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크론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스토리는 어려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이 그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 < 시작은 가볍게, 드라마 한 편 써볼까 5화, 이기원 > 중에서
괜히 겪는 일 없고, 괜한 인생 없다는 말은 내가 자주 쓰는 말이다. 브런치 글에도 한두 번 썼다. 새옹지마의 의미도 있고 점이 선이 되고 면이 된다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혹은, 이야기의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나랜스와 연결 지을 수도 있다. 살면서 겪는 별 연관 없어 보이는 일들, 당시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일, 아프고 슬픈 일까지도 모으고 엮어서 인과의 ‘이야기'를 만들어 기억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그 스토리가 쌓여서 한 개체의 서사, 인생이 된다.
마음이 감옥 같을 때가 있다. 마음이 꽁꽁 묶이면 회피하거나 도망갈 수가 없다. 걱정, 후회, 불안, 분노, 미움 같은 것들에 사로잡히면 옴짝달싹 못한다. 무거운 몸을 바닷가로 옮겨 봐도, 산으로, 하와이 해변으로 도망쳐 봐도 기분이 환기되는 느낌은 잠시 뿐, 걱정과 불안은 그냥 머릿속에 딱 들러붙어있는 것이어서 마음은 금세 다글거린다. 코로나 첫해엔 그나마 곧 끝나겠지 하는 기대라도 있었는데, 두해 째엔 탈출 불가의 알카트라즈 섬에 갇힌 것처럼 마음이 시들고 있었다.
꿈에서조차 호랑이처럼 누르는 걱정과 불안을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몰입할 대상이 필요했다. 남의 이야기, 남이 쓴 스토리가 피신처가 될 수 있겠다. 피할 수 없는 호랑이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 책을 들었다. 난독증인가? 눈은 분명 글자를 쫓고 있는데, 글은 사오정 입에서 튀어나온 나비 떼처럼 자음과 모음으로 분해되어 날아다니기만 했다. 집중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짧아졌다. 1년간 읽은 건 짧은 에세이와 뉴스뿐이다. 홀짝거리는 술만 늘었다. 위험하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작년부터 올봄까지 본 영화, 드라마는 거의 전쟁물이다. 책을 읽을 수 없으니 드라마로 피신하는 게 그나마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OTT를 두 군데 가입하고 이것저것 시도했으나 채 10분을 못 넘기고 끄길 반복했다. 다 부질없어 보였고, 쓸모없어 보였다. 영화도 그랬다.
우연히 본 씰팀의 첫 에피소드는 마의 10분을 넘길 수 있었다. 미 해군 특수부대 데브그루의 이야기를 다룬 CBS 드라마를 시즌1부터 5까지 봤다. 그리고 HBO의 전설적인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퍼시픽을 다시 봤다. 사람이 겪는 일 중에 최악이 전쟁이다. 지옥.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평화 시기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왜 전쟁물이 눈에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은 타인의 큰 불행으로 나의 작은 불행을 극복하기도 한다.
드라마를 다음 시즌으로 계속 끌고 가야 하니까 주연과 주요 조연은 죽을 일이 없다. '우리 편'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화면에선 피와 살이 튀지만, 객석은 안전해서 또 좋았다. 씰팀이 각 시즌별로 16개 정도의 에피소드가 있으니 합해서 80부작 정도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10부작, 퍼시픽이 10부작이다. 1년 동안 거의 100여 편을 봤다.
지난 2년은, 현실도 전쟁 같았다. 그것도 적을 말려 죽이는 포위전, 소모전처럼 느껴졌다. 내가 주도적으로, 적극적으로 해 볼 수 있는 짓은 다 해봤지만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었다. 무력감. 가라앉는 배 돛대에 속수무책으로 묶여 있는 느낌.
지금이 아무리 혹독해도 실제 전장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위안, 주인공이 죽지 않는 것처럼 나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필요했나 보다. 암담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참담한 전쟁 드라마를 진통제 삼았다. 불안한 날, 두려운 날, 한심한 날, 몸을 묶고 눈만 껌뻑이며 드라마를 먹었다.
다시 봄이 왔다. 코로나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후 맞는 세 번째 봄이다. 팬데믹은 여전하지만 통제는 조금씩 풀리고 일상의 모습은 점차 예전을 회복하고 있었다. 전염병의 종식은 아니더라도 통제 가능 범주로 들어오는 느낌. 술집과 밥집은 두 해전처럼 다시 바글대는데, 회사 매출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설상가상, 치솟은 물가로 납품 단가를 올리지 않으면 팔수록 손해를 걱정하는 상황까지 직면했다. 공장 문 닫을 각오로 인상 요청을 했고 두 달 가까이 협상은 지지부진. 각오가 현실이 돼가는 모양새였다. 화살은 내 손을 떠났다. 에라. 모르겠다.
