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pm

축적의 힘

by 수필버거

쉰을 목전에 뒀을 때 초조를 느꼈고 지금도 그렇다. 해내야 할 일, 닿아야 할 곳은 많은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

내게, 환갑은 어떤 경계선이다. 그전에 이룰 건 이루고 오를 덴 올라야 한다는 강박. 조급일까. 어쩌랴. 그리 느끼는걸. 그 나이가 돼도 삶은 여전하겠지만,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은 마음이 급하다.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매해 6월, 7월이 되면 중간 점검 같은 걸 한다. 의식적이지는 않다. 올해는 계획대로, 생각대로 잘하고 있나를 살핀다. 초조가 낳은 불안이 깔려있다.


회사 뒤뜰은 좁다. 방치된 작은 텃밭이 있고 낡은 탁자와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있다.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개비 그리고 멍 때림의 공간이다. 멀리 앞산이 두어 뼘 보이고, 담장 너머로 좁은 하늘이 보인다. 지금의 내게 남겨진 입지처럼 좁다. 하늘도 땅도.


흐린 일요일 오후. 뒤뜰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벌써 이렇게 어둑할 시간인가, 시계를 봤다. 3시 4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커피 믹스로 만든 냉커피에 형체만 겨우 알아볼 만큼 남은 얼음을 잠시 바라봤다. 이 얼음은 곧 사라질 게다. 짧은 한숨이 나왔다. 세 개비 째의 담배를 꺼내다가 다시 넣었다. 느긋해도 되는 휴일인데 느긋이 느슨같다. 일을 하다 숨을 돌리는 공간에서 까닭 없이 숨이 막혔다.


늦은 오후가 내 나이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낮의 활력은 사라지고 길어진 그림자가 쓸쓸해 보인다. 뭘 새로 시작하기엔 늦은 시간, 하던 일이라도 잘 마무리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마음만 급해 허둥대는 시간. 곧 해가 질 텐데.


바람이라도 쐴까. 바쁠 것도 없지만 늦은 오후가 주는 느낌에 내몰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냥이 밥과 물을 채우고 시동을 걸었다. 딱히 갈 곳은 없다. 아, 밥도 안 먹었구나. 연신 마신 커피로 공복을 못 느끼고 있었다. 자각하니 갑자기 시장하다. 좀 멀지만, 현풍 가는 길에 있는 국밥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편도 사십여 분 거리다.

음악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앞산 터널을 지나 고속도로 같은 산업도로로 접어들었다. 하우스 뮤직 비트의 꿍꿍하는 진동으로 잡념을 덮으며 한참 달리니 숨이 좀 쉬어진다.


식당으로 가려면 산업도로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네비가 알린다. 무시한다. 친절한 여자 목소리는 램프가 나올 때마다 우로 빠져나가라고 성화다. 계속 무시.

산업단지가 나오네. 여긴 처음이구나. 올 일이 없는 동네다. 공단을 지나니 2차선 좁은 국도. 깨끗하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맞구나,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왼쪽으로는 강이 보인다. 낙동강일까, 금호강일까. 모르겠다. 논밭이 이어진다. 바이크 라이더들이 보인다. 남녀 한쌍, 네댓 명의 무리. 다음 주말쯤 자전거를 타고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창을 열고 심호흡을 했다.


작년과 재작년의 7월은 한심했다. 뭘 했다고 벌써 7월이야, 했다. 뒷걸음친 느낌. 잘 봐줘도 제자리걸음. 속절없이 한 해의 반을 날린 느낌에 맥이 빠졌었다. 올 6월엔 일은 조금 하고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를 열심히 봤다. 바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작년처럼 공허한 느낌이 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웬걸. 살짝 뿌듯했다. 허무하지 않아서 외려 당황스럽다. 왜지? 뭘 했다고? 일에서 큰 고비 하나를 넘어서일까. 아닌데. 아직 넘고 있는 중인데. 넘어도 또 넘어야 할 산이 남았는데.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은 쌓인 방학 숙제처럼 찜찜하다.



는 고픈데,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숟가락으로 국밥을 입에 퍼 넣는 게 내키지 않았다. 국도변 작은 슈퍼에 차를 세웠다. 커피 한 캔을 사들고 간이 의자에 앉았다.


폰에 브런치 알림이 떠있다. ㅇㅇㅇㅇ님이 내 브런치를 구독합니다. 브런치에 들어갔다. 글 107이 보인다. 작년 12월에 50개였고 그 오십 개도 3년 동안 쓴 글 개수였는데. 12월엔 구독자도 30여 명이었다. 이제 74명이 됐다. 브런치도 여타 SNS처럼 맞팔 개념이 스민 듯하다. 나는 정말 그 작가의 글이 좋고 다음 글이 기대돼서 구독을 누르는데, 내가 구독하면 고맙다고 내 것도 눌러주는 것 같다. 그래도, 관심주는 이들이 는 건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고맙다. 노력에 비해 받은 보상이 크다.


내 글의 제목을 훑었다. 제목만 읽어도 내용은 안다. 어디서 썼는지도 거의 기억하고 무슨 마음으로 썼는지, 어떤 기분으로 썼는지도 기억한다.

뿌듯의 원인을 찾았다. 셀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글이 쌓여있었다. 마일스톤처럼.


매일 출근을 하면 어제와 비슷한 일을 한다. 작은 제조업체의 일이 그렇다. 이렇게 산 지가 꽤 오래됐다. 공장이 돌아가는 모습만 봐선 몇 년도인지 구분할 수 없다. 2010년이라 해도, 2020년이라 해도 믿을 만큼 큰 변화가 없다. 매해 비슷한 모습으로 사계절을 보낸다. 옷차림으로 계절 구별이 겨우 되는 정도.

돈을 벌어도 까먹어도 장부의 일이고 숫자의 일이다. 눈에 띄는, 뇌리에 꽂힐만한 일은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큰 변화가 없는 일상. 획기적인 사건이 없으니 기억에 남는 것도 적다. 몇 달이 한 덩어리로 기억에 저장되니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표식이 없다. 뭉뚱 거려 진 세월.


딱히 기억나는 일 없이 반복되는 하루도 글 하나를 쓰고 고치고 발행하면 뭐라도 했다는 보람 같은 게 뱃속에서 올라왔다. 여느 날과는 조금 다른 하루가 된다. 지금도 글 제목만으로 그 글을 쓴 그 하루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오십 개의 글이 1월부터 6월까지 내가 지난 길에 이정표처럼 촘촘히 서있다.


내비게이션은 껐다. 표지판을 따라가면 집이야 가겠지. 식당은 가지 않기로 했다. 달달한 모카커피로 배고픔은 지웠다. 집에 도착할 무렵 어스름 해졌다.


라면 끓일 물을 가스레인지에 얹고 읽고 있는 이연 작가의 책을 백팩에서 꺼냈다.

그리고 폰 메모장에 3:41 pm이라고 썼다.


밖은 아직 깜깜하지 않았다.








휴지통(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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