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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와 육신의 표출]

{꿈의 이상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人間은 개인차에 따라 삶의 모양이 각각의 특성과 기질이 있다고들 한다.물론 한가지로 규격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소 어렵겠지만 성품과 체득, 체험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가치 상상의 질과 육신의 표출 소유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꿈속의 르네상스를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과 뜻을 가지고 굽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사는 사람 이상을 찾아가는 등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모양으로 살아갈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왜냐하면 꿈과 상상이란 수학으로 나타낼 수 없는 일정 값이 아니라 수시로 변한다는 점에서는 환경, 배경, 기질, 등이 가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체험(體驗)과 체득은 인간마다 갖는 범주(範疇)가 있기 마련이다. 소심한 사람은 행동에 수반하는 영역이 있고 상상의 범주도 그러한 경계로 사고를 진정시킬 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이의 상상이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꿈과 상상이 있을 것이지만 사람의 상상은 환경에 따라 자기를 연결하는 한계의 경향이 있기에

자기만큼의 상상에 이름이 탄생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덧붙여 예술(藝術)이라는 명제에 적용(適用)한다면 이런 상상은 표출은 표현하는 당사자의 作品에 무게와 연결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예술가의 작품에 기준을 준다면 평범함에 머무는 작품으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물론 예술(藝術)로 표현된, 품에는 저마다 독특한 개성이 용해(鎔解)되어 나타나는 것은 생명체(生命體)로 바라보는 관점(觀點)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얼굴이 예쁜 사람이 있고 또는 외면하는 얼굴도 있지만 모두 그 나름으로 생명의 표정(表情)이라 칭하면 이 또한 개성에 이른 말이 될 것 같다.


이는 그 얼마나 비약(飛躍)의 확장을 할 수 있는가.

또는 아닌가를 하는 이유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필자가 아는 상상은 이상이 가져오는 묘미일 것이 아닐까?이는 의식(意識)의 확장일 수도 있고 또한 의식이 무한으로 진전하는 길을 만들어 체험의 인자들이 따라오는 길을 확장한다는 뜻을 첨가(添價)하면 비약(飛躍)이 갖는 원인은 결국 예술의 표정을 더욱 신선하게 꾸미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 같다.



그러나 비약이 없는 경우엔 예술의 가치는 감소할 것이며 그만큼의 재촉이 덕목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논리의 틈은 아무런 설명 못하고 오로지 분위기(雰圍氣)라는 기분에 압도당하는 점에서 설명이 어려워진다. 또한, 얼굴 모양의 대비라거나 이쪽과 저쪽의 균형미를 이론적으로 대비할 겨를이 없지만 당도한 매혹(魅惑)에서는 아무런 설명조차 불가하다는 분위기를 맛볼 정서의 특성일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은 뒤쫓아 오면서 합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습관이라면 대부분 學文은 추상의 길을 헤매는 이유가 숨어 있을 것이기에 -


세상의 모든 존재(存在)는 이유가 있지만, 그 나름 자체로 설명(說明)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지구상에는 모두가 예술로 구성된 자연이 있고 人間도 그 일부분이기에 굳이 우열을 따지는 일은 안 될 것이지만 표현(表現) 그 자체에 상상력이 없다면 더하기를 할 수 없는 흥미가 아예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과에서는 가치(價値)의 개념(槪念)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하여 예술은 가치의 개념(槪念)일 뿐만 아니라 人間의 상상과 꿈 조립(組立)이 어디까지 구사할 수 있는가의 여지에 종지부(終止符)를 찍는 것으로 끝을 보는 것이기에 추상화의 피카소의 그림이 뒤집어서 전시해도 상상의 그물은 펼쳐질 것이며 무엇인가 말을 생산하는 일은 지속(持續)될 것이다.

