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고라운드의 끝은?]

{돌고 도는 것은 에너지}

[필자의 한가한 모습]


돌고 돌아가는 것은, 에너지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골목을 누비면서 회전목마를 돌리고 있는 풍경이 있었다. 아이들의 잔돈을 받고 골목골목 유랑처럼 말이다.

즐거워 좋아할리도 없는 동요가 재촉으로 달려가고 재미없는 일을 무덤덤하게 또는 슬프게 돌아가야 하는 일은 생존의 문제였기에 늙은 목마의 주인은 동전 몇 잎에 시름 묻은 삶이 어스름 길이 묻힐 때까지 기다림의 여정이다. 목마의 주인은 곧 우주의 일면과 같은 사소한 비유의 이름일 것이다.

생존의 문제는 살아야 한다는 것

더러는 호사에 출렁이는 뱃전에 주인처럼 거들먹거리는 존재도 있고 또 호구(糊口)를 땜질하기 위해 여기저기 운명을 끌고 회전목마를 돌리는 운명도 있다. 이 둘을 대비해 볼 때, 삶은 모두 숙명처럼 바람에 날리는 슬픈 깃발 같은 하루를 돌려보내고 내일을 기다리면서 더러는 희망을 노래하고 또는 생의 아픔에 꿈조차 없는 어둠을 지나야 한다. 산다는 것은, 결국 살아 있어 견디는 다만 한 페이지의 풍경일 뿐이다. 세상의 삶은 중간 지대가 없다.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진행하는,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있을 뿐이라면 어느 것이든 자기 확인의 증명서는 바로 자기 앞에 펼쳐진 현실의 운명일 것이다.

시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 상상력의 그물을 펼칠 때, 표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시인은 자기 표정을 우회적인 방법이나 비유이거나 상징 등 시적 장치로 나타내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문제는 얼마나 신선한 상상력의 그물을 펼칠 것인가에 시적 개성이 표출되고 표시되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2.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시의 제목은 단언적인 진술 같지만 이 단어의 이면에는 진리가 담겨 있을 때는 긍정적인 반응을 갖지만 자칫 제논의 “나르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 ‘백마는 말이 아니다’처럼 말의 함정에 빠질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말이란 항상 변명의 통로를 준비하지만 시의 비유에는 그런 거짓의 이미지는 배제되는 것이다. 물론 시는 앰비규어티라는 특징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문화 현상은 한마디로 지구 둥근 원(圓)으로 표현되지만, 서양은 삼각형의 대립에서 출발한다. 동양은 철학이고 종합이라면, 서양은 과학이고 삼각형의 대립구조이고 그 결과는 투쟁에서 일상의 사상을 찾아간다. 이는 종교가 낳은 사상일 때, 불교적인 윤회에 따른 인연법이 적용된다면 시는 순환논법의 연결고리를 따라가는 순리적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해가 저물면 아침이 멀지 않듯

끝자락은 또 다른 시작이다.

마감이란 배다른 형제라 하지만

새 아침의 예고다


<끝은 또 다른 시작> 중


인간이 살아가는 일상은 뜨는 해로 시작해서 지는 해로 마감된다. 그 사이에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무언가 의미를 만들며 찾아가는 여정을 재촉하는 것이다.

한 해의 시작이나 섣달의 마감이나 이러한 구분이 시간 속에서 존재는 이름을 알린다. 물론 시간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고 그 개념에서 다시 족쇄가 되어 단위로 마감된다. 이런 논리가 동그라미라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떠난 것은 돌아오고 돌아보면 다시 떠나는 이치는 불가 인연의 줄기라는 점에서 카르마가 임계치에 이르면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 변화의 주기는 대체로 3년쯤이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인간의 탐구 심성이 작동된다.

여기서 자기를 깨닫기 위해 자각의 문에 들어갈 때, 변화는 옳고 바른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해가 저물면’의 가정법에서 ‘또 다른 시작’은 아침의 의미와 바퀴를 굴리면서 자화상을 만들어 가는 시인의 사고는 나이의 성숙에서 오는 성찰이 곧 철학의 옷을 입고 그의 시를 이끌고 가는 모습이 근엄해 보인다.

3. 다음 해는 여든


인간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언제나 진행형이다. 그러나 시간의 등을 타고 오른다 해도 결국에는 시간 속에 존재로 마감된다. 결코 시간을 정복한 인간은 없다.

