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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상상 논(論)]

『상상(想像)이 주는 시(詩)의 세

1. 들어가면서

[필자와 금찬 스승님과 과거의 생존 모습]


시는 사실 역사는 아니지만 시인의 일생은 역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시인이 살아온 세월이 곧 상상의 나래를 타고 시로 안착하면 시인의 역사는 변용의 이름으로 시(詩)에 용해되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는 시(詩)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시인은 이를 재료로 새로운 공간의 창조를 위해 새롭게 정신을 투척한다.


한 사람의 시인은 때로 역사를 넘어 미지(未知)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시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이는 상상의 힘에 의지할 때, 비로소 가능의 입구를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영주(英主)로서의 역할 -

시적 성공은 정신 서정에 건설의 완성일뿐만 아니라 시인을 영생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스승이라 해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후백 황금찬 시인은 1918년생, 미수(米壽)를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문학 행사에서 축사를 빈번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제 시집 출간 때도 축사를 하셨으니 왕성한 집필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놀라운 모습을 뵈며 경의(敬依) 로움을 느꼈었다.

대체로 시집을 발간하는 평균치의 기간이 3년쯤인데 비해 후백 황금찬 시인은 이를 상회하는 것으로 보면 -


더구나 나이가 들면 젊은 날의 감수성에 매달리는 앙상한 표현이 대부분이지만 황금찬 시인의 시는 새로운 변경을 찾아 두리번거림 -

되돌아보는 추억이 많은 함량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고희(古稀) 무렵에 발견했던 정신의 흔적(Trauma)이 20년 후에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현상일 것 같은 호기심으로 논지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큰 윤곽에서 볼 때 1956년 박두진 시인이 지적한 대로 “평범한 주제와 인생을 보는 눈도 일부러 기발(奇拔)함을 꾀하지 않는” 황금찬 시인의 시는 여전히 동일선상에서 정서의 평형을 유지함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에 따라 인간이 변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면, 첫 번째 변화는 회고(回顧)의 시들이 많은 비중으로 분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대화에서 원숙한 내면의 소리가 들리고, 시 공화국 서정 논 건설의 포부가 두드려진다. 이울러 새와 나비, 그름 그리고 호수 등이 여전히 시 의식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 정신의 중심 표정


1) 회고의 길 찾기


돌아보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물론 아픔이 있는 돌아봄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움의 추억이 아니겠는가? 고향, 어머니, 등을 생각하면 고향의 이미지는 차라리 숙연한 정서를 동원하는 미감(美感)에 포위되곤 한다.

더구나 젊은 날들의 친구에게서는 눈물겨운 기억이 풀려나고 그 이야기는 애달픔으로 부추기는 길을 헤매게 될 때, 무거운 추억의 무게 앞에 스스로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또한 아스라함이 더욱 심각할수록 돌아갈 수 없는 길 찾기는 아름다움과 애절함을 가중하는 방황-

황금찬 시인은 청록파 삼가 시인 중에서도 묵월에 대한 추회(追懷)가 남다르다. 시적인 증거를 통해 정신의 입구로 들어가 본다.


낡은

책장을 넘긴다.


잠들지 않고

있었다.


음성은 옛날

병들지 않고


시간은

시집 안에

정지되어 있다.


목월 시집이다.


                    『음악이 열리는 나무』 『목월의 시집』


첫 시집 『현장』에서의 목월이 2살 아래인 황금찬 시인에게 쓴 발문(跋文)의 글이나, 『무제』라는 시에 들어 있는 절절한 우정과 존경의 뜻을 보면, 감회의 깊이가 평생 동안 얼마나 깊게 각인(刻印)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52년 강릉에 계실 때, 1953년 처음 데뷔를 하니까요. 시를 가지고 박목월 시인을 만나려고 대구에 갔어요. 문인협회 사무소인데, 남의 집 2층입니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트럭을 타고 가는데, 가다가 철사에 걸려 바지가 찢겨졌어요. 그런데 그 바지는 어떤 바지냐 하면, 광목 같은 데다가 물감을 들인 겁니다. 검정 물인데 새까맣지요. 푸르뎅뎅한 그런 거지요. 말이 아니지요. 그 찢긴 바지를 바늘이 없으니까 철사로 꿰매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꼴이 말이 아니지요.

