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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질서를 지켜야 한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정치』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화연구위원]




우리 속담에 알찬 내용이 없으며 아무 소득과 명분이 없을 때 앙꼬 없는 찐빵이라 한다.

그리고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도 있으며 옛날 격언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요즘 정치를 보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듯이 딱 맞는 말이 아닌가 한다.

세상을 사노라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여일 하게 자기를 수양하고 다듬지 않는다면 누구나 빈 수레가 요란한 운명은 직면하게 된다.

삶의 어려움이 따른다는 말도 이런 이유라면 일관성 혹은 신념의 유지가 필요한 근거이다.

그러나 사노라면 바람에 휩쓸리고 비바람에 엉망이 되는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 앞에 망연함도 사실이지만 여기서 꾸준히 일관성의 유지가 절대 명제로 대두되고 이럴 때 존경의 이름이 따라올 것이라면 삶의 가치가 연결된다. 핵심 가치를 내팽개치면 악동이거나 망나니라는 이름이 붙게 되고 결국 나락의 방문은 필연이기 때문에 자기를 세우는 일은 언제나 게을리할 수 없는 덕목이라야 할 것이다.



개인도 이러할진대 한 나라의 국가는 어떠하겠는가?

백성은 정직과 질서적 사회를 지키려 하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 하나 정치가들은 온갖 권모술수와 위선으로 사고의 구조적인 형태로 굴러가고 있으니 참으로 이율배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당은 여당대로 중심도 잡지 못하고 갈지자를 걷고 있으며 야당은 야당대로 요란한 소리만이 들려오는 요즘 현실에 외면이 전부이다.

모두가 엘리트의 질을 파괴하는 점에서 우둔(愚鈍)이 파도를 치고 있고 사회질서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사회로 고착되는 현상인 것 같아 한탄이 고작이다.


오히려 정의보다는 권력에 아첨하는 풍토나 센 자들의 정의를 쥐어 준 비평 없는 가치의 문제와 후안무치 궤변으로 혼란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가 틀린 것인지-

문제는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한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데 문제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의 단절이 소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깊이의 심각성이다.

소통의 단절과 외면, 무시하는 풍조는 자칫 편견의 늪에 빠질 염려가 있다는 데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모두 소통하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역린이 아닌 사회 혹은 각 집단의 정치인들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나라를 위하고 사회정의를 위한 희생정신이 필요한 시대로 또한 자신을 위한 명목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새로이 들어선 윤설 열 정부는 법대로 하는 정치를 하겠다. 하였으나 법치와 정의, 그리고 상식은 언제나 가능할지는 글쎄올시다이다.

사실 법은 어디 갔고 공정, 정의, 상식이 뒤집히는 관용의 남용에서 질서를 잃어버린 집권자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임시로 모면하면 된다는 일종의 단면적 집권자들의 행위가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직접 요소의 결말이었다는 말은 틀린 말일까?   

    

언제나 사회는 구조적인 면에서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소설에도 질서의 원리가 작동하고 시에도 비유의 원리가 있어야 하고 의미가 구조로 나타나듯 모든 자연현상조차 자리의 위치를 갖고 또 그런 일을 위해 때로는 투쟁하고 다툼일지라도 결국에는 법, 공정과 정의와 다름이 없다는 뜻이 마지막 진리의 종점이다.

질서라는 것은 나의 질서를 위한 일이며 돌고 돌아도 자기의 영향으로 다가오는 파도 이치와 같다.

갈등의 사회를 부추기는 목적이 자신들의 이기에서 온다면 심판을 받아야 하며 특히 정치판에서는 이러한 몰상식이 너무 심하게 노, 증 되는 현실에서는 백성들만 피해를 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야당이 여당이 되었을 때 여당이 야당이 되었을 때 서로 말들이 달라지는 면면을 보면 도무지 이해 불가이며 머리가 아프다.

사회질서도 자연 순환과 같이 인간사도 돌고 돌아 결국 종국에는 제 자리로 다가서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가장 어리석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익을 앞세워 욕심이 빚는 탈선이고 이는 곧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영달 또는 자기 정치 또는 집단 패걸이의 하수인이 된다는 불행은 제 자리를 잃고 사는 방랑자의 슬픈 모습과 다름이 없어 보여 안타깝기만 한 것은 나만의 일일지는 물음표이다


마지막으로 호소하노니-

어둠의 장막을 거두면 누구나 무의식의 강물에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기에 얼마나 가리고 얼마나 위장하는 가의 여부가 있을 뿐이지 근본에 이른 원소는 같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동서양의 차이는 이런 근본에서 표현 방법이 다를 뿐이지 본질로 들어가면 차이도 없을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

하얀 여백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걸 생각해 볼 것이라 망상의 배를 띄우니 재미가 쏠쏠하다고 할까?

망상은 좌와 우가 없이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이만 나가려 한다.


2022. 08. 05.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이승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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