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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만나는 시의 지혜]

[시는 무엇일까?]

시인은 왜 시를 쓰고 그릴까? 다소 직설적으로 시작해야겠다.
 이유와 왜란 없다. 다만 자기의 시에 대한 정립된 신념과 창작으로 이어지기에 그려본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적어도 마음에서 들려오는 시의 소리가 음악이 된다면 시에 대한 판별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오로지 써야만 살 수 있다는 절대적 사랑과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시를 접해야만 밀착되고 유안 한 시와 시인의 삶과 표현의 일체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와 정립은 시(詩)뿐만이 아니다. 삶의 방식도 논리 정립이 되어 있는 사람의 삶의 모습과 그냥 좋다가 아니라, 늘 사람은 정신적인 문제가 엄존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신념이라는 줄기는 인간을 정서의 길을 세우는 필요 요소이기 때문이다. 

시란 신념의 표현이고, 그 신념을 시적으로 표시할 때, 시적 장치의 요소가 결합하여 이미지 숲을 그리면서 개성과 존재 의식으로 우뚝 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의 저서는 시 집에 담으려는 노력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시와 함께 한 나의 인생 여정은 구원의 빛을 본 것이 사실이라 삶의 어려움 등을 극복했다고 자부하는 것이나 시는 나의 화신이고 목록이라 보듬어 갈 수밖에 없고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의미로서 시와 남은 인생을 함께하겠다는 논고에서이다
 
 (1) 삶의 반생을 넘어 후반전으로 들어선 길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시에 빨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있다. 시에서 자신을 찾고 이로 인하여 구원의 빛을 찾아가며 스스로 구현하는 발상이 매우 공고함에서 시의 마지막 삶의 마지막을 시 이불로 덮으려는 각오와 마음이 채색되는 시간이다. 어쩌면 시에 대한 열정과 필자가 살아가는 등가(等價)를 이루면서 남은 삶의 여정을 각오하는 신념이 눈에 들어온다고나 할까에서다.


 
 (2) 詩란 향기가 아닌가!
 
 시와 화자의 관계는 선택이라 본다. 고급스러운 독자는 고급의 시 맛을 알고 또한 감동과 자기 합리화된 신명의 줄기에 동화하는 길을 본다. 

왜!
 詩는 삶의 가장 지고(至高)한 인생의 향기가 있고 인생의 길을 인도하는 통로가 있어 교훈을 얻으며 생의 의미 가치의 에너지를 받기 때문이다.
 


 사람은 주어도 받아먹지 못하는 떡이 있는 것처럼 선택을 독자들에게 받는 것이기에 쉬운 것은 아니다
 늘 시도 갈증 난 독자에게 물 한 모금이 감로수가 되는 것처럼 필자의 詩 또한 갈증에서 찾는 독자들을 위해 빛나는 시집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a) 주관적 의미 일필
 
 사전에는 주관이라 하면 고집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고집 증으로 무지막지하게 자기 고집으로 주관적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약삭빠른 사람들이야 배움과 현실 논에 기대 사는 부류들이 더 많을 것 아닌가. 삶의 방법에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잘살고 출세를 하며 능력을 앞세워 이기적 행동을 하는 부류들 -
 보통사람들은 주관적인 입장보다는 출세와 돈에 마음을 두며 일상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에 마음이 휭 하다. 스스로 삶의 모양을 주관이라 자처하며 오로지 시에 마음을 토로하는 양상이다. 시적으로 삶을 용해하고 응고시켜 앞으로의 삶의 길로 가보자
 
 올 곧이 땀 밭을 구르다가 하늘을 바라보는 삶
 들꽃과 벗하며 이슬과 어울리며
 원망하지 않고 살았건만
 
 제 마음대로 살았다고
 세상은 양보 않고 진땀만 흘리게 하네
 
 올 곧 대로 정직한 의를 갖고
 세상사 살았건만 
 
 가슴 아프도록 목청 높여
 노래만 할 뿐이로세
 
   <주관의 탄식> 중에서 (졸 시)


 떳떳함으로 살기란 지난(至難) 한 일이다. 온갖 유혹과 굴곡이 많은 세상사를 지나는 일은 개인의 청청함을 그대로 두지 않고 시련의 시험을 통과하면서 삶을 잉태하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주관적으로 자기를 세우는 중심을 잡을 때만이 고통을 벗어나는 달관의 경지에 당도하여 자신만의 색깔로 삶을 잉태한다는 것은 부(部)와 권력(權力)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순수와 주관적으로 부지런한 인간일 때, 선망의 인생이 아닐지라도 부끄러움 없이 사는데서 주관적 개성의 길이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라도 원망하지 않으며 "남을 속이지 않으며 정직함, 주관적으로 하늘을 만나/ 웃음을 잃지 않는"의 삶을 사노라면 자기만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에게 굳이 주관적 또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소 늦었다 해서 혹은 주관적이라 해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앞선 사람의 길이 아닐까 한다. 빨리 달리면 넘어지는 법이 아닌가?
 이런 주관적인 필자는 자기만의 노래를 실컷 부르겠다는 자유정신이 뚜렷한 시인이 되고픈 것이다.
 
