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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haooiness)이란?】

《행복을 찾는 시간》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행복이란 본뜻은 “good fortune(행운)이라고 한단다. 사전적 의미는 행복은 희망을 그리는 좋은 감정으로 심리적인 상태 및 이성적 경지 또는 자신이 원하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라고 한다.

즉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또는 희망을 그리는 상태에서의 이성적 경지라고 나와 있다. “칼 붓”의 저 산 넘어 또 넘어 저 멀리에/모두 행복을 따라 훌훌히 찾아갔건만 /저 산 넘어 또 넘어 더 멀리에/ 모두 행복이 있다 하건만 “시를 기억이 난다.

행복은 찾아가면 다시 멀리 있고 또다시 찾아가야 할 길이라 여긴다면 다시 신기루처럼 달아나는 행복의 이름은 쉽게 붙잡고 또 독점할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마치 로또 복권을 사면서 매주 행운을 불러오고 싶은 욕망처럼 행복이란 이름 또한 같은 동류항에 들어간 이름일 것 같다.

사실 사랑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모조리 행운의 이름일 것 같고 쉽게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사실 앞에 서성이는 무수한 인간의 욕망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가질 수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있다는 법칙이 작동되기에 결국 내 몫은 항상 작고 멀리 있으며 손짓만 보낼 때 따라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망연함이 인간사가 아니겠는가.


요즘은 전원 지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 도시에서 살기를 원했다. 우선 각종 생활하는데 편리를 바라기에 우선 병원, 관공서, 마트, 의    

편의시설이 가까이 있다는 것과 따스한 아파트에서 온갖 편리를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는 인간의 심리는 거기 머물기를 원한다. 특히 여성들은 대부분 도시에 살기를 바라고 편리와 호사를 즐기려는 생각이 대부분의 심리적 안식처로 작용된다.


행복은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구석에 있는 것이라 강변하면 쉽게 따라오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누구나 편리 앞에 굴복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고 이런 경향이 대다수의 인간이 선택하는 일이기에 도시는 나날이 팽창하고 여기서 파생되는 자동차, 공예, 시궁창 오수, 탁한 공기, 소음, 매연 등등 편리에 대가를 치르는 일은 다수 발생한다고 믿는 사람의 신념은 비교적 약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우선 먹기에 좋은 것이면 좋다는 생각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작금에 종 편들 이 우후죽순(雨後竹筍) 생겨나고 유튜브들이 너도나도 하다 보니 그야말로 뉴스 홍보 속에 살고 있다.

그야말로 시시콜콜 뉴스도 아닌데도 특보다. 단독이다.라는 이름으로 현혹하는 일들을 날마다 홍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자주 보는 것은 산속으로 들어가 나는 자연이다.라는 재방송을 본다. 홀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장 눈을 끄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도시에서 병을 얻었거나 아니면 사업이 파산하여 마지막으로 산속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의 컨트롤을 하면서 사는 일, 또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떠나 산속에서 약초를 캐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지리산의 70여 세의 여자의 이야기나 제일 교포 3세가 산속으로 찾아와 청정한 생활로 낭만을 즐기면서 음악, 그림을 그리며 자족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한편으론 부러움도 있다.


또는 젊은 나이에 아이들을 데리고 전기도 없는 산속에 들어와 즐기면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용감하고 자기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나 자신도 어느 땐 대리 만족도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일찍 행복이라는 삶의 줄기를 깨달았다는 점에서 차라리 공감이 간다.

직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연의 끈을 끊고 한적하고 어찌 보면 할 일이 없는 나른한 생활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시골에 내려와 살고 있지만 절대로 시골 삶이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본다.  

홀로 살면서 적막의 외로움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사고와 유연성에는 감탄이다. 인연이란 참으로 질긴 강철의 끈이라면 이끈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산속 생활을 견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결같이 산속을 사는 사람들의 말이 일치하는 것은 행복 그리고

만족이라는 용어로 정리될 것 같다.


왜 그러한 행복을 산속에서 느끼는 것일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행복은 외부 즉 겉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이라 판단 이외에 다른 답이 나오질 않는다.

새들과 나무, 그리고 맑은 물 푸른 숲에서 조용한 벌판에 인간이 홀로 있는 그림을 연상해보라. 아마도 비극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 취한다는 것은 고독 속에서 자아 발견의 행복을 느끼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깨달음이란 삶 속에서도 가능한 일이 지겠지만 경우가 바로 도시를 떠난 사람들의 자각

이 행복의 이미지인 것 같다는 결론이다.

도시에서 아이들을 기계 바퀴 속에 넣고 한 치의 틈도 없이 살아가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경우

행복이란 없을 것이지만 오히려 시골에서 자연을 보며 자라나는 길 냇가에서 놀며 바람이 있고 풀과 냄새가 있는 오감의 자극에서 생기는 정서의 아름다움은 훗날의 귀한 상상의

자산가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한다.

기계에서 찍어 나오는 대량 생산의 도시적인 사고와 자기 고독 속에서 창조적인 넓고 깊은 산골 취향의 사유 질에는 차이가 뒷날을 기약할 것이라 본다.



물론 일방적으로 어느 것이 좋다고 말은 할 수 없지만 뒷 날의 행동에는 분명 차이가 엄존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꽃을 알고 자연을 알고 살아가는 가치는 참된 행복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요즘에는 더욱 강하게 유혹에 빠진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는지 늘 가슴에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인연의 끈을 모두 단절하고 깊은 산속에서 내 운명을 대입하면서 자연과 대화하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

결국 타성의 벽을 허무는 것은 모두 개인의 결정이다.

