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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부재한 풍선 정치]

«포용 정치를 하라»

[금요 저널 주필/칼럼니스트/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문학은 모든 사회를 수용하여 표현의 길을 만드는 거울이며 변명과 오만은 작은 종지에 억지로 많은 것을 담아내는 그릇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 세상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행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철학을 겸비하고 공정과 상식을 통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니 바른 것 혹은 옳은 것을 추구하는 합리성에 기준을 잡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간섭 없는 조직이 가장 정직한 일이라도 조직의 시스템은 가장 선명하고 투명하게 운용해야 국민이 따르도록 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으며 자기들만의 정치를 한다면 분명코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요란하고 갈지(竭支) 자를 간다면 그 사회는 혼란과 증오만이 부추기는 역할이 될 뿐이다. 여기서 간섭하고 제한하는 일은 필시 더 큰 충격을 주는 일인 것이다.

당장 세상의 발전이라는 미명에 조건을 만든다면 법전의 두께는 형언할 수 없는 연출하게 될 뿐이다. 아나키즘이란 말에 매력을 갖는 경우들이 많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공간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3명 이상 모이면 의견의 불일치는 이상을 현살로 바꾸는 소란이나 이견이 승하고 장구하다


이상적 정치란 참으로 어렵고 난해한 것은 사실이다.

문학의 어원은 여러 가지 형태이다. 문학의 삶은 재현이라는 말도 있고 에이브럼즈의 문학을 예술의 형식으로 정의도 하며 심리적 욕구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또한 정치의 어원을 보면 중국 사서삼경에 호흡 정치라 하여 바르게 살기 위해 일을 하거나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이라 했다. 한국사야 대한 미국 국민, 투표할 권리, 등 다양하다. 요즘에는 펜덤(상대를 부정) 정치와 반지성주의(이 말은 처음 사용자는 미국 역사가 리처드 호프 스테 더다)(지성주의 반대말)라는 말도 자주 한다. 물론 개인의 사고 철학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개인적으로 말은 한다면 철학이 없어서라 말하겠다.


철학의 어원은 지식(philo)을 사랑한다(Sopy)는 말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무엇일까? “아는 것”에 좀 더 나아지는 체계적으로 아는 것 것, 혹은 엮은 것이라 말하면 틀린 말일까. 법철학, 인생철학, 혹은 감정 철학, 경험 철학, 교육철학에서 전문적인 분류로 스콜라철학, 선험 철학, 초월 철학이나 동서양을 갈라 서양철학, 동양철학, 등 이해 난감의 분류가 너무도 헷갈린다. 이렇게 분류가 많다는 것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복잡하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해석이 많을 수 있다는 뜻도 내포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철학이 단순화할 때 한마디 정리는 없을까?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객관적 나를 낮추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 잠시라도 있을 수 있다면 혼란의 소용돌이는 없을 것이고 사회는 편안한 표정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 갈수록 일그러진 표정이 다양이 요즘 실상이다.

세상이 갈수록 어지럽고 복잡한 미로의 행로를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서 살아가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


개인적 주장들이 목청으로 둔갑하여 더 크게 높이는 높은음의 마지막은 찢어지는 비극이 예정된 것처럼 막다름을 질주하고 있으니 참으로 난맥상이 아닐 수 없다.

내 철학은 지고지순(至高至純)하고 남의 철학은 개똥으로 버려야 한다는 오만의 질주가 너무도 심하고 독선의 칼날은 타인의 가슴에 비수(匕首)를 품게 하는 악순환의 맴돌이 현상이 증가폭을 가파르게 높이고 있다. 이런 징후는 사회 전반에 널리 포진하고 특히 정치판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으로 강한 방어막을 치고 내가 권력을 잡으면 상대는 죽어도 좋다는 포용 없는 뒤 케기의 행렬이 고구마 줄기를 끌어올리는 형상이 악순환의 부메랑이 될 것 같다.


정치는 바른 것을 추구하면 모두가 응하는 일이라면 진보와 보수 혹은 우와 좌의 분류가 가져오는 비극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철학 부재의 심각성을 보증하고 있다.

이견(異見)이 있을 때, 이를 화합하고 조화하는 것은 집권의 철학이 있어야 하지만 오로지 내편과 내 것을 많이 확보하려는 일은 결국 언젠가는 수렁에 빠지는 탄식을 불러올 뿐이다. 이런 기저(基底)에서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무한 파급을 사회 전반에 갈라 치기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여당이 야당이 된 부류들은 개판 오 분 전으로 당권 싸움에만 열을 올리고 있고 야당에서 여당이 된 당은 젊은 당 대표가 성 상납을 받았으면 조속히 내려오지 않고 이 사회를 흐리고 있으니 정말 가관이다


문학의 판도 혹은 노조의 판도 아니면 교육의 판도 등에서 어느 하나도 철학의 본질에 다가간 경우가 없는 우려가 심각한 상태이다. 철학이라는 말이 개똥으로 굴러 다니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자기 고민이 없는 세상인 듯하다. 남의 것만 보이고 자기 것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에 나타난 현상이라면 이는 합리성 아니 이성이 실종된 아우성 세상 아니겠는가?