그걸 입고 대구 시내로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 같아요. 웃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그렇게 느껴집디다. 그 집으로 찾아갔어요. 악수를 하더니 나의 찢겨진 바지를 보면서 이게 왜 이렇습니까? 오다가 찢겨졌어요. 그러니까 울기 시작합니다. 눈물을 막 흘리면서 이래요 ·····”


                                                   『공상 일기』 《나의 시화 인생》에서


최초 목월과의 조우(遭遇)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아픔을 눈물로 대변하는 모습이 처연하다. 이런 인연은 황금찬 시인의 깊은 우정이 되었고, “세상에서 나는/사람을 만났네/평생 어질게 어리석은 눈을/보았네”(『무제』)에서는 황금찬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또한 유치환과의 우정 – 서울에 사는 황금찬이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을 인솔하고 경주에 수학여행을 가면 음식을 대접했던 고마움의 우정이 순수로 포장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우정은 황금찬 시인의 다정함이 빚은 추억 일시 분명하다. 더구나 1950년 서울에 문인의 숫자가 165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시인의 관계는 친밀을 넘어 우정의 각별함이 요즘의 계산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의 특별함이 있었지 않았을까?


박목월에 대한 언급은 『성탄절』에서도 1959년 12월 24일 갈채 다방에서 시인 양명문과의 에피소드로 나타난다.

『3시 30분』에서 목월의 추억은 회상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의 이름으로 문을 두드린다.

“박목월 시집/산도화를 들고 새벽까지 않아있다. /내 젊은 날의 복장으로/구름이 찾아온다.

····중략···/그래, 좋은 생각이야/열려있던 시집을 덮었다./새벽이다./시집 속에는 어제와 오늘이 없다.”(『3시 30분』) 새벽 3시 30분은 불면의 시간이다. 물론 잠 못 이루는 시간에 과거의 우정이 상념으로 일렁이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저변에는 피할 수 없는 고독이 자리한다. 왜 그런가 하면 과거와 멀리 떠나온 시간의 간격-

더불어 우정을 나눌 수 없는 고독 때문에 과거의 집착이 나타난다. 이는 오늘을 위로하는 인자(因子)이면서 지나온 삶의 가치를 더하는 생각이 더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박목월과의 관계는 더 할 수 없는, 어찌 보면 일방적으로 정리될 수도 있겠지만 『밤이 깊도록』은 송욱 시인과의 추상을 느낄 수 있다.


송욱 시인과

강가에 않아 밤을 새운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해가

1975년 여름이다.

7월 26일(?)

···중략···

송욱이 일어서며

저 은하의 강물이 곧 쏟아질 것 같은데

그 시각이

새벽 3시 30분

그 송욱 시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공상 일기』 《밤이 깊도록》에서


시인은 정에 굶주린 사람일 것이다. 따스하고 안온함에 쉽게 잠이 드는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감동의 파동에서 쉽게 점령당하는 사람 -

황금찬 시인은 그런 정서에서 항상 갈증을 느끼는 거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평범이나, ‘기발(奇拔)함이 없는 진솔’ 혹은 ‘수월한 당신의 서정(抒情)에 압도당하는 행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격이다. 기교를 부리고, 호기와 허세 앞에 초라해지는 시가 아니라 친숙하고 다정다감한 그리고 나긋한 속삭임의 시를 쓰는 황금찬 시인의 시는 항상 변함없는 정감으로 길을 넓히는 이유 때문에 지난날들의 우정에 갈급함을 느끼는 현재가 아쉬움으로 길을 넓히는 것 같다.