비약적인 말이기는 하나 나를 향해 매스를 대지 않고 결정할 수 있는 때가 가장 빠른 때가 아닐까 한다.


행복은 삶의 영원한 숙제라고들 한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다

위의 글에 공감하면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혹은 어떤 방법이 지선(至善)과 합리적인가의 문제 앞에서 답을 마련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이다.

삶의 문제 또한 자와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이고 자기의 문제를 정립해야 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또한 타인의 배려 또한 예외로 할 수는 없다.


/욕심의 헛됨을 몸으로 아노니/ 살아있는 날 어이할까나/


/숨이 멈추는 날까지/ 무기력함에 빠질 수 없어/ 나를 세우고/ 아픈 몸을 세우고/ 이웃에 따


스한 시선으로/ 다가설 수밖에/


/헛됨을 몸소 아노니/ 살아 있는 날 어이할까나/

    

살날이 길지 않은데/ 어떻게 조화롭게 살며/ 풀리지 않는 문제를 확인하고/ 이 세상을 양식


으로/ 마무리할 준비를 하나/ 살날이 길지 않은데/


위의 글은 내가 인용한 글이다.

인간이 삶의 본질로 들어가게 되면 맞닥뜨리는 것이 허무인 것이다.

무엇이 있을 것 같은 인생이지만 정작 하나하나 따져보면 아무것도 없는 빈손을 인지(認知)할 때 삶의 허무는 너무도 크게 오는 것 같다.

이는 누구에게나 같은 상징이면서 비유이지만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가는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다소 애매한 표현이라 하겠지만 『헛됨을 몸으로 아노니』에서 『살아있는 날 어이 할거나』와 짝을 이루면서 살아있는 날을 “어이”에서 방법적인 문제를 거론한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음과 어떻게의 문제가 상관을 가질 때 다음 연의 의미 – 즉 무기력함에서 “빠질 수  일정한 없어”와 “나를 세우고” “이웃에 따스한 시선”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는 의도가 확실하지 않은가.

또한 ”어떻게 조화롭게 살고 “ 이 ”세상을 값지게 마무리할  준비를 위한 자세에서 위의 글은 뚜렷한 확립이 우선하고 있지 않은가.


행복 또한 신념이 정립된 다음에 나오는 양식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룰은 늘 엄격하고 철저함이 되어야 하는 조건인 것이다.

언제든지 사는 일에는 표정이 가름한다. 사물에 대할 때마다 반응은 나오는 것이기에 이는 싫고 좋은 마음이 일정한 얼굴을 만드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사물을 관조해야 만이 즐거움이 오는 것 일게다.    

  

아울러 행복은 상상과 자유를 자연을 보며 길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자유와 자연 속에서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는 확장성에서 내 개인적 혼을 윤택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작업이라는 점에서

내 도량 보가 얼마나 넓은 가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 행복만을 찾는 프레임에 빠지게 된다면 그 프레임 포로가 되는 것이라 한다.

언제나 낙천적 사고와 관조하는 도량만 있다면 그리 어려운 세상은 아니라 하는데 말이다.

사실 칼칼함이 없거나 언덕의 아픔이 없다면 맛깔스러운 추억을 상실하듯이 무의미의 행복이 무엇이란 말인가. 해서 신념으로 나무를 세우고 풍부한 사상가로서 오늘도 나의 땀은 빛나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지금도 지울 수만 있다면 과거의 모습을 지우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일에 더욱 충실히 길 찾기를 해야겠고 실상의 내면의 들어있는 땀의 결과를 찾고 있다면 그 길이 곧 행복이 아닐까 하며 나의 변명을 뒤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신음하는 일상이 아니라 심연을 알고 행복을 찾아가는 길을 열어야 할 때이다.

행복의 깨달음이란 군 중 속에서도 가능하지만 전혀 반대의 경우가 바로 도시를 떠난 사람들의 자각이 행복의 이미지일 것 같다. 도시에서 아이들을 기계 바퀴 속에 끼워 넣고 한치의 틈도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의 경우 행복이 없을 것이지만 오히려 시골학교에서 터벅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냇물이 있고 풀과 냄새가 있는 오감의 자극에서 생기는 정서의 아름다움은 훗날 귀한 상상의 자산가(資産家)가 되는 일이 아닐까 기계에서

찍어 나오는 대량 생산의 도시적인 사고와 자기 고독 속에서 창조적인 넓고 깊은 산골 취향의 사유(思惟)의 질에서는 차이가 뒷날을 기약할 것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어느 것이 좋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뒷 날의 행동에 차이는 엄존할 것으로 생각된다.


꽃을 알고 자연을 알고 살아가는 가치는 참된 행복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이즈음엔 더욱 강하게 유혹이 일렁인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10년만 더 젊다면 인연의 줄을 끊고 깊은 산속에서 내 운명을 대입하면서 대 자연과 대화하는 길을 선택하고 싶을 뿐이다.

그 시간이 올 것이라 굳게 믿으며 그리고 기다리면서 행복의 길로 달려갈 뿐이다.

 


2022. 08.12.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관조하는 편주 생각]

[이승섭 4번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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