 b) 시의 깊이는
 
 시인은 시에 자기의 운명을 걸고 살면서 시를 찾아 방황하고 시의 맥(脈)을 위해 고난과 고초를 인내하면서 주관적으로 오로지 시의 향기를 추적하며 생애를 사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쫓아간다 해서 쉽게 잡는 것이 아니며 찰나로 왔다 순간에 사라지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안갯속에서 신기루를 찾는 것일 것이다. 혹여 시의 脈(맥)을 찾았다 해도 “아름다운 시” 한편은 결코 길을 내어주지 않을 때, 애간장을 태우는 일이기에- 

물론 시는 특성이 있지만, 뿌리 깊은 인간사 열심히 현실을 사는 사람이거나 충실한 현실을 운영하는 시인의 눈에는 순간순간 다가오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다시 말하면 詩는 비싼 존재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c) 詩에 대한 열정
 
 시인은 시로써 말하며 시를 갖고 詩論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시는 주관적으로 열정이 있을 때만이, 종교와 같다는 영국의 비평가 매 쉬 아널드가 말했지 않았던가. 

詩가 종교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의 기능이 선량하고 착함을 표상이라면 시는 그런 이치에 합당, 정당하다는 비유를 완곡(婉曲)하게 말하는 뜻일 것이다. 시인이 사기꾼, 혹은 거짓으로 시를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기능과 창작, 주관적일 때 평생을 시와 더불어 공생하고 미명의 합리성을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시가 없는 세상
 어떻게 살까
 
 펜과 마음 상상이
 시인으로 만들어
 
 충만한 삶이기에
 죽지 않는 시이기에
 
 영원히
 함께 하련다.
 
  <시와 영원> <졸 시>
 
 참으로 대단한 선서 아닌가!
 즉 "펜과 마음이 시인 만들어"
 /詩와 함께 /영원히/


 시가 인생이고 삶이고 가치의 척도가 된다는 선언 아닌가. 이 선언을 통해 시의 成(성)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시에 온 신명을 걸고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절대적, 주관적 소신을 들을 수 있기에 모든 가치를 담으려는 선언적 의미가 명료하다.
 이런 강화적인 말은 자유의 시적 감각에 있어야 할 것이다.
 에이미 로웰이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모른다.라고 했다. 
 시는 시인의 의식을 두드리는 상상의 작용에 의해 비로소 이미지의 순서 앞에 정렬해지는 것이다. 시의 싹은 언제나 미지수의 함정에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는 길목에서 시인이 포착의 눈을 두리번거릴 때 어쩌다 시의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만큼 미지수라는 시 모습은 암연(黯然)이거나 암담한 어둠을 방황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얀 종이 위에 형태를 갖추는 시를 창작, 창조라 하는 것도 없음에서 만나는 표정의 임무일 것이다. 절망에서 건지는 소득이야말로 지고지순한 마음을 발휘하여 신을 만나는 시가 된다면 시인은 치열성을 앞세우고 처절한 시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결의가 굳세고 시에 대한 불타는 의식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글은 자기 에너지 발산의 방법이 있기에 개성에 따라 이미지를 조합하고 배열하는 기교가 남다를 수 있기에 늘 긴장과 사고가 표출하는 길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시 쓰는 일이 즐겁기를
 꽃이 피듯이 향내를 내면서
 
 나의 시는 젊음이 없어서인가?
 물이 없어서인가?
 
 꽃보다 못한 내 글
 그리고 고통의 날들
 
 주르르 쓰이지 않는 글
 저 멀리 두둥실 흐르기만 할 뿐
 
  <영혼 없어> <졸 시>


 시인들이 언제나 시의 흔적을 잡기 위해 신명을 다한다. 그저 번뜩이는 그 무엇을 찾아 일상이 처절하다. 잠시 왔다가는 찰나 에도 잊어버리는 허망에 골똘히 생각에 도로(徒勞)의 기회는 늘 있는 것이다. 언제나 비유의 고통은 순간적으로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시인은 힘들고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 자기를 산화(散花)하여 시 귀와 맞바꾸는 결의가 있기에 시에 매달리는 것일 것이다. 
 