『그 집 앞』은 학자 강 인산의 소박하고 어눌한 추억을, 『시인의 집』은 지금도 평창에서 살았던 김시철 시인의 경우를 『금원에서』는 화가 박수근, 손웅 성 그리고 지산 에의 추억을 애달파한다. 황금찬 시인의 시에는 실명이 많이 들어간다 운명(殞命)을 달리 한 김종문, 장호, 조지훈, 정한모, 조병화, 김영태 혹은 후배 문인들, 또는 『미완성 교향곡』에 조영숙이나 『벽시계』에 최규창이나 바이런 혹은 불란서 3대 비련(悲戀)의 아벨라르와 에로 이즈 혹은 음악가 등이 다양성으로 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혜산 박두진 둘레길 시화 앞에서]


이는 시인의 천성적인 다감 성이 드러난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굴곡(屈曲) 없이 대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으로 앞서가는 마음이 없다면 누구도 황금찬 시인의 면모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황금찬 시인은 순수하고 질박(質朴)한 인간성으로 살아온 면모가 시인의 표정이고 시의 모습이 아닐까?


2) 시의 세상 – 시의 모든 것의 상상     


상상(Imagenation)과 공상(Fancy)의 차이는 Coleridge로부터 들을 수 있는 사실 이론의 정론이다. 즉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되어 나온 기억의 형태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공상이라 칭한다면, 상상력은 1차 적인 것 -

감각과 지각을 중개시켜주는 기능으로 무의식 적인 것이라면 2차의 문학적 상상은 1 차적인 것의 변형으로 시적 상상력일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의지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라 본다.

  

물론 상상력이나 공상이 서로 연결 고리를 얼마나 유기적으로 설정하는가의 여부가 구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면, 셱익스피어는 ‘광인과 연인과 시인에 동류항을 지적하고 있음도 구분에 대한 모호성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광인은’ 아무것도 아닌데 ‘ 비해 시인은 ’ 의식적인 의지에서 차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의 시(詩)의 표정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구체화된다. 물론 조급증이나 급한 느낌의 생각은 드러나지 않지만 일종의 지향을 꿈꾸는 상상이 길을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기 성주(城主) 즉 자기만의 나라를 세상을 건설하여 그 공간에 주인이기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 -


일종의 현실을 따라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꿈을 꾸는 일 -

공상으로 시작하여 구체적인 상상의 조감도를 만들게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는 지번 도가 없었다.


나무, 풀, 꽃

토끼, 사슴, 노루,

이들의 영혼들이 세운

꿈의 세계

어느 곳에 가나

빈도가 없었다.


그 까닭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음악이 열리는 나무』 「지 번호가 없는 나라에서」에서


나무, 풀, 꽃들의 이미지는 순하고 착하다는 느낌을 준다면, 토끼나 사슴 그리고 노루 또한 착하고 선량한 비유적 인상이 겹친다. 그러나 호랑이, 사자, 악어, 뱀 등은 강하고 약육강식의 기피적 사고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상반된 개념은 전자에서는 평화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고, 후자에서는 원칙을 무시하고 ’ 내가 하늘이요/곧 법이고/내가 하는 일은 진리라고/생각하는/그런 동물들은‘ 싸움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일삼는 악의 축이라면 시인은 이런 동물들을 멀리하고, 내 것이나 네 것이 없는 평화의 공간을 염원하는 뜻을 가진다.

이런 공간을 천국, 혹은 유토피아라 칭 한다면 ’이 세상에는/지 빈도가 없다 ‘와 같이 염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마치 ’ 고향을 두고 떠났던/새들도 돌아와/날개를 펴고/구름은 국경도 없었다 ‘. 『주님의 뜻을 따라』처럼 자유 왕래의 땅을 그리워하는 뜻이 구체화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시인의 꿈인 것이다.


태평양 바다 어느 곳에

섬이 하나 솟아올랐다.

하늘 새의 오른쪽 날개만 한 터를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구름으로 집을 짓고

상아로 장식한 다섯 칸의

시실(屍室)을 꾸민다.


시인들을 초대한다.

국적을 묻고 연대를 덮는다.

