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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 흔들리는 사회 문학인으로 살기]

{상식이 통하는 문학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공정으로 이어지는 문학이 아니라 이른바 (sns)로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거짓으로 난무하는 사회가 이루어지듯이 문학 또한 반으로 나뉘어 나는 진보라 황색 저널리즘의 바람에 의해 민중 타령으로 온갖 거짓과 비방으로 이 사회 현상을 오염시키고 있다. 문학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행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무정부주의자라 한다 해도 어딘들 따라오는 제도와 세금 등은 여지없이 발목을 붙잡는 것은 자명하다. 먼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산다 해도 제도의 그물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모든 인간은 사회라는 그물망 속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군집의 속성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의 성향에는 조직을 운영하고 이 조직은 운영의 방도로 세금을 걷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갈수록 촘촘하다.           

그래서 필자는 흔들리는 세상을 문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고 상식선에서 문학인의 길을 가감 없이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정권이 바뀌어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촛불이 민주주의 본질처럼 호도하는 이른바 선동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데 다소 안심을 하지만 아직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결 원칙이라는 결정했던 방법이 이 땅에서 촛불로 함성을 지르는 그 함성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일반 사회의 대중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지배하는 경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는 것에 우려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전 선동으로 중심 세력이 되겠다는 못난 자들이기에 위험이 증대한다.           

노동계나 문화계나 교육계나 거의 같은 방법으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경향이었지만 차차 그런 경향이 줄어든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사실 좌편향의 좌파라는 인물들이 북한 편들기가 불균형의 가치로 더욱 한쪽으로 쏠렸다면 이제는 그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울 때가 아닌가 한다.


특별한 홍위병들에 의해 혼란은 있겠지만 사실에 의한 상식의 선에서 점검한다면 우리 국민성은 대단한 수준에 올라 있기에 상식의 지도자 공정의 지도자가 있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지난 10년 동안 민주주의가 신음하는 시대라 한다면 앞으로는 상식이 통하는 시대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필자가 상식을 바라는 것은 법은 이성이고 소리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이성보다는 소리 게임이 우세한 것은 『아직도』라는 말에 이성과 상식의 민주주의가 신음한다는 뜻에서 단언컨대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을 해본다.

상식이란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판단력이라 한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르다고 일컬어 말하지만, 여기에 덧붙인다면 철학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철학의 어원은 지식, 사랑한다, 등이다. 다시 체계적으로 말한다면 체계적으로 엮은 것, 철학도 분류가 너무 많아서 난감-



사실 분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해석이 복잡하여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해석이 많을 수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모든 철학이 단순할 때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옳은 것, 바른 것 추구하는 합리성에 기준 자(척 尺 )가 아닐까? 글을 쓸 때면 인용 글로 많이 쓴다.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나를 좀 더 낮추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잠깐이라도 있을 수 있다면 혼란의 소용돌이는 없을 것이고 일반적인 상식의 사회는 편안한 표정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일그러진 표정이 다양한 것이 요즘의 일상이다.

세상은 갈수록 어지럽고 복잡하며 미로의 행로를 끝없이 이어가는 길에서 살아가는 느낌이다.

자기의 주장이 목청으로 둔갑하고 더 크게 높이는 높은음의 마지막은 찢어지는 비극이 예정되어 있는 듯 막다름으로 질주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 철학은 지고지순하고 남의 철학은 개똥으로 버려야 하는 사회라 한다면 오만의 질주가 심할뿐더러 독선의 칼날은 타인의 가슴에 비수를 품는 악순환의 현상이 증가 폭을 가파르게 높이고 있다.      

이러한 징후는 사회 전반에 포진해 있고 특히 정치판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강한 방어막을 치고 내가 권력을 잡으면 상대는 죽이겠다는 포용 없는 조사를 해서 고구마 줄기를 끌어올리는 형상이 악순환의 부메랑이 될 것 같다. 



상식도 없고 공정도 사회 정의도 없는 시대인 것은 아닌지 -

서로가 바른 것을 추구하면 서로가 응하는 일이라면 진보, 보수, 혹은 좌우라는 분류가 가져오는 비극은 정말 목불인견이다. 

이견(異見이 있을 때, 이를 화합하고 조화하는 것은 집권의 철학이 있어야 하지만 오로지 내 편과 내 것을 많이 확보하려는 일은 결국은 수렁에 모두가 빠지는 탄식만이 불러올 뿐이다.

이러한 기저 논(基底 論)에서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무한 파급을 사회 전반에 갈라침으로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상식이 무너진 사회인 것이다.      

