 글쓰기의 쓸모, 손현 지음 > 중에서



그녀가 꼽은 글감 네 가지를 가지런히 마음에 앉혔다. 고수리의 글감을 달리 표현하면, 뿌리, 코너스톤, 미래 그리고 현재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언급한 네 가지 글감이 세상 모든 글의 뿌리 같다. 글 쓰는 이들을 두 개로 나눈 내 분류에 대입한다면 그녀의 글쓰기의 시작은 어느 쪽일까 궁금했다. 써야만 하는 것들이 그녀로 하여금 노트북을 열게 한 걸까? 막연히 쓰고 싶어 시작했는데, 긴 시간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느낀 것을 간결하게 글로 정리한 걸까? 내게 고수리 작가는 써야 할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를 작가로 이끈 것처럼 보인다. 뭐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고 작가의 분류에 따라 내 글감을 생각했다. 내게 묻는다면, 몇 가지로 나누기가 어렵다고 답하겠다. 구분보단 층위가 있다고 할까. 그 위에, 그 아래에 무엇들이 덮여 있고 깔려 있다. 결국은 한 덩어리.


브런치를 시작하고부터 지금까지는 당장 쓰고 싶은 것을 썼다. 생각이 흐르다 문득 어딘가에 부딪히고 고이면, 그것을 담아 올려 썼다. 그중에서도 적당히 포장하기 쉬운 것들을 주로 썼다. 고수리 작가의 분류에 대입하면, 살아있는 말에 해당하지 싶다. 읽기에 가벼운, 쓰기가 쉬운 것. 오늘의 나를 스케치하는 느낌의 글들.


그 아래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해서 시작하지 못한 글감이 있다. 되돌아가라면 차라리 죽을래요 할 것 같은 시기의 이야기. 가끔 언급은 하지만 아직 글로 내보일 단계는 아니다 싶은 것이 있다. 쓸 시기가 머지않은 느낌은 든다. 고수리의 네 가지 중 사무친 순간에 해당하겠다. 나라는 인간이 크게 바뀐 시절. 지금은 객관적으로 그 기간을 볼 수는 있다. 어떻게 해석할까, 어떤 무드로 써야 할지가 아직은 명확하지 않아서 미룬다. 조금 더 숙성시킬 요량이다.


다시 또 한 꺼풀 아래엔, 나라는 인간의 결정적 시기를 관찰하고 재해석하여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사람의 '결정적 시기'는 유년기와 아동기 무렵이다. 중년이 된 현재까지 지니고 있는 내 고유의 태도와 프레임의 빵틀이 만들어진 시기. 필연적으로 부모, 가족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써야겠고, 그래서 망설인다. 자신이 없다가 맞을지도 모른다. 좀 더 살아야 쓰지 싶다. 고수리 분류법으론 유년의 기억에 해당하지만, 내겐 어쩌면 또 다른 사무친 순간일지도 몰라서.


이 모든 것을 감싸는 보자기는 아이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고, '왜 쓰냐'는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나에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기억은 너무 단편적이고 파편적이다. 내 기억에 직접 새겨진 당신의 말도 없다. 전해 들은 아버지의 말뿐. 너무 일찍 떠난 사람.

나는 많이 우회하며 산 사람이다. 쉬운, 쉬울 길을 빙빙 돌고 돌아 겨우 어딘가에 다다르는 사람. 아버지의 부재만으로 내 삶의 우회(迂廻)를 설명하진 못하겠지만, 뿌리깊은 이유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있다. 내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품지 않고 살길 바란다. 그래서 내 모든 글의 일차 타깃 독자는 내 아들 셋이다. 언젠가는 읽기를, 살면서, 늙으면서 다시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다. 직접 당부하는 글도 언젠가 쓸지 모르지만, 여기저기 흘려놓은 잡다한 내 글에서 아빠란 사람을 읽기를 바라고, 행간에서 나를 이해하고, 나를 사랑하길 바란다. 알면 사랑한다지 않은가. 나중에, 나 죽은 뒤에라도 늦지 않다. 어쩌면, 나 없는 그때가 나을지도.


글감이란 결국 자신의 이야기다. 어떤 연유로 시작하건 쓸 사람은 쓰게 된다.

글쓰기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다. 자신의 인생을 쓰면 대하소설이 나올 거라고 믿는 부류와 이런 평범하고 하찮은 인생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냐는 부류.


모두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진 않는다. 보통의 우리가 겪는 일들은 대개 평범하고, 살아내는 일상은 단조롭다. 평이한 삶도 오래 사색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을, 감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해 보이는 인생에서도 자신만의 철학이 움을 튀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