산에 오르면 길이 하나가 아니며 다양한 길이 있다. 그 다양한 길로 올라가 정상에서 만나는 즐거움은 모두의 것이 되지만 사회가 철학이 운용되는 이름일 것이라면 철학은 자기를 찾고 자기를 돌아보는 아주 쉬운 길이 있을 뿐이지만 자기 자신을 감출 때 결국 자기가 사라지는 비극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 그런 정치꾼들-

상층부 권력층이나 지식인부터 문제가 심각하다. “너는 나의 타도 대상 즉 나의 적이다.”라는 명제에 충실할 뿐 너는 나의 동지 혹은 친구라는 명제는 없는 듯하다.

지식인들의 머리에는 자기 영달과 출세, 부유, 목표만 있을 뿐이지 넓게 바라보는 시선의 확보가 없기에 흔들리는 멀미만이 아플 뿐이며 이를 바로잡는 어른의 부재 혹은 자기 수양의 철학이 사라진 허무에서 맹목의 질주만 있을 뿐-

자기부정의 회의가 절망을 낳을 것이다.

이에 처방전은 자기 찾기, 양보하기, 상대방 이해하기, 배려 밥법에 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면 문화는 사회를 담아내는 척도의 온도계가 아닐까?


현대문학의 경우 대부분이 대립의 각을 세우면서 이익 쟁취의 수단을 동원하는 일로 지금까지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익의 본질은 무엇인가?

돌아보니 자기를 잃어버린 허무 이외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는 문학의 본질이 사라지고 오로지 너와 나의 삿대질이 지금까지의 현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문학을 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토양은 아니라는데서 더욱 심각하다는 뜻이다.

자기를 깨닫지 못하고 우둔의 실마리는 문학의 표현미에서 철학의 수립이 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쉽게 함정에 빠지는 비극이 온다면 지금의 우리 문학 풍토는 그런 위험 중심에 있다.


흐린 흙탕물이 자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물이 담긴 모든 영역에서 일어날 때 비로소 공간의 물은 정화 혹은 깨끗한 풍경이 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 한번 돌아보자 윤석열 정부가 들어 선지 2달 반이다.

첫째 – 정부가 들어서면 허니문이라는 과정이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때 묻은 자신들은 보이지 않고 남의 잘못만 보이는 것인지 백골난망이다.

둘째: 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의 전쟁 관계와 코로나 정국에 세계적 이상 기후로 인하여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외환위기 이후 소비자 물가가 23년 만에 6%로 뛰었고 1분기 국민 고통지수가 10에서 7%라고 한다.

코로나 펜더믹 상태가 어제는 또다시 1만 8천 명이 나오고 있어 안심할 때가 아니라 한다.

더군다나 마이너스 성장에 국민 모두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 시국에 민노총은 자기들 이익에 결사적 항의 시위를 하고 국민의 지팡이라는 허울 좋은 경찰은 검 수완박으로 인하여 많은 권력을 손에 쥐고 놓지 않고 싶다고 삭발을 하는 등 참 막가파식 행동을 하는 데에 국민들은 무더운 날씨와 함께 짜증만 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한 치 앞을 모르는 정세를 국민들이 알고 느끼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총체적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 왼손과 오른손은 몸의 일부지만 따로 떨어진 존재물이 아니라는 자각을 앞세울 때 너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자기 문학에 철학을 넣고 자기가 소속된 단체에 철학을 세우고 자기가 리더라 한다면 철학을 갖고 타인을 대할 때 중심적인 사회는 균형의 균형이 유지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한 곳도 이런 대척(對蹠)의 경우에서 왜 너는 나와 다른가를 따질 뿐 너는 나의 일부라는 의식이 없는 쪼개기의 아니 갈라 치기의 현상에서 당면한 비극에 길을 잃어 헤매는 일이 자심(滋甚)함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위대한 국민이다. 윤석열 정부가 경제에 올인하겠다고 하니 각종 매스컴과 언론은 연일 귀가 따갑게 소식을 전하고 있는 난장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노니 제발 만시지탄(晩時之歎)이 되지 말고 대척에 서 있는 모든 점 등을 낮은 자세로 임해주기를 바라며 정치하는 정치꾼들과 사회에 모든 지식인 등은 자각하고 능동적 태세로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하겠다.


2022. 07. 06.


금요 저널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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