여기서 상상의 자유로운 추출(抽出)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피카소나 전위 예술의 필요성이 나타날 것인가를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백남준 선생의 작품(作品)을 예로 들면 번쩍거리는 T/V 화면의 다양한 연결 고리에서 느끼는 종점(終點)은 상상의 자유로운 구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은 상상의 자유로운 의미를 확보할수록 여지가 많은 작품으로 인정을 받지 않을까 한다.그러나 대부분(大部分)의 人間은 자신의 강박을 풀지 못하고 스스로에 갇히는 城을 쌓기 때문에 예술가라는 칭호(稱號)에 멀리 있게 된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라 하겠다.과학자는 예술을 알아야 할 때 바로 상상의 증명이 곧 과학이 된다는 이치에서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의 상상 요소로 하여 科學이나 哲學 심지어 수학조차도 예술가의 기질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 도출(導出)되는 것이다.

정작 예술은 예술가만의 전유물(專有物)이라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의의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자기의 성을 지키는 수성의 주인일 뿐 영토를 확장하는 개선의 예술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일 것이다.


누구나 자기의 성은 갖고 있지만 문을 열고 혁명의 칼날을 내면으로 돌리는 치열성에서 해답이 된다면 최면(催眠)속에서 나와 자유롭게 유영하는 주인공이 되어야만 윤택한 문화의 향수 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주꾸미는 소라 껍질에 들어가는 것 때문에 어부에게 잡히는 것이라면 응당 이런 일에 자기 부정이 있을 때 생존(生存)의 길이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비약(飛躍)이라는 말은 자기를 향해 메스를 들이대는 혁명적(革命的)인 행위가 결국 타성(惰性)의 벽을 허무는 일과 병진하는 결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은 자유를 먹고 길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자유 속에서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확장성에서 개인의 예술혼을 윤택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작업이라는 점에서 자기도량보가 그리고 본인의 성에서 문을 열고 과거의 모습을 지우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나서는 일에 다름이 아닐 것 같다



人間의 상상력(想像力)이 변용(變容)의 변화를 거칠 때 화려한 변신(變身)을 하게 된다.

나를 낳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化學的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水)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辭典的)인 의미(意味)에는 삭막한 느낌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문학의 가치이다.

때문에 文學的 삶은 윤활유요 生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文學의 효능(效能)인 것이다.

화학적인 변화(變化)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到來)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理致)처럼 文學은 인간의 가치(價値)를 높이는 임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삶의 문제를 상상하는 의식(意識) 세계는 각기 다른 형태로 자기 합리화(合理化)시키는 것이기에 -

다시 말하면 환경적인 요건(要件)이 성장의 여건 혹은 성품(性品) 등에 의해서 자기 구축(構築)의 방편이 다를 수 있다는 學說이다.

인격이란 生物學的인 유기체(有機體)가 사회적인 세계와 상호 소통 혹은 작용을 함으로써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의 표출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쌓으려는 욕망(慾望)이 아니라 무심(無心)의 경지로 화(化)하는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상이라 일상인의 정서와는 다른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을 통찰(通察)하는 눈 -

심안(Mind’s Eye)의 경지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 상상의 표출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범인들은 현상의 눈 -

가시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가는 길은 제한이 없고 무한의 거리를 질주할 수 있음에서 형형(炯炯)한 공간(空間)을 점유(占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상의 표현 대상에 감정이입(感情移入)의 동화(同化)를 구현할 때 목표치에 도달되는 것이다.

아무튼 현실의 상황에서 정신의 가치 상상의 가치가 육신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판단에서는 둘을 서로 보완 작용하는 작동이 상상의 나래가 펼쳐질 것이기에 人間은 희망(希望)의 불을 켤 줄 아는 지혜가 해답(解答)이 될 것이라는데 당연한 이치(理致)로 돌리는 것도 변명의 합리성에 맞지 않을까, 하면서 가치와 육신의 표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만 나가려 한다.


2022. 04.22.


[금요저널 주필/문화연구위원/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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