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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열어준 詩 문학】

[문학의 멘토(Mentor)]란

멘토(Mentor)란 어휘는 그리스신화에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위해 떠나면서 자신이 없는 동안 아들 테리마커스를 보호해 주도록 부탁했던 지혜로운 노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오늘날 조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을 멘토(mentor)라 한다. 즉 멘토란 조직에서 후진들에게 조언과 상담을 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 또는 프로티제(protégé)라고 한다. 우리말로 멘토와 관련 있는 단어로 선생님, 선배님, 후원자, 호칭으로서 형님이나 언니를 호칭하고 의미란 뜻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 개인적 주장이기에 큰 의미는 없으리라 -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詩는 아무런 힘도 없으며 금전적 이익도 없다.

하물며 길에 작은 돌만큼도 힘이 없는 詩에 대한 찬사는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도 해보았다.

더구나 한 편의 詩를 써서 명예나 금전적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詩를 시인들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한다.

물론 사회가 천지개벽해도 시인의 위상이 존경의 대상이 될 곳이라고는 기대가 난망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詩를 위해 일생을 허비하고 또는 시를 써야만 한다는 굳은 맹세를 공고히 하는 의지와 신념의 뜻은 무엇을 말함인가?      

원인에는 대답이 있기 마련이고 그 대답은 추상적인 숲에 들어있다 해도 합리의 그물망을 펴고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고대 우리나라의 시엔 고조선의 <공무도하가>가 있고 그 뒤로 유리왕의 <황조가> 혹은 신라의 향가나 고려가요 혹은 조선 시대의 내 성주이 씨 조상님들의 시조를 써본다.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 은하는 삼경인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문경공" "이직"의 "까마귀 검다 하고 백노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첫째는 매운당 이조년이 쓴 시조이고 둘째는 문경공 형제 이직의 시조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또한 "대제학 문충공" "도은"은 "산북산남 오솔길이 나뉘었는데" "솔꽃은 비에 젖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도승은 물 길어 초가로 돌아가고" "자욱한 푸른 연기는 흰구름 물들이네". 시조나 가사 문학 등 시에 대한 산견(散見)은 예를 들기에도 호흡이 가쁘다. 본인은 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나 서양의 최초의 장님 시인 호메르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그리스 문명 구축의 뼈대가 되었고 훗날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들을 한다. 詩의 영향이 인류문명의 이동에 혹은 발상에 끼친 영향을 숫자로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詩는 보이는 것, 혹은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위대한 힘을 갖는다는 말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악한 인간은 숫자나 이득, 즉 보이는 것에 의미를 중요 가치로 생각하는 미개성이 항상 앞장서기에 인간의 전신적 가치인 정서를 망각하고 순화하지 못하는 데서 사회성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큰 것이다.


작가란 사물을 보고 정서를 순화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상상의 창작을 그려야 하며 사회에 헌신하는 일이며 추수적인 경험을 만나야 하며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또한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작가의 깊은 저 ego 속에서 토해내는 언어의 그림이어야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글의 가치는 숭고하고 고귀하며 엄청난 감득을 할 때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바로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정신의 고매(高邁)는 결국 삶의 형태인 문화의 척도로 작동되기 때문에 섀익스피어와 영국과 바꾸지 않겠다는 말 또한 사실이 아니던가.


 인간 문화는 곧 언어로 창작된 작품에서 길을 찾고 또 길이 만들어진다는 문명사적 이유로까지 접근되어야 함에도 정신 가치가 들어 있지 않고 말 뿐인 시라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필자의 소견이 이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인간은 詩를 가정 앞에 놓고 시인의 존경을 보내는 일이 당연함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노동요나 군가를 힘차게 부르는 이유도 앞에서 말한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공급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분명 詩의 표정을 버라 보면 아무런 힘도 없지만 詩를 신봉하는 사람에게는 위대하고 거대한 정신 에너지의 공급을 받는다는 사실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최초의 시인을 찾는 일이나 그런 말은 분명 모순인 것이다. 즐거우면 춤추고 노래하는 일 -     


 고대 무속의 하나인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 또한 원시 종합예술이었다는 것은 그 속에 이미 詩의 요소가 희곡이 되었고, 詩의 형태는 기도문이 되었을 것이니 최초부터 이름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詩의 형태의 싹이 보였다는 점이다.
 詩는 인간과 더불어 나타난 기원으로 소급된다고 볼 수 있다. 호메르스는 詩를 <aoidos> 즉 가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도 굳이 시인의 원초적인 이름을 들먹이는 말에 모순의 불편함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굴곡진 삶에 늘 후회하는 삶을 이어 가는 현실에서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했을 때나 혹은 아픔이 에워쌀 때, 늘 저돌성을 보여 왔고 신념은 내 운명의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마다 동반의 친구가 되어 어느 날 나의 동반자가 되어 버렸고 나의 정신적 가치를  내 세우는 詩가 되었고 시를 쓰지 않으면 몸이 지치는 상태가 되었으며 정신 집중이 되지 않는 공황 상태가 되어 주체할 수 없는 시기가 있을 때 마침 시가 정신으로 들어와 내 정신의 가치는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꼭 멘토가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존경받아야 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마음을 서로 열고 허심탄회한 이야기하는 일면일 수도 있으며 늘 문을 활짝 열어주는 이들이 바로 멘토가 아닐까?

      

잠시 문호 괴테의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괴테는 가장 행복한 시인이라고 말했듯이 80세에 말년엔 18세짜리 울리케 폰 레베쵸프와 구혼(求婚)할 정도로 낭만적이고 관조의 대가라 했지만, 그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맛을 모른다"라는 말로 본다면 [무슨 고생을 했다] 고의 의아(疑訝)함도 사실이며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쓴 <마리엔바트 애가(哀歌)>등의 작품을 보면 인생의 모든 맛을 달관했다고 한 시인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음을 어찌하랴?
길을 열어준 詩가 나에게는 운명을 조종한 詩라고 믿기에 앞으로도 그렇게 가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도 詩를 그리는 일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우니 말이다.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힘이 되어 주는 지탱의 끈이라고 믿기에 언제까지일지 모르나 문학적 가치와 문학의 신념을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시, 수필, 칼럼, 비평, 논고, 등을 섭렵하고 싶은 마음뿐이며 내가 가야 할 길이라 보기에 수구초심의 자세로 가리라 다짐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3.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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