소포클레스, 단테, 밀튼, 괴테

테니슨, 롱 페로우,

이백, 두보, 도연명, 말라르메,

릴케, 발레라, 아폴리네르, 북원 백추,

슈미 텔러, 서정주, 박두진, 청마,

박목월


                           『공상 일기』 「공상 일기」 중에서


무의식적인 왕래 -

즉 비현실적인 이유 -

’ 구름으로 집을 짓고 ‘와 ’ 상아로 장식한 ‘에서 현실성을 일탈한 공상의 근거가 제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꿈은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하등에 장애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국적이나 언제, 어디서 살았는 가는 중요한 조건이 아닐 수 있다. 다만 시인의 이름 -

착하고 선량한 식물이나 토끼, 사슴 혹은 노루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이기에 잘났다는 행동이나 위압적인 위협이 없는 오로지 사랑과 평화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고 노래하는 시인의 세계 -

이상을 향한 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꿈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주요 임무라면 현실성 혹은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다.

오로지 사랑과 평화의 공간을 향해 꿈을 노래하는 일이면, 인간사는 악의 땟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시인은 세계 평화의 방 그리고 인류의 자유, 절대 사랑, 핵 반대 운동과 마지막에는 모든 악을 몰아내고 하늘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다섯 개의 방에, 시인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방에서 작업을 하면 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시간의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운 선택과 주제로써 꿈을 그리는 목적에 일치하면 된다는 뜻 일게다.


왜냐하면 시인의 세계는 제한이나 구속 혹은 선택의 강요에서는 꿈의 길을 훼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공상은 허무한가?라는 의문 앞에 서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시인은 꿈꾸는 사람, 오로지 꿈을 꾸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시인에게 간섭이나 꿈의 종류를 묻지 않는다는 간명한 자유인의 해답이 도출(導出)되는 것이 아닐까 서술해본다.


3) 자연의 육화


바라보는 모든 자연과 느끼는 자연이 있다면 전자보다 후자에서 더욱 심화된 의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감의 80%가 시각에 의존하는 양이라면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우리는 흔히 과학이라고도 하고 현상적 표현이라고들 한다. 작두 무당이 시퍼런 작두날에 올라가 맨발로 서서 춤을 추는 이치나, 시인이 시의 신을 불러오는 것 – 이를 Ecstasy라 한다면 이에 대한 정확도나 과학적인 설명은 벽에 부딧 치고 만다. 때문에 눈으로 현상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심안(心眼)(mind’s eye)에서는 천리길도 투시할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마음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을 마음으로 볼 때, 오히려 새로운 것 그리고 신기한 것, 그리고 창조적인 것을 찾아내는 인간의 마음을 과학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금찬 시인은 사물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담담(淡淡)함을 발견한다. 이는 모가 나거나 각(角)이 져서 명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물을 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에서 발견되는 표현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약 20년 전 (그 당시 70세)의 시와 다른 특징이 되는 것 같다. 시(詩) 창작에 원숙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같은 논리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이기에 -


눈이 내리는 소리는

어느 마을의 발자국 소리


네가 내 곁을 떠나던 날

그 발소리 위에

눈이 내리고


어디쯤 가고 있느냐

눈이 내리는데

소리도 없이


눈은 울고 있구나

네 마지막 음성이다

창 앞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울고 있구나


                      -『고향의 소나무』 「눈 내리는 소리」

    


시(詩)는 감각의 통합 작용이 빚은 조화미(調和美)라면 편양성을 넘어선 또 다른 지평을 만나는 일이 감각의 지평을 넘는 조화(調和)의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따로따로 구분되는 의식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 속에서 다양함의 특색을 만나는 이치인 것이다.

이는 감각의 통합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혼합해서 오는 혼란을 부추기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원숙의 길이 열리면 이러한 이치는 염려를 넘어 조화를 이룩하게 된다.



시(詩)에서 결점 중 장식적(裝飾的)인 요소는 이미지의 과시 혹은 꾸밈으로 인해 시적 팽창을 방해하지만 한약에서는 독약조차 적절한 배합으로 양약(良藥)이 되는 경험의 배합은 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눈이 울고 있구나’는 시인의 마음을 의탁한 정서이고 ‘눈이 내리는 소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심(詩心) 일 때, 울려오는 조화의 소리로 들리며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달에도

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중략···

아! 달에도

귀가 있어 다 듣고 있구나

그때 은행나무가

“나도 듣고 있는데” 하는 것이다.


