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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중구삭금(衆口鑠金)으로】17

«백성의 소리가 진실이다»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흔히들 우리는 여론은 날씨와 같다는 말을 많이 이용한다.

여론이란 수시로 변하고 늘 분석하고 여론을 무시하면 바보 정치를 한다고 비난들 한다.

중구삭금이란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백성의 입은 쇠도 녹인다는 뜻이다. 아마도 론이 무섭다는 의미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삼국유사> 수로 부인 조 <헌화가(獻花歌)>에 이은 강릉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을 때 동해 용왕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덥석 안아서 용궁으로 납치했다는 <해가사(海歌詞>에 들어 있는 기록으로 절망의 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을 예를 들자면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인을 납치한 죄 너무도 크니 내놓지 않으면 붙잡아 구워 먹겠다. 는 노래가 각 골목골목에서 울려 퍼지자 동해 용왕이 수로부인을 남편 순정 공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故人有言> 중구삭금(衆口鑠金)이란 즉 뭇사람의 입도 녹인다는 뜻이라

요즘 말로 하면 여론의 무서움을 신라시대부터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그 옛날 왕은 백성을 위해서 있는가? 아니면, 백성은 오로지 왕만을 위한 일인가는 전적으로 집권자의 태도에 따른 일이지만 적어도 왕권의 전제는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말은 고래의 사실과 부합한다.

백성이 없는 왕이 무슨 소용인가?

정치가들은 선거 때만 되면 표를 주십사 구걸하는 일로 주민들에게 허리를 굽혀 애걸하는 일은 흔한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온갖 술수로 위장의 막을 치고 숨바꼭질을 한다.

선거 때면 시시로 발표되는 여론조사의 발표는 일희일비의 경우는 잘 아는 일이고 이젠 익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의 선거란 결국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근본이지만 아직도 패거리로 몰 다니며 과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위풍을 떠는 것인지 가관이 아니다. 또한 선거만 끝나면 의원님 나리들을 언제 보았는지 모를 정도로 문턱이 하늘이다.



여론은 날씨와 같다고 같다. 그러나 이른바 『카더라』처럼 증권가의 낱장 광고에 떠돌이 말을 모두 믿는다면 황당한 질서의 혼란이 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황당이라는 것은 명예를 어지럽히는 일이어서 한 사람의 고귀한 명성을 하루아침에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죄목이 될 것이지만 헛소리의 집합이 극심한 것은 작금에 SNS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악성의 댓글들은 정신계를 어지럽히는 중구삭금(衆口鑠金)이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라는 이름에 도전하는 도덕불감의 잘못일 수 있다는 일로 볼 때 무서운 개인의 파멸을 가져오는 경우가 너무 심하다. 순식간에 퍼지는 악성의 소문은 걷잡을 수 없고 또 진실게임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당하는 상대방을 생각하면 회복 불능의 아픔을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론이 무섭다는 말이 현대에 이르러서 위험의 수위를 연출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고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현실이 작금의 현실-

개 딸이니 무슨 개조 카니 하면서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여론을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소문이란 너무도 빠른 발걸음으로 달아나고 이를 붙잡는 일은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사회라는 것은 도덕적인 양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물처럼 펼쳐진 법이라는 룰이 있지만 이도 일일이 간섭으로 정립한다는 일은 지난(至難) 하기 때문에 도덕을 강조하는 일이 타당할 것이다.

언론이 이를 바로 잡아야 하지만 언론도 등급을 매겨야 하는 난립이 오히려 민주노총, 언론노조, 공무원노조 등이라는 단체가 세상을 흔들고 있으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회는 복합적인 문제를 수용하는 세력이 얼마나 건전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 사회의 건강성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기에 어떻든 여론은 자고로 지도층을 괴롭히는 일이지만 국가라는 큰 구조로 볼 때는 발전에 따른 견인의 요소가 된다는 뜻에서 민주적인 절차의 핵심이 아닐까?

여론에 밀려 국회의원, 나리들이 구속되어야 하는 뉴스를 접하며 중구삭금(衆口鑠金)의 경우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터-

아마도 정치가들에게 자고로 가장 무서운 것이 여론이라는 말-

신라 때의 <해가사>에 용왕은 곧 지도자 즉 권력자들의 경우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권력자들의 가치란 여론에 흔들리지 말고 공유의 몫이 많을 때, 민초들은 보람을 느끼고 나를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넓게 타인의 체온을 받아들이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정말 도처에 샤일록은 있어도 해악의 정도가 지나치면 비난의 포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키우는 나무는 미적 인식이 아니라 오로지 금전으로 환산할 때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다면 그가 키우는 나무의 이름에는 꽃도 없고 바람도 없고 금전만이 판을 치는 삭막한 상처만이 마지막에 당도할 비극일 것 같다.    

늘 권력에 서 있는 나리들은 중구삭금(衆口鑠金)을 받아들이고 백성의 소리를 들으며 정석의 길을 가야 하며 백성을 위하는 정치, 백성이 따라가는 곧은 정치를 해주기를 다시 한번 기대하며 그만 펜을 놓을까 한다.


2022. 08. 11.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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