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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글 맛이란?]

<운위(云爲)의 가치>

[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요즘 현실은 각종 언론매체 포털에서 광고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유명인들의 광고 선전으로 그 사람의 1일 광고료가 얼마다 하면서 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시대이다

BTS가 광고를 올리면 그 회사는 대박이 난다는 말까지 하고들 있으며 세계적으로 탑에 올라 국가의 행사를 홍보하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그 맛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맛이란 말이 비단 게 맛만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두루 통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던 함축의 의미에서 오랫동안 각인된 광고 효과이다.

간단하면서도 연관성이 있는 이미지 광고는 성공할 수 있다고  어느 광고 업체의 임원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가장 흔하게 들었던 말 중에 어릴 적 어머니 손맛이란 말을 자주 듣고는 했다.  

아무튼 어머니가 해주시는 손맛이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이 있다고 필자는 확실히 믿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어린 날부터 익혀온 입 맛을 기억하는 생체적인 기억력 덕택일 뿐만 아니라 이유식 무렵에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에 대한 뇌의 기억이 나이를 들어서도 역시 좋아하는 음식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각이나 후각 등 오감의 기억은 가장 가까운 이유가 들어있을 수 있다는 생태적인 근본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평생을 좌우하는 행동의 표본이 될 것이라면 인간만의 경우가 아니라 동물 혹은 식물에도 그런 기미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햇살에는 환호하고 비바람이나 눈보라에는 움츠러드는 일들은 비단 동식물만의 경우가 아니라는 점에서 애정으로서의 시선은 남다른 결과에 이를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경우 애정은 좋아한다는 말의 포괄적인 의미일 것이고 이런 Love나 Like가 유사하지만 엄정하게 따진다면 좋아함에서 사랑으로 진전하는 경우가 정상의 예가 될 듯하다.

모든 일은 좋아함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절차를 수행할 때 원만한 결말이 될 것이라면 문학 도 이러한 경우에 포괄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학이 전부인 필자는 넘어가는 이제야 문학 맛을 알겠다. 물론 속도감이나 긴장에 견디는 일이나 이미지가 떠 오른 경우 표현으로 직행하는 일들이 맛깔스럽다는 경지에 도달한 스스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런 인자를 끌고 오는 원인이 있을 것-

늘 문학을 좋아하고 끈기를 투여하는 일이 싫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맛으로 승화하는 것을 설명하게 된다.

더불어 교정(敎正)의 기회가 매우 빠르게 단축된다는 점을 더할 수도 있겠다. 문학 작품을 완성하는 일이나 수필과 칼럼을 끝 내기하는 속도가 과거에는 지지부진하고 껄끄러웠다면 원숙을 방문한 것 같은 현상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이다.

필자가 하루에 양산하는 일이 좋은가 아니면 명작인가는 중요한 의미가 아니다. 날마다 일정한 속도로 양을 생산하는 일이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하다는 식의 자화자찬이 물드는 풍경을 연상하는 일이다.

아마도 폭염에 입추(立秋)도 지나 조락(凋落)의 단풍 숲이나 아니면 황혼의 아름다움을 연상하면 넘어가는 시절에 우산을 쓴 모습은 기진한 나이가 될 것이지만 나는 비교적 문학에 빠지는 하루하루가 재미를 맛본다고 하겠다.

이런 호사 취향은 문학을 알고 난 나의 행운이라는 수식이다. 물론 얼마의 시간이 하여야 할지는 신의 손가락이 부를 때 알게 될 일이지만 아무튼 부지런을 떠는 이유가 시켜서의 맛도 아니고 자발성에서 나오는 일이기 때문에 나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내 글 맛을 아느냐”를 소리친들 누구도 호응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지만 나의 문학 생산은 더욱 왕성한 속도전을 즐기는 오늘이 무척 다행스럽다. 임플란트로 치과의 문턱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는 시간이지만 세월의 시간임을 어찌 외면하리오.

아직 문학에 대한 왕성함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소득이 있다는 것은 내가 여유롭게 하루를 사는 이유 중에 가장 즐거움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얼마나 명문의 글인가는 따질 이유가 없으며 허접쓰레기를 모으는 일도 부지런해야 하고 그래야 많은 소득에의 즐거움을 갖는 이치가 필요할 뿐 그다음에 얼마나 좋은 글인가는 읽는 독자들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아마도 날마다 오로지 문학만을 생각하는 집중 사고가 낳은 아름다움이라면 얼마든지 스스로를 부끄러움으로 표현할 겸손은 아닌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만 내 삶에 가장 빠르고 깊이가 넘치는 문학 출간의 완성한 한 해로 기억될 것 같은 이유에서 시간이 허락되는 글맛을 느끼면서 그날까지 즐겁게 상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당신들이 나의 글맛을 아느냐?』”가 필자의 유일한 임무요 핵심가치라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2. 08. 09.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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