사입도 납품도 멈추니 시간은 많다. 뉴스를 보다가 어게인 마이 라이프란 드라마 소식을 접했다. 웹툰 원작. 시놉시스에 마음이 끌렸다. 드라마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억울하게 살해당하지만 타임 슬립으로 환생을 한 후, 인생 2회 차의 주인공 김희우 검사(이준기 분)는 그야말로 승승장구다. 어릴 적 환호했던 고행석의 만화 주인공 구영탄과 일본 애니메이션 원펀맨의 사이타마를 합쳐놓은 것 같다. 주먹과 머리, 외모와 인성까지 다 갖춘 주인공. 이런, 완벽한 인간 같으니라고. 끝나는 게 아쉬웠다. 비슷한 게 뭐 없나 찾던 차에 범죄도시 2가 개봉했고, 당장 가서 봤다. 주인공 마석도 형사(마동석 문)의 안위보다 빌런 목숨 걱정이 앞서는 영화는 통쾌했다. 선악 구별, 적과 아군의 구분이 현실에서도 저렇게 명확하면 얼마나 좋을까.
창업할 때 꿈꿨던 내 모습이 이준기였고 마동석이었다. 손대는 일마다 잘 풀리고, 위기의 순간마다 귀인이 길을 터주는 인생을 꿈꿨다. 거칠 것도, 거리낄 것도 없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모습을 그렸었다. 실제 10년 정도는 비슷하게 흘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기억의 왜곡인가? 암튼.
그깟(?) 단가 인상에 목매고 있는 지금 내 처지가, 그게 안되면 긴 세월 해왔던 업을 접을 각오까지 하는 내 상황이 답답했다. 내 인생이 좀 저러면 안 되나란 원망 같은 생각을 물고 이준기와 마동석에 몰입했다. 대리만족. 드라마가 끝나면 허무했다. 외면, 회피, 도망.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패기, 그 열정, 그 자신감은 아마도 시간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젊음의 가장 큰 무기는 시간이니까. 이 나이에, 다시 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시간 요소만 빼고 그 시절의 나를 곱씹었다.
거래처 물류센터는 결품이 나면 안된다. 최소량의 납품은 재개했다. 잠시 바쁘고 자주 한가한 차에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쓴 박해영 작가의 신작 소식을 들었다. 방영이 거의 끝나고 있었고 종영까지 2회 정도 남았을 무렵 보기 시작했다. 마동석과 이준기의 환상에서 끌려 나와 서글픈 지금의 내가 애면글면하게 사는 현실로 멱살 잡혀 왔다. 그렇지, 나는 저렇게 살고 있지. 하루하루 조금이나마 나아지려고 애쓰고 실망하고 견디고 버티고.
드라마가 끝난 후 나의 해방을 생각했다.
나의 해방 일지 마지막 회.
알코올 중독인 구 씨(손석구 분)는 습관적으로 편의점에서 술을 사고 나오는 길에 동전 하나를 흘린다. 대굴대굴 구르던 500원짜리 동전은 하수구 뚜껑에 떨어질 듯 말 듯 걸린다.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고액의 자기 앞 수표도 아니고, 오만 원짜리 지폐도 아니다. 그냥 오백 원. 버리긴 아깝고 줍자니 귀찮은 동전 하나. 아슬아슬하게 걸린 동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어 집어 든 구 씨. 잠시 생각을 하다가 샀던 술을 노숙인에게 줘버리고 염미정(김지원 분)에게로 달리기 시작한다. 동전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구 씨 자신이자, 새로운 시작의 희망이다. 이제 그의 해방이며 염미정의 해방이 시작된다. 그들의 엔딩이 해피인지 세드인지 알 수 없다. 앞날의 행복도 장담할 수 없다. 원래 해방이란 그런 것인 양. 또 다른 출발선은 연약한 희망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단가 인상 요청을 한지 두 달을 거의 채울 무렵, 조건부로 수용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상분 반영을 2회로 나누고 4분기 전까지 매듭을 짓자는 조건이다. 서로, 구관이 명관인 건가. 거래를 그만 둘 각오와 그 이후에 대한 고민도 했지만 계속하는 편이 당연히 낫다. 사업 모델 전환, 피보팅(pivoting)은 시간이 걸리고 리스크도 크니까. 애간장을 내주고 시간을 벌었다.
하수구 뚜껑에 걸린 나의 오백 원을 주워 들고 연초에 만든 금년 계획을 되짚었다. 세 번의 고비를 예상했었다. 첫 번째가 단가 인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 연준의 이자 인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예상보다 진통이 커졌지만 무사히 넘을 모양이다. 이제 다음 고비를 생각한다. 신제품 출시를 위한 파트너 업체 설득이 남았다.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오백 원의 촉감을 손으로 느끼며 전화기를 들고 긴 통화를 두어 차례 했다. 해당 업체 사장님과는 형, 동생 하며 이십 년 가까이 본 사이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쓰는 단어, 웃음소리에서 긍정의 신호를 감지했다. 소요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질 것도 동시에 예감했다. 그런들 어떠랴. 방향이 중요한걸.
씰팀으로 전쟁 같은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되새기며 긴 시간을 견뎠다. 어게인 마이 라이프, 범죄도시 2에서 내 젊은 날의 패기와 태도를 기억했다. 나의 해방 일지로 남루한 현실을 자각하면서도 작은 희망을 떠올렸다. 그들의 스토리로 견디고, 상기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 코로나 시절도 괜히 시간만 낭비한 시기로만 남진 않을 게다. 훗날, 그 암담했던 2년에서도 의미를 찾고, 부여할 것이다. 그게 사람이니까.
나의 오백 원을 고이 주머니에 넣고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맨다.
나의 스토리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어게인 마이 라이프!
#씰팀 #어게인마이라이프 #나의해방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