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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고독과 깊이의 서정.]

{1. 조화의 미학}

아름다움이란 그리고 신산함에 대한 대명사는 과연 어떤 것일까?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누구는 꽃을 말할 것이고 누구는 자연의 신선한 모습에 찬탄을 발언할 것이며 혹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수 없이 셀 수 없는 많은 환경의 조건들이 첨가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직관의 시선에서 나오는 감성이라면 시는 지적 감수성의 깊이에서 나오는 느낌이기에 생각을 더해야 하고 분석하면서 얻어지는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지칭-

시는 심리적인 반응이 길고 판단의 정상적인 가치 혹은 순수한 지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인식은 정서적 감동과 조화의 길이 상관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지적 인식만을 앞세울 때 자칫 어지러운 함정에 빠져서 도그마의 편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딱딱한 돌을 만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의 조화라는 시 묘미의 깊은 맛을 부추길 수 있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조화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는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다. 너무 가가이 가면 아름다움의 실체가 흐리게 되며 또 멀리 바라보게 되면 분간하기 어려운 사물로 둔갑하기에 균형이 있는 정서를 대동하고 목 좋은 자리에서 감상하는 행복이 조건으로 갖추어야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를 감상자의 태도라 한다면 생산자인 시인은 고뇌와 아픔 그리고 탄식을 조합하여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시인의 시를 보다 보니 시의 아름다움이 새삼 앞자리에 자리하는 이유는 신선함과 감각적인 표현미 그리고 이미지와 이미지가 교합되면서 잡아주는 탄력에서 나오는 함축미는 시의 이름을 빛나게 한다. 

「비울 수 있어야 시인인 것을」 이후 4년 만에 「거울의 시」를 출간한 시에는 자유시가 누리지 못한 긴장과 의미 깊이 조화를 이룬 언어 결합의 뉘앙스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시인 시에는 요란함이 없고 고요하고 금도를 지키는 정신의 고양을 대면하는 올곧은 정신이 숨어 있고 뿐 아니라 때로는 고독의 깊이에서 그리움을 보내는 여린 정서가 보이기도 다. 아울러 깊은 연륜의 오는 이별의 아쉬움과 돌아보는 생의 소회 등이 어우러져 파노라마의 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위치에서 시적 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관조하는 시선에는 정감이 진하게 흐르고 있음을 본다.   

        

2. 정서의 감각적 서정          


사실 시를 따지자면 감각적이고 정서를 풀어내는 감수성이 시인의 재능과 일치하는 점을 가질 때 시의 묘미는 아름다움과 보조를 함께 하는 것이다.

김영기의 시에는 그런 감칠맛이 들어있으며 의미와 가락의 조화에는 시가 갖는 정서의 증폭이 일조하는 느낌을 배가 하게 된다.          

지분지분 정을 주는 속살 비가 소근, 소근

살며시 부치는 볼이 간지러워

살짝 고개를 틀며 모를 듯 웃고 있다     

숨긴 사연들 배시시 오로 시 감추고

내 안으로 차오르는 고요의 살 갓     

들릴 듯 말 듯 사랑의 밀어가

봄소식이 바쁜 듯 

영혼과 함께 춘(春) 소식이

살랑이며 다가서는 듯하다.         

 

             <봄소식중에서     


지극히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의인법 혹은 반복에서 나오는 가락에서는 여유가 있고 맛깔스러운 뉘앙스를 전달하는 듯하다. 

언어를 비틀거나 언어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맛에 배치가 적당하다.

지분지분은 살짝 귀찮게 하는 의성어, 나오는 여운은 가락의 여유가 있고 속살은 내면의 부드러움이면서 가는 빗소리 -

소리 나는 빗소리가 아니라 소곤거리는 암시를 포개는 인상, 비가 내리는 날은 무겁고 우울한 기분이 점령되는 바 이 시는 비는 귀엽고 ‘배시시’ ‘웃고 있다’, 는 시어의 조합이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정리로 마무리되어 밝음의 상태로 이어지는 듯하다.

이는 전체적인 시의 표정이 밝아 봄의 정서가 살아나는 것 같은 「우수에」 「꽃의 향기」 등 서정적 이미지가 드러난 모양새다.     


3. 희망의 언어 조합      


모든 인간은 절망을 겪으며 또 희망을 보며 살아간다.

그 아픔과 희망을 통해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령이라 하겠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미래를 말하는 손짓이고 예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어려움과 고난에 처한 사람은 환한 불빛의 역할을 하는 일면 평화가 올 때는 화려한 장식으로서의 소임이 시가 갖는 본령이고 시의 역할에 주된 임무이기 때문이다.  

시의 특성을 Amdiguity에서 찾는 것도 시가 천의 얼굴, 만의 얼굴을 소유한 보살의 역할처럼 다양한 표정을 내장했을 때, 비로소 시의 기능은 문법 언어를 완수하기 때문이다.      

    

떠날 수 없어 주저앉아 쉼도 없는 곳

눈빛 시린 볼모의 공간 속에서도     

봉긋이 예비한 가슴 신들의 꿈은 있거니

지상에 흩어진 오탁의 그림자도 

한 올 벗겨보면 샘물이 있을 것      

접신(接神)의 영혼들을 닮은 이사야 마음으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 깨끗함을 전한다네     

봄을 잉태하는 몸부림을 이 어찌 감동하지 않으리오 

봄을 맞이하면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 중에서 

        

질서 정연한 과정으로 보면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즉 1연에서는 시련, 아픔을 따르는 볼모의 공간이며 2연은 꿈을 연상하고 3연은 물이 올라오는 희망을 말하며 4연은 개화를 완성하는 완성 개화의 단계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남은 삶의 원리를 말한다 해도 인생의 진수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이는 생활의 통찰력과 명상에서 얻어지는 정서의 내공이라야 하겠다. 오랫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체험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언어운용의 기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정신을 나타내고 민감한 온도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는 삶을 시적으로 표정으로 표현하는 표정이기에 그가 어떤 삶을 잉태하는지 알 수가 있다.  