달과 은행나무

풀벌레 다 울고 있구나

울지 않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구나


                               『공상 일기』 「귀가 있는 달」에서


풀이나 벌레조차도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미물(微物)들에게도 사랑을 보이면 활기찬 모양을 보이고, 사랑을 갖지 않고 무관심하게 대하면 우울한 양 표정을 짓는다. 인간만이 우월한 의식을 갖기 때문에 간과(看過)하는 점 – 독선적 인간 사고일 것이다.


자연과의 대화는 인간의 언어 이전에 언어가 존재한다. 시인은 이런 언어를 이해하고 해득(解得)하는 독특한 감수성(感受性)을 가지고 있다. 꽃을 노래하면 꽃은 즐거운 표정으로 살아나고, 우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울고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은 자연과의 대화를 할 줄 아는 경지에 있다고 본다. 스승이 아니라도 그렇게 볼 것이다. 심지어 “달에 귀가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위로의 말을 찾고 있는 모습에서 그렇다는 예기다.

그렇다.


그러나 달과 은행나무 그리고 벌레조차 “울고” 있지만 울지 않는 존재는 “나 혼자 뿐”이라는 점에서 일체화를 위한 동화가 이룩되지 못했음도 있다. 왜냐하면 정서(情緖) 감염(感染)의 일치성이 안 되는 이유는 대상의 연민(憐憫)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내가 하나로 결합되는 관조(觀照)의 경지를 벗어난 것 같다. 연민은 나와 대상이 분리된 정서이기 때문이다.


4) 새, 나비, 호수


새와 나비나 호수 그리고 구름은 황금찬 시인의 시(詩)의 정신적인 흔적 물이다. 왜냐하면 자기 정화 혹은 수양의 방편이 되기도 하고 의식을 이동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어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는 자유정신의 표상이면서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하늘의 길을 만들기 때문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는 하늘의 의미와 결부되면서 신비감을 자극했고, 인간의 꿈을 실어 나르는 대상으로 미화도 될 수 있다.

그러나 황금찬 시인은 새는 과거와는 다르게 변했다. 비극의 잉태 속에서 울음을 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연세 90여 세에 이르서는 보다 진보된 영생의 이미지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새들도 늙어 가는가.

그리고 삶의 문을 닫는가.

새들은 늙지 않는다.

병들지 않고

새들의 병원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새의 의사도 없다.


                           『공상 일기』 「새들의 일생」  


스승 황금찬 시인의 작고 하시기 전시에는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는 시가 상당한 빈도로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확신하는 시어이며 여백을 줄이는 기교일지도 모르겠다. 새들의 병원을 보았는가. 아니면 새들의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여 고통 시 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러나 새들은 하늘을 나르며 자유롭게 날고 또한 세상을 유영(遊泳)하면서 내일을 맞는 꿈과 비상(飛翔)의 의미를 버리지 않는 듯하다.


이와 비교되는 인간은 병원 그리고 구원의 종교 간판이 즐비할지라도 악의 깊이는 더 깊어지고 슬픔의 넓이는 더욱 확장되는 삶에 목을 매는 인간의 욕심과 갈망 -

갈수록 희망과 사랑의 반대편이 기승을 부리는 인간사와 다른 이유는 자연과 친화된 삶을 살아가는 새들의 정신에서 영생의 의미가 도출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황금찬 시인은 “새는 무덤이 없다/공동묘지도//종교가 없는 /새의 영혼은/어디로 갈까//꽃의 영혼들이 가는/그 나라 일게다/(새)와 같이 꽃과 새의 동일성은 곧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고착되는 듯하다.


호수가 있다.

그 호수엔 이름이 없다.

해가 뜨고

별과 달이 언제나 지기만 했다.

고향과 깊이를 모른다.


내 어머니와

그분의 어머니도

이 호수에서 머리를 감고

수경 속에서 웃었다고 했다.


나는 호숫가에서 많은 사람을 많았다.

장자, 이백, 그리고 두보

박목월, 소월, 영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폴 발레리


                          『공상 일기』 「호수」에서  


무심(無心)의 호수는 관조(觀照)의 경지에서 만나는 이름일 것이다.

