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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으로 사는 사회】

『인간관계의 정』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정(情)이란 사랑의 정이 있고 가족의 정, 그뿐만이 아니고 우정의 정, 또는 지식과의 관계도 정이 들어 있어 이것이 인간관계를 묶는 끈이 된다는 생각이지만 그뿐만이 아니고 인간사에서 정(情)이 있느냐 없느냐의 처지에 따라 망망할 수도 있고 끈끈할 수도 있다는 말에 긍정적일 것이다. 사실 부부의 관계는 사랑만으로 살까 아니면 정이라는 묶음에 딸려가는 일일까를 생각해보지만 젊은 날은 죽자 살자 사랑이 끝없이 이어지는 환상이지만 그러나 정신없이 살아야 겨우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시절에는 사랑도 그렇게 바쁘게 지나게 된다. 이런 시간이 어언 십수 년을 넘어 아이들의 정이 깊어지고 여기서 부부의 정은 삼각형-


아이들과 아내와 나와 서로의 관계를 맺어지면서 자잘한 일상이 삶의 끈을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내와의 정이 또 다른 변형이 자식과의 정이 되는 듯하지만 부모가 늙어 자식이 책임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 과정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부모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한다. 그래야 조건 없는 사랑이 이어지며 맹목의 사랑이 정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한 가정의 울타리는 보다 든든하고 공고한 성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은 자식과 정과 부모의 정을 이어가게 하는 역할 소진할 무렵까지 청춘을 지나 장년 그리고 노년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오래가는 에너지는 아니다. 사랑의 본질에 이어지는 요소가 맺어질 때 비로소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는 시련의 길을 지나 비로소 온화한 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젊은 사랑은 바다의 격렬한 파도와 같고 자식과 부모와의 정은 흐르는 개울 물소리와 같고 늙어서의 정은 실개천의 흐름처럼 면면히 이어지는 흐름이 아닐까?

사실 자신이 생각하는 의지로 이루어진다면 인생의 굴곡은 없으리라-

부모를 책임지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아내와의 이해 상충은 꼭 짚고 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부간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요즘 현실이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 가족 세대가 아니라 핵가족 세대이다 보니 자연스레 부모나 자식이나 가능하면 따로 살아가자는 추세이다. 이것이 현실이며 많이 힘에 겨웠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필름이 돌아간다.


또한 우정은 삶에 스스로를 알게 하는 요소이며 어린 날 골목에서의 친구는 온 삶을 지탱하는 긴 강물이라면 결코 성난 파도가 아니고 깊이로 흐를 때 따스함을 느낀다.

학교 시절 우정은 전 생애의 에너지 공급의 원천이고 늙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끈끈함을 유지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직장의 우정은 전혀 다르다. 함께할 때는 가까울수록 있지만 대체로 직장을 떠나면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의견의 일치 혹은 직장의 분위기에 동질성을 갖는 사람과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점에서 이별의 순간의 끝나는 정감만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진수는 종교의 경우도 될 수 있지만 종교는 맹목의 감정 투사의 현상이기 때문에 사랑의 정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모를 향한 마음은 가장 진솔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아내와의 정은 선택적인 경우이고 부모의 처지는 필연의 관계이기 때문에 일평생의 숙제이고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인간은 정(精)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우정이든 사랑의 정이든 그리고 직장에서 맺은 정감이든 누구나 이러한 상 호간 연결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한 일이기 때문에 어떤 관계로 유지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항상 유념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홀로 고독의 섬이 된다한들 삶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보다 원활한 삶의 요소가 될 것이기에 자기 성찰의 일상이 필요하다.

젊은 날은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비교적 짧고 점차 삶의 원숙과 더불어 인간관계의

넓이를 가지려는 때쯤에는 갈증을 느끼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성격의 원활히 곧 인간관계의 넓이를 갖는 일은 당연하다.

이는 성격이 만드는 원인이지만 직접적으로는 얼마나 성품이 부드럽고 친화력을 갖는가의 여부가 노년의 외로움을 완화하는 원인이 될 것 같다.

물론 서로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정의 유지는 시간을 넘어가지만 칼칼하고 지나친 정확성에 이르면 대면하기 싫은 이유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부족해서는 친근히 다가오는 경우도 있고 너무 부족하면 바보의 칭호에 이르고 또 너무 정밀하고 정확하면 오히려 약간 부족함보다는 더 멀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인간의 정감은 적당이라는 말에 방점이 찍힌다.


관계와 관계에서 “너무나 부족을”원활하게 정리하는 라인에 이른다는 것은 심성과 품성이 좌우하는 일이 바닥을 채우는 중심축이 될 수 있겠다.

인간의 정은 항상 갈증이 있지만 남에게 줄 수 있을 때 오히려 다가오는 이치를 아는 것은 고독과 관계있는 요소라서 섣불리 단언적으로 말하기는 지난(至難)하다는 생각이다.

고독한 선택이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어떻든 정의 유지를 위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네임인 것 같다.


사실 부족과 배려, 양보를 아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갈증 현상은 더 많은 에너지의 공급을 위해 노력하고 겸손하고 고개 숙이는 삶의 동력을 갖는 것은 이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것은 찰나이고 다가오는 것 또한 그렇거늘 이 중심에 선 존재자의 자세는 더없이 중요한 몫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결국 자기는 자기 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적정의 수위를 유지하면서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피는 늘었지만 정작 그 부피의 채워진 정(精)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불관언(吾不關焉)이 아니겠는가?

소 귀에 경읽기란 말이다. 네게 필요한 말들을 작품 속에서 발췌하여 머리에 저장하여 고난의 시절을 추억으로 삼아 아름다움으로 남고 싶다. 늦었지만-


어쩌다 무작정 읽어온 수많은 책들이 내 삶의 모든 것을 위로하는 목록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을 보며 정(精) 알고 나를 위로했다면 이젠 글을 쓰는 일이 전부이기에 내 삶의 처지에 소화제 같은 구실을 다함에서 의미의 정을 나누고 싶어 진다.


2022. 08. 06.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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