 이는 먼 앞날을 득의(得意)로 운 글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열정으로 찾아 사정하는 詩作(시작)에서 언젠가는 회신의 응답이 올 것을 믿는 신앙을 깃발로 날리는 시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d) 인간 삶의 일면들
 
 살아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갖고 살아간다. 모두가 개성을 발휘하는 것은 저마다 다른 일로 살아가는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과 기쁨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누구라도 선택적일 수 없으며 또한 운명을 이끌고 가는 길과 수단이 저마다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시 또한 다를 바 없다. 시는 곧 사람이라는 명제가 가장 합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의 지문이 다르듯이 시의 표현도 그처럼 같은 것이 없는 표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삶에는 기쁨도 있지만 고달픈 일들도 밀려온다. 하여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말이 있듯이 -
 
 이를 탈출하는 방법은 늘 자기 수련의 방법을 동원할 때, 비로소 생의 이름에 쉼표가 된다는 것이다. 
 시인의 삶, 나를 버린다, 인생 등은 삶의 모습이 어떤 진출로 형성하는가를 살필 수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지만
 
 먼 인생길
 노래 부르며 가자
 
 산 넘어 에 산이 있고
 물 건너에 물이 있듯
 
 관조하고 노래하며
 쉼으로 노래하자
 
  <삶의 길><졸 시>


 멀고 긴 인생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는 누구나 물음표(?)이다
 빨리 가는 사람, 느리게 가는 사람, 유유자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재미가 좋아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길에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선택적, 주관적으로 살아가는 길이 곧 자신의 삶이며 그 가는 길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날 것인가는 본인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수많은 고통의 길, 장벽의 길을 산 넘고 물 건너서 막히면 돌아가야 하며 물이 막으면 돌아가야 하는 것이 순리이며 진리일 것이다.
 

시인은 쉬엄쉬엄 관조하면서 그의 길을 가겠다는 자세가 되어야 하며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갈급(渴急)이 아니라 천천히 가는 삶의 관조(觀照)가 담아지는 모습에서 인생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허허로움이다.
 
 f) 허무(虛無)의 가락 
 
 허무가 느껴지면 인간은 공허함과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뜻일 것이다. 

사는 길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물은 물이요 라는 

아무것도 없다는데 삶의 본질이 아닐까?
 불교도 예수나 설법을 하고 허무가 절망의 끝에 이르면 죽음에 이르고 허무가 삶의 인식으로 좋게 보면 삶의 본질에 있지 않을까 한다. 
 
 어느 것이든 삶은 허무의 의상을 걸치고 있지만 어떤 주관으로 살 것인가는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 허무의 가락, 삶이란, 홀로 살기 등의 뉘앙스는 삶의 진정한 표정을 통찰한 시인의 깊이가 지향점을 보이기에 아래에 증거 하기로 한다. 
 
 저 산 넘으면 허무인가?
 노래의 허무를 찾는다.
 
 허무가 헛되어 
 살아있다 외치니
 
 산 넘어도 허무라
 진리와 진실 
 어떻게 찾으랴
 
  <산 넘어 의 허무> <졸 시>
 
 사실 누구나 허무에 빠져들면 절망이 앞세워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허무를 찾는다. 살아있어도 헛되니라는 구절에 꼭 허무를 넘어야 한다는 구구절절 묻어난다. 헛됨을 문맥의 뜻에서 산 넘어도 허무라 진실과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시인의 처지에 답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에 건강이 우려라 해서 끝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뭐 그리 대수랴-
 
 그러나 詩는 어떤 조건에서도 실망과 절망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에서는 허무에서 희망과 사랑을 갈구하는 묘사에서 감동을 주는 것이다. 

끝없이 다가오는 허무의 능선을 넘으면 전열을 정비하는 다시 말해 허무라는 마음을 이기려면 진리의 진실을 찾으라는 매우 합리적인 처방전이라 할 수 있겠다. 

열정적으로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이 바로 진실과 진리인 것이다. 
 
 3) = 에필로그 =
 
 누가 말했듯이 시는 노래이고 그 가락은 즐거움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자기화의 방법 논으로 살아가는 것은 개성이며 표현하는 시는 생동감을 주는 노래가 될 수 있다. 

시는 깊이가 넘치고 건강을 찾으며 연륜이랄까 글의 이미지가 정갈하고 꾸밈이 없으며 언어적 탄력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
 
 주관적이면서 정제된 길에서 지혜로움을 찾고 낮춤에서 진리를 구가하면 누구나 미소 짓는 시인이다. 
 누구나 말을 한다. 시는 향기가 나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꽃은 향기를 전파하기 위해 벌과 나비가 오고 스스로 끌려다니지 않고 그 자리에서 향기를 발산한다. 
 멋진 시의 이치는 위와 같은 비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향기가 물씬 풍기는 시를 만들기를 바라며 삶에서도 낮은 자세로 정도를 지향하는 진실한 모습에서 시적 의미는 한층 빛날 것이기에- 
 
 허무는 일생의 본질로 인식을 하며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꾸는 빛을 알기에 밝음이 찾아온다. 
 모든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남다름으로 채우는 시의 열정과 창작을 토해낸다면 시인 누구나 시는 성숙을 위한 진솔한 모습에서 아름다운 시인이 되리라 짐작을 하면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시인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에필로그 한다.
 
 2023. 08.
 

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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