관조는 사고의 철저화라면 이는 구분이 없는 무경계의 경지를 가질 때, 만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의 티끌이 일렁이면 이미 파문에서 사물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왜곡되는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물을 있음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경지는 호수가 갖는 진경(眞景) 일 수 있고, 또한 호수가 누리는 호사스러운 이미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진실이 숨 쉬는 곳이기에 그곳에서 어머니의 수경을 볼 수 있고 어머니의 웃음을 발견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시인들 -

장자, 이백, 두보, 목월, 영랑 등을 만나는 절차가 호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순수에는 순수의 길이 들어있고, 바람에는 바람의 길이 있는 이치처럼 시심(詩心)의 안온함에는 그런 시인들의 얼굴이 다가온다는 길을 확인한다.


황금찬 시인의 전반적인 시의 변화는 90길로 오면서 형이상학적인 형편이 많아지는 듯했다.

지상의 메시지가 줄어들고, 그리고 철학적인 암시가 앞장선다는 뜻일 게다.

‘평화와 기쁨’ 혹은 ‘생존의 무게’ 그리고 ‘꿈의 천사’를 암시했던 70세까지의 이미지인 나비가 시 속에서 줄어들었다는 변화는 즉, 자존의 메시지가 줄어들고 평안하게 사물 바라보기라는 느낌을 갖는 것 같다.

이는 맹목의 인간 모습에서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변화의 상징이 아닐까 한다.


어느 꽃나무에서

이 꽃나무로 날아왔을까.

나비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않아있는 꽃나무밖엔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날개를 펴면

또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까.

그것도 정할 수 없다.


나비에겐 금지 구역이 없다.

이 것은 나비의 절대 자유이다.

그리고 나비에겐 내일이 없다.


꽃향기가 날아오면

나비는 더듬이를 앞세우고

따라간다.


                     『나비』 「음악이 열리는 나무」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모든 미덕을 포함하고 또 완성한 인격의 극치를 의미한다고 본다.

자로(子路) 편엔 이런 말이 있다.


원시적 인간 문명의 때가 덜 묻은 인간, 시골의 촌부 같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나비를 읽으면서 이런 원시적인 느낌이 앞서고, 여기에 곧 황금찬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 본다.

언제나 계산이 없고 누락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시인의 체취에는 언제나 믿음의 줄기가 솟아나는 듯하다.

그러나 강의(剛毅)라는 의지의 굳셈이 전제될 때라야 질박과 어눌함이 있을 수 있고, 비로소 꾸밈이 없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승을 통해 배웠으니 이 또한 필자의 큰 양식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을 한다면 방향은 있으나 방향이 없는 곳을 지향하고 목적이 분명 하나 그 목적의 길은 어디에도 없는, 오로지 무심의 경지를 찾아가는 길은 결코 있음과 없음을 나누는 일이 아니기때문 일 것이다. 적어도 절대의 자유에서는 ‘내일이다’ ‘오늘이다’의 의미는 필요가 없다는 개념 사실 논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3. Epilogue 하면서 -


추억과 지난 시간은 언제나 질 축한 정서를 이끌고 오지만 황금찬 스승님의 시는 이제 달관(達觀)의 숲에 들어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의 스승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언어에는 무게와 정서 그리고 원숙의 경지에 들면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시인의 경지에서의 인상 바로 그것이다.


길을 재촉하는 인상이나 혹은 조급증이 없는 지상의 시인은 다시 세계의 미지 건설을 꿈꾼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경지에는 아름다운 순수와 투명한 의식을 가진 시인만을 위해 문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상상으로 빚은 낙원의 이름일 때, 꿈꾸는 스승의 모습에서 숙연해진다.


자연의 육화는 대상과 대상이 경계를 갖지 않을 때 더욱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들 한다.

심지어 풀과의 대화나 새들과의 대화에서 있고 없음을 넘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지향하는 순수의 깊이를 방문하게 되는 순간, 스승인 후백 황금찬 시인은 시는 이제 그런 길을 열어놓고 손짓을 보내는 모습이 작고하신 지금 이 순간도 모습이 선하다. 자상하고 인자하고 순진무구한 모습이 구순을 넘어도 상상을 초월하는 스승의 시를 지금도 나는 시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라 불러야겠다.


2021. 05. 20.


금요 저널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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