참으로 기억에 남는 시를 보는 것 같아 매우 흡족하다.   

  

4. 황혼의 고독        


시적 표현이 겉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독과 이별이 교차하는 다소 쓸쓸한 형국이다. 아무래도 익어가는 추세에서 오는 감수성이 차분하면서도 쓸쓸함이 보이는 것은 자꾸만 먹어가는 나이가 오버랩으로 형상되는 것은 아닌지 -

시인과 시가 정서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 사물을 앞세워 비유라는 도구로 사용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 하는 상징성이랄까

그러나 적절성의 비유에서는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더하는 역할이라 보기에 곰삭은 지혜가 들었지 않았나 나름대로 유추가 된다.

고독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 꾸미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움과 같은 이치라 보겠다.     


핏빛에 물든 잎에 입술을 가만히 대어 본다.

잎맥을 타고 어질 비질로 익어가는 소리가 

세월 등어깨에 누워 붉은 노을만 담아가며     

꿈같은 지난날을 누운 세월 붙잡으며 

뜬눈으로 자정을 지키나 출구 막힌 회안만

어깨에 걸리면서 함부로 만질 수 없기에     

등어깨에 실린 하루해만 건지려다 

세월 놓치고 시간에 놓쳐

해 저녁에 노을만 쳐다보다 노을에 지치고 만다.

어느새     


                         <황혼 가는 길>     


사물의 모습을 소리로 듣는 이의 시인은 귀 밝음이 어떨지 궁금하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들이 소리로 다가오는 일은 체험의 깊이에서 알아차린 쓸쓸함이 아닐까? 

잎새를 타고 어질 비질로 익어간다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듯한 이명의 낯섦, 은 아닐지? 아울러 시야에 들어온 꿈같은 지난날을 흐린 사물의 윤곽에서 소리로 직결되는 환청으로 들어올 수 있을 때, 마치 출구가 막힌 회안만 더불어 어깨에 걸리면서 만질 수 없다고 하는 상상의 깊이에서 하루해를 건지려다 어질게 시간만 놓치고 어느새라는 늙음의 소리 지친 하루를 찾는 도정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모두가 종점 의식을 암시하는 상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의 고독에 지치고 마는 시간이 자신을 상징할 때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5. 고독의 소리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는 인간만이 갖는 정서가 아니다. 우주 삼라만상의 섭리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굴리면서 만나면 떠나는 것이고 떠나면 다시 돌아온다는 굴렁쇠 속에서 내 존재라는 이름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고뇌는 곧 이런 이치를 가장 순수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소 어폐가 있지만 다른 방편으로 본다면 정확한 이름표는 없을 것이다. 만남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반면 이별에는 슬픔의 강물이 수런거리는 일은 천년의 인간에 역사가 축적한 슬픔의 기록일 것이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답안을 찾을 수 없어 두런거리고 슬픔의 깊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별을 건너지 못하는 미련의 줄기가 뒤따르면서 가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계절의 무게만큼 무너지는 겨울의 동거

비범한 고독을 외기러기가 울고 간다.

은하 지는 새벽을 눈물로 건넜을까?

무심결에 놓인 쪽 거울 보고 있노라니

등은 휘어지고 골 깊은 주름살은 자화인데

문턱 높은 세상살이 바람만 굽이치는데

허리를 펼까? 성형할까나?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에이 병 하나 달고 살다 가자꾸나?

이치대로     


                   <개꿈의 세월>     


시는 (Reality) 장면을 사실 그대로 근거하여 상상, 혹은 창작과 상상력에 옷을 입힐 때, 더 넓은 상상의 반경을 소유할 수 있다면 시인의 늙어가는 퀘어를 자신이 시적 언어로 ‘고독’과 계절의 ‘무게만큼 무너지는 겨울의 동거’라는 언어를 지적인 제어로 매우 무상함을 느낀다.

허무와 병치레하는 면면과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 모습을 반추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각인의 이름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에이 병이나 하나 달고 살고자 하는 일면에서 허무와 동행하는 일들이 흔적으로 보인다. 개꿈의 세월이면 차라리 인정하겠다는 형식에 아픈 기억이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도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나 자신도 늙어간다는 이치 앞에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명제에 필자도 반추하는 시간이 되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현실을 비교하는 그런 세월이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6. 고독으로 보는 풍경화 <나가면서>     


시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 보이는 풍경화라고들 하지만 이의는 있을 것이다. 시에는 서정시의 숲을 이루면서 시원하고 삽상한 미소로 건네준다. 이는 표현의 깊이를 간직한 셈이고 여기서 시의 숙성은 곧 체험과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아울러 대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의 시선을 사랑으로 감싸는 동화에서 형식의 절제와 언어 탄력을 수용하는 미감과 내용의 무한성에는 여유로운 감상의 길이 보인다. 고독과 허무의식 그리고 그리움의 표정을 나타내는 기법이 시적 기교의 깊음을 방문하는 소감처럼 객관적인 표현일 때, 더욱 친근함을 전달하고 있는 형식에 기쁨을 느낀다. “Allan Tare”가 말한 “문학은 인간 경험의 완전한 지식이다.”에 미감을 더한 소독이 따라오는 감동의 시인이 아닌가 느끼면서 밝은 미래가 보일 것이라는데 즐거움과 만족을 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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