중국 진시황도 나이 50에 운명을 다했고 불사의 염원이라는 일화에 매몰된 존재 아니었던가?

그가 사망한 지 4년 후 진나라는 허무하게 망했다.

결국 산자는 죽고 영혼의 여행을 떠나는 또 다른 길이 이어진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자각의 문제일 것이다.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에 별짓을 해도 이 소망의 부수적인 문제는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가 따라온다. 이 사실은 결코 가벼운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또 오랜 세월 산다 해서 축복이라는 것 또한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면, 오래 사는 것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구글에서는 인간의 나이 700살에 도전하는 실험을 하고 있고 작금에 의술의 발달로 100세의 나이에 운위(云謂)가 넘치는 말로 횡행하고 있다.

정말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일 까는 글쎄올시다?이다.

금세 반짝 빛나던 밝은 햇빛들

이내 고개만 돌려도 깜깜해진다.

반짝 깜박하던 일상이 깜박 쪽으로 더 많이 기운다.

제일 겁나는 건 여자를 만나는 일이다.

-중략-

혼자 사는 몸 궁금해 여자들 살아줄까?

문 열고 삐죽 고개를 들이밀고 기웃거리다가도

송장 치를 일 있냐며 냉큼 돌아서는 여든


<다음 해는 여든> 중


종심을 지나 여든의 입구 쪽에서 외로운 처지를 암시하고 이 암시에서 오래 사는 것에 대한 염증이 일렁인다. 여자를 만나는 것은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알아차린 여자들은 ‘송장 치를 일 있냐며’ 세태에 여든의 탄식이 괴로운 함정이다.

오래 살아 행복이라는 말은 ‘적당’의 임계치에 이를 때 어쩌면 아쉬움의 느낌이 있을 때를 적당의 한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노년은 의지의 버팀목이 부실하고 이로부터 다가오는 시련은 오래가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새로운 고통으로 옷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문 열고 삐죽 고개를 들이밀고’ 돌아서는 여자들의 모습을 탓할 수만은 없다. ‘송장’이라는 마지막 종점 앞에 이른 승객은 내려야 하고 영영 작별을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반짝’ 빛나던 맑은 햇빛들이‘ 홀연 지나간 허무가 나이의 함정에 빠진 자화상을 돌아보는 시인의 처지가 그만의 처지가 아닌 오래 사는 것에, 대한 고독의 발성인 셈이다.

4. <빈집>


세상은 비어 있기 때문에, 채우고, 수레바퀴는 비어 있어 짐을 실을 수 있고, 교실은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다.

노자 11장에 보면 <서른 개의 바퀴 살이 한 바퀴, 통을 함께 한다. 그 없는 것을, 맞아 수레로 씀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비울 줄 알면 채울 즐 알고 채움에는 떠남이 있어야 자연의 이치에 충실할 수 있다는 논지로 보면 비어 있음은 새로운 전기를 맞아드릴 여지를 갖고 있다는 진리이다. 無에 用은 虛實(허실)의 방법이지만 동양의 사상은 이런 철학에 자연의 원리를 대입할 때, 비로소 철학의 길이 열리는, 곧 인간 삶의 길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비유는 물상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의상을 갈아입는 해석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간격이 넓을 때, 새로운 언어 탄력과 의미의 신선함을 줄 수 있는 비유에서 시인은 사물의 통찰법에 남다른 표현의 묘미가 있다.

빈집이다. 산들이 살다 가고 강들이 살다 가고 나무와 새들이 살다 가고

사람도 살다 간다. 주인은 없고 나그네만 와서 살다 떠나는 집 세상이라는 큰 빈집

<빈집> 중


(빈집)이 곧 (세상이다)로 만들면 수미쌍관의 기법이다. 그사이에 왔다가는 것들 산이요 강이요 사람이요 자연 현상에 내재한다.

주인은 없고 오로지 나그네의 모습들이 왔다 갔다 하는 무대 위에는 허무 의식이 자리한다. 무엇이 존재인가? 그리고 무엇으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은 의문을 앞세워 자기 철학의 묘미를 시로 확대한다. 때문에, 성경에는 허무 즉 vanity라는 말이 정곡에 찌른다. 니힐(nihil)(허무)(무가치)이란 곧 삶의 표정을 관리하는 말이지만 궁극에는 고백임도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나그네요. 그 조연의 임무에 충실하려는 자발성이 있을 때, 깨달음의 길은 인간화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빈집을 일구고 가꾸면서 일생을 산다면 그 집의 주인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영원한 나그네의 숙명을 고달프게 지나야 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시의 이면에 깔아놓은 포장지를 들여다볼 줄 아는 독자의 안목이 곧 바른 삶의 모습이라는 충고가 될 것이다.

