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초고, '쓰기'는 퇴고

1. 플롯과 구조

by 수필버거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필연은 없다. 필연은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다. 우리는, 우리가 지어낸 그 '이야기'를 인생이라 부른다.


북카페 대책회의를 여는 과정도 그렇다. 팔구 년 전 우연히 읽은 조선일보 주말 섹션 기사 하나가 발단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지금의 결과를 손에 쥐고 돌이키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주말 아침에 펼친 신문 문화면에 커다랗게 실린 츠타야 서점 사진이 멋있어서 눈이 머물렀고, CCC (츠타야 서점 운영사) 대표 마스다 무네아키의 인터뷰를 인상적으로 읽은 것은 그 어떤 이유도 없고 인과도 없다. 신문 보다 기사 하나를 꼼꼼히 읽는 일은 흔하다. 그러니, 그대로 잊혔다 한들,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사는 데 한 톨의 지장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자주 그 장면을 떠올리고, 어떤 운명의 계시나 된 것처럼 말하고 기억하는 것은 인간이 호모 나랜스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무작위의 사건 20%와 사건을 대하는 태도 80%로 이뤄진다고 했다. 사건은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하게 들이닥치지만 숨거나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맞닥뜨리겠다는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이 운명을 바꾼다고 여긴다. 내 결정이라고 믿는 '태도'는 DNA의 랜덤으로 타고난 성향이 좌우하고, 태어나고 보니 내 나라, 내 부모, 내 형제인 환경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다. 사람이 자의라고 믿는, 겨우 옴짝달싹할 수 있는 영역은, 머리카락 한 올처럼 매우 미세하다.


브런치스토리에 매거진 '나는 대책이 있다'를 쓰고 있다. 독서 모임을 시작하고 사람이 모이고 북카페 대책회의를 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시즌 1은 브런치북으로 묶어 발행했다. 오픈 후 자리 잡는 과정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될 근미래의 어느 날까지는 '나는 대책이 있다 시즌 2'에 계속 연재한다. 시즌 2는 책방이자 어른 문방구인 북카페가 제대로 굴러가게끔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아무래도 시간순으로 글을 싣고 있다.

'나는 대책이 있다 시즌 1'에는 열아홉 개의 글이 있고, 시즌 2에는 이제 5개의 글을 썼고 스무 개 이상 쓰지 않을까 싶다. 이것만으로도 40개에 가까운 내 삶의 편린(片鱗)들이 쌓이게 된다. 나란 사람의 보잘것없는 인생 '이야기'를 지을 벽돌이다.


훗날, 아들 삼 형제에게 남길 책으로 편집한다면, 50평 아파트에서 쫓겨 나와 작은 월세 주택으로 이사한 날부터 시작하겠다. 브런치에 차곡차곡 쟁여둔 벽돌 중에서 아이들을 생각하며 쓴 글을 골라내 보탤 것이다. 못난 아빠 원망하지 않고 잘 커준 너희 덕분에 나이 든 아빠가 이런 일도 시작할 용기를 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될 것이다.


훗날, 친구들에게 남길 유작 같은 책을 만들게 된다면(그럴 일은 없겠지만), 난생처음 겪는 찌든 가난을 들키기 싫어 모임에 빠지던 시절부터 시작하겠다. 독서와 책방 스토리는 소주 한 잔 값도 없던 나를 번갈아 찾아주던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이 잔뜩 묻은 눅진한 '이야기'로 귀결되지 싶다.


훗날,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을 출간한다면, 시간순의 지금 목차도 나쁘지 않다. 그냥저냥 살던 평범한 오십 대 사내가 늦은 꿈을 좇는 '이야기' 자체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볼리는 없겠지만, 공감하고 힘 얻을 한 줌 독자라도 얻지 않을까. 자기 계발서의 문법을 따르는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작위로 벌어지는 사건의 점을 얼기설기 이어 가느다란 선으로 살아낸 삶은 투박한 초고다. 아무도 읽지 않고 읽지 못할, 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초고.

들어주고 읽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기대를 충족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순서로 말하고 쓰겠다.


투박한 초고 같은 삶은 글로 쓸 때 비로소 이야기로 완성된다.

숙고하고, 버리고, 다듬는 퇴고의 과정과 같다.

히치콕의 말처럼 지루하고 반복되는 부분을 덜어낸 스토리, 즉 진짜 '이야기'가 된다.


독자와 청자에 따라, 작자의 목적과 시기에 따라 순서와 배치가 달라진다.

한 사람의 일생(一生)의 장면들이 플롯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야기란 원래 그런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부엌에 핀 꽃 한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