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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채워지는 문학의 속성

문학의 창작은 끝이 없는 것인가?

우리가 사는 일이라는 것이 비우고 또 채워야 하는 것이 인간사의 삶의 바퀴일 것이다.

우리는 하루만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또 채워야 하는 것이 우주 자연의 이치와 원(圓)이라는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생리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문학도 원리는 같다는 것일 것이다.


비움과 채움의 문학이라야 번갈아 교차하는 것이 인간사의 삶일 것이다.

배가 고프면 채워야 하며 그리고 다시 비워진다.


이는 곧 순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노자 4장에 보면 "도는 비어 있어 이를 써도 늘 차지 않고" 깊어서 만물의 종(宗)인 것 같다 했다. 노자의 철학은 도의 철학이라는 뜻은 익히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은 노자의 철학에 있어 근본의 불변 이치를 설파하려는 깊은 뜻이기에


자연에는 있음과 없음의 채우고 비우고의 문제의 이치가 윤회의 바퀴살을 굴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그러나 인간은 먹어야 살며 또한 배설해야 한다는 순서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일상을 비화하는 일이 삶이라 한다면 여기서 있음을 충족하는 일이 먹어 채우는 요인이 배고픔일 것이며 이 배고픔을 채우면 다시 배설의 순서가 비움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은 우리 신체조직에서도 자연의 이치와 닮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당연할 것이다.


 




인간의 이치가 자연의 이치와 상치(相馳)되면 결국 인간은 도태(淘汰)라는 운명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채움과 배설의 배고픔이라는 3단계의 법칙은 자연의 질서 개념이고 이 질서를 따르는 일은 곧 자연의 순환에 일조하는 인간의 자연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채움의 방법이고 곧 비움이 있을 때 새로운 것과 맞이 하는 일이 진행형이 되는 이유가 곧 삶의 윤택을 보좌하는 경제 논리도 이 3단계의 이치를 어떻게 원활하게 진행하는가는 곧 자연의 법칙 속에 존재의 형태를 맞춤으로 이끄는 이유가 될 것이고 심지어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은 궁극으로 3단계의 과정이 하드웨어라면 각기에 따른 소프트웨어는 분기(分岐)하면서 다양성을 재촉하게 된다는 것이 이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소프트웨어의 운용에서 지혜가 수반 된다는 것이다.

막힘이 없이 자연스러울 때 가장 지혜의 장점과 운위를 확보하게 된다는 뜻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하다고 판단될 때 그 부족한 만큼을 채우려는 판단과 넘침이 있을 때, 그 상황을 판단하는 결과에서 얼마나 비울 것인가를 아는 일은 지혜의 항목이고 판단도 결국은 지혜의 수순에 들어가는 것이 순환의 법칙이다.



그러나 예술 창작에서 더 많은 것을 창작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여기서 나의 사상(敍上)의 논리는 모순 같은 이유를 거론하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얼마나의 기준은 항상 인간의 편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인간화의 욕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제와 안으로 끌어들이는 창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에 대한 거역을 의미할 때, 재앙을 불러오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에 적정의 기준은 항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욕망이 발동되는 것이며 욕망의 검은 구름은 늘 자기를 삼키는 순서가 엄정(嚴政)하게 다가올 것이기에 여기서 채움과 배설과 비움의 단계를 알아야 한다.


 



기실 채움의 단계에서 넘치는 순환의 기능이 배설될 때, 자연스러운 비움이 다가들며 또한 반대로 비움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배설과 채움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노자 5장 중에 {비었어도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많은 창작을 합리화하는 적절한 예로 들고 싶다.


 




왜냐하면, 일반 기준에서 확실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꼭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신명(神明)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며 집중화의 광기(狂氣)라는 말로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서 "동이 유출"은 스피도로 진행하는 예술창작의 다작(多作)에의 합리로 울타리를 쳐야 한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간판의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논지를 일탈(逸脫)하는 것 같지만 여성의 음부인 곡신(谷神)의 창조에는 얼마의 기간이 무한이라는 기준에 있을 수 있지만 가령 남녀가 결혼하여 3명의 아이를 생산하는 여성과 12명을 생산하는 때도 있다면, 후자는 확실히 곡신의 왕성한 경우가 될 뿐이며 그 전 단계는 화합의 남녀가 이루는 성과라는 뜻이다.


예술가는 결국 곡신의 생산 기능과 같다는 점에서 과작과 다작의 이름을 분간하는 경우로 진행되는 것이다.


연혜(淵兮) 즉 깊다. 라는 어둠이 창조의 근본으로 이끄는 이른바 칼 융이 강조한 무의식의 깊이를 방문하면 신기한 것을 발굴하는 원천에 도달하는 재미가 있게 된다.


 




칼 융은 <잊는다>를 우리에게 있어서는 정상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역설했다.


잊음은 비우기라는 뜻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창작의 비움은 곧 채움으로 가는 일이라는 뜻을 첨가할 수 있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시를 관조하며

밖으로 내보낸 후

빈 배에 출렁이는 뱃살이


시원하여 밀물로 다가온

파문의 고요 앞에

Ego가 흔들린다.


누구를 보냈다는 이유로

망연자실의 파노라마는

또 무엇인가?


찾고 있는

흔들리는 봄바람 기다리듯

보낸 느낌의 허전도 이럴까?


여전히 정적이 쌓이는

허기가

하냥 그렇다.


<배고픔>중에서


배고픔이 채움의 전제라면 시인이나 작가는 무한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탐색의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날마다 빛나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서 부속품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열성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합리적임을 변명하는 절차라 -

이는 내 개인의 주관적인 뜻으로 돌린다면 꾸미는 말로 들릴 것이기에 조심스럽고 겸손도 모르는 것은 아닐지 -


 


 


그러나 열정과 수고스러움으로 글을 많이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며 생산적이지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위해보고는 한다. 비움의 문학이라는 창작에서 말이다.


문학을 이끌고 가는 것이 배고픔과 채움이라면 창작의 문학이란 상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종점이 없다고 했듯이 창작의 문학은 끝이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비우고 채우고 배고픔을 알아야 창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라 굳게 믿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2. 01. 28.


 


금요저널 주필/

이승섭시인


<제6집>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임인년 새해 힘찬 출발>

(이승섭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어느 카페에서 관조의 여백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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