5. 죽은 자의 소네트


가장 퇴폐적인 시를 지적할 때, 박종화의 <사의 예찬>을 거론한다.

5연으로 된 긴 시에서 가히 죽음의 예찬이다.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말없이 주로 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이곳에 생명이 있나니/이곳에 생명이 있나니/장엄한 칠흑의 하늘 경건한 주토적 거리/해골!/버쩍이는 이곳에 있지 아니하랴./아. 그렇다. 영겁 위에’는 1920년대 한국 낭만주의와 세기말적인 퇴폐 시로 언급이 된다.

시는 고통에서 희망과 꿈을 전달하고 말하는 일이지 죽음에 진리를 발굴하는 경우는 산자의 무가 아니다. 이점부터 박종화의 초창기 문학은 실패의 단서를 달아야 한다. 시는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나열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사랑과 꿈을 지향하는 노래라야 시인의 임무는 완성된다는 필자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네 심장은 타조의 깃털보다 무거워 괴물 암뮤트가 집어삼켜 버린다.

이승과 저승 사이 배를 타고 검은 밤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심장의 무게를 달고 있는 오시리스여 죽은 자들의 왕국에서 영원히 살게

무덤 속에 평소 즐기던 악기를 넣어주오

몸은 새의 모습으로 하늘을 날게 하라

나일강물에 몸을 씻는 영혼이여 나의 좋은 집에서 영원히 살리라

<죽은 자의 소네트> 중

고대 이집트의 신화로 명계의 신인 OSIRIS의 세계 안에서 ‘영원히 살게 즐기던 악기를 넣어주오’에서 박종화의 사의 예찬과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더불어 그 세계가 ‘나의 좋은 집’으로 가는 길은 암뮤트가 집어삼킴으로 시작되는 죽음의 여행길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배를 타고 지하 세계인 하데스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오리시스를 만나야 하고 이 숙업의 무게를 달아 통과하면 바로 죽음의 길로 세계 내 존재로서 ‘영원히 살게’의 소망을 펼친다.

죽음의 세계 또한 현세와 또 다른 개념의 공간인 셈이다.

그곳에서 영원을 누린다는 것은, 햇볕의 세계와는 다른 개념의 세계이기 때문에 미지로 남겨두고 모두 두려움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무섭고 어둡고 또 가고 싶지 않은 개념이지만 시인의 사고에는 ‘나의 좋은 집’으로 생각하는 길이 시인만의 설정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유독하다.

sonnet는 작은 노래라는 의미의 정형시를 의미한다. 14행으로 구성된 엄격성의 시를 도입함으로써 죽음에의 엄격성이 오버 랩 되는 노래에서 또 다른 삶의 한 면이 시의 이면을 장악하는 시인의 속뜻으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라 아니할 수밖에 없다.

6. 환생


살아있는 자만이 죽음을 안다. 죽음 저편에 있는 개념 때문에 오늘의 생애 충실할 수 있고 또 의미 부여하는 생의 걸음이 도출되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사고에 따라 설정의 길은 달라지겠지만 현생에 충실함이란 곧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차린 의미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주의자는 언제나 현실에 믿음을 갖고 살기 때문에 그 생의 표정 또한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한 생을 살기란

얼마나 두려운지

이 어려운 인생길을

어찌 두 번 다시 가랴

환생을 믿지 않는

내 믿음이 든든하다

<환생>

오늘을 믿는 현실주의자의 고백은 종교적인 것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시련의 시간 속에서 다음 생의 믿음이란 ‘어려운 인생길’을 어떻게 두 번 갈 수 있을 것인가에 한계점에 설정이 명확하다.

때문에 시인은 오로지 오늘에 충실하고 열성적일 때, 다시 환생하는 의미에 부정적인 사고를 갖고 지금에 든든한 믿음을 보내는 현실주의자의 고백이 토대를 구축하는 인상을 주는 것인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라고, 확고히 믿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6.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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