문학의 판도 또한 그 어느 하나도 상식의 본질에 다가간 경우가 없는 우려가 심각하다. 그러니 상식과 철학이 개똥 상식, 개똥철학으로 굴러다니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지금 자기 고민이 없는 듯하다. 남의 것만 보이고 자기 것을 간과(看過)하는 어리석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이는 합리성 즉 상식과 이성이 실종된 사회인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다양하고 여러 개의 길이 있을 때 정상에서 만나는 기쁨은 모두 것이 되는 사회가 철학과 상식이 운용되는 이름일 것이라면 상식은 바로 자기를 찾고 자기를 돌아보는 아주 쉬운 길이 있을 뿐이지만 자기 자신을 감추고 상식을 버린다면 결국 자기에게 비극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상층부 – 권력층이나 – 지식인 – 에게 문제가 심각하다. 

“너는 나의 적이다”의 명제에 충실할 뿐 너는 나의 동지 혹은 친구라는 명제는 없다. 

지식인의 머리에는 자기 영달의 목표만 있을 뿐이지 상식 앞에서 넓게 바라보는 시선의 확보가 없기에 흔들리는 멀미를 앓고 있으며, 이를 바로잡는 어른의 부재, 혹은 자기 수양의 상식이 사라진 허무에서 맹목의 질주가 있을 때 자기부정의 회의가 절망을 낳을 것이다. 



이에 처방전이란 상식선에서 자기 찾기에 방법에 대한 고민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라면 문학은 사회를 담아내는 척도의 온도계일 것이다.           

문학은 사회를 모두 수용하여 표현의 길을 만드는 거울이다. 

현대문학의 경우 대부분이 대립의 각을 세우면서 이익 쟁취의 수단을 원하는 일로 지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익의 본질은 무엇일까?

돌아보면 자기를 잃어버린 허무 이외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는 문학의 본질이 사라졌고 오로지 너와 나의 삿대질이 지금까지의 현상일 것이다. 물론 문학만의 토양은 아니라는 데서 심각성이 대두되지만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우든의 상식의 실마리는 문학의 표현에서 철학 상식의 수립이 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정신이 다른 데로 놀러 갔을 때 쉽게 함정에 빠지는 비극이 온다면 지금 우리의 문학 풍토는 그런 위험의 중심에 있다. 지난번 어느 문학 행사 초대를 받아 참석을 해보았지만 뭐 그리 정치꾼들이 왔는지 문학 행사인지 정치 행사인지 도무지 분간하기가 -



벌써 선거 때가 돌아오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흐린 흙탕물이 자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물이 담긴 모든 영역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식의 토대, 철학의 토대, 공정의 토대, 정의의 토대가 될 때 비로소 공간의 물은 정화 혹은 깨끗한 풍경이 연출될 수 있을 것이다. 양쪽 손은 몸 일부이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물이 아니라는 자각을 앞세울 때 너의 아픔은 곧 우리의 아픔이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지난번 문학 행사에도 물론 낭송을 잘하고 글을 잘 쓴 자가 상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주위의 연결이나 어느 주최자에게 잘 보인다고 상을 타서는 되지 않는 일임에도 뒤에서 작가들이 수군거리며 누구에게 잘 보여 상을 타는 것이라고 말을 들었을 때 필자는 조용히 그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하물며 정치꾼들이 참여하여 무슨 공로상이니 공로패니 하면서 돌아가며 상패를 받는 장면을 보며 평상시에 그렇게 열심히 하고 상을 받는다면야 무슨 말을 들었겠는가? 상식이 통하지 않고 철학이 부재한 이들이 과연 정당성이 있는 것인지는 글쎄올시다.이다. 



자기 자신 문학에 철학과 상식을 넣고 자기가 소속한 단체에도 상식과 철학을 곧추세우고 자신이 리더라면 철학과 상식으로 타인을 대할 때 현 중심 사회는 균형에 사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현 사회는 어느 한 곳도 이러한 대척(對蹠)의 경우에서 왜 너는 나와 다른가를 따질 뿐 너는 나의 일부라는 의식이 없는 쪼개기 현상, 갈라 치기 현상에서 당면한 비극의 길을 잃어 헤매는 일이 자심(滋甚)함을 부인할 길이 없는 같아 아쉬움이지만 우리 사회를 위해서라도 문학을 하는 작가들만이라도 상식의 철학을 실천하는 균형의 길로 가기를 기대하며 내 문학은 여전히 모순의 옷을 입고 너덜거리는 표현에 땀을 흘리는 일이 오늘도 진행형이라 어떻게 가는가를 모르는 맹목이 두렵게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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