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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표정과 정치적인 말】

『지금 우리는』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_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깊은 산속 어딘가에 햇살이 있고 물이 흐르는 그런 곳에서 마음을 정리하면서 살고 싶은 소망이다. 물론 소망은 빗나가는 이름일지라도 구름과 햇빛이 찾아와 바람과 더불어 산새들이 주저 없이 다가오는 때면 사는 맛이 고독으로 맞이한다 해도 좋다.

고독해야 눈이 밝아지고 눈이 밝아지면 하늘의 별이나 달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도 보일 터 늦으나마 헛된 로망일지라도 말이다.

대부분 우리는 고독이란 그 자체를 매우 두려워하고 혼자라는 공포는 더욱 커지는 그림자에 놀라 스스로 위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독은 자기를 발견하며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추스르는 일이 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인간은 살기 위해 온갖 일을 벌이는 바람에 짐승들조차 자유를 박탈당하고 작은 방에서 몸만 불리는 임무를 부여받고 먹고 쉬고 다시 먹고의 되풀이가 인간 자신을 향한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는 온갖 시행착오를 감내해야만 한다.

자유를 구가하려는 인간은 역설적이지만 동물을 감금 혹은 학대하는 일로 이득을 챙기는 일이  양식을 팔아먹는 시각에 자각이 없다 에 방점을 찍고 싶다..

사회 조직은 이미 포화에서 활로를 찾는 일에 눈을 부라리면서 어딘가 목적지를 찾고 있다.

끊임없는 탐욕의 욕망은 길이 길을 이어가면서 결국 우주로 눈을 돌리면서 불가능에 도전하는 문명의 시대에 서 있다. 신문명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는 어느 정도 예상이 되어 있다.

우주에 인간이 올라가고 달과 화성에는 물이 있다고 하며 우주 정거장을 만든다는 요즘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갈망은 더없이 부풀고 한계를 갖는 경계는 늘 갈증만을 유발하는 것이다.



부하(部下)의 숫자를 늘리는 재미로 지도력을 시험하는 일들이 모조리 가지를 치고 날이 날마다 선(善)함을 위장하는 조직이 가동된다. 선은 악을 방어하는 수단일지라도 기어 팽창하는 악의 결말은 욕망이라는 것에 매몰된 현상이다.

조직이라는 것에 무용을 주장하면 아나 카스트가 될 것이지만 이도 사회의 그물망은 허락하지 않고 멀리 사람 없는 곳까지 따라오는 악착함이 현대인의 처지라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왜 그런가 하면 손과 발이 아니면 눈짓 하나도 감시망 속에서 사는 일이 현대인의 감옥이니 말이다. 온갖 이기들이 길가에서 촘촘히 감시망을 감시하는 가동하는 일은 이제 새로운 일이 아니고 근심도 아니다.

이런 처지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모습은 감옥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뜻이다.



깊은 산속에 있더라도 전화 한 통 외부로 걸면 금방 위치가 추적되는 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 마디로 어디 갈 곳이 없고 위안을 받을 공간이 없다.

이럴 때 무감각이라는 편리한 이름이 있지만 어디 인간이 무감각만으로 살 수 있는가 말이다.

뜨거우면 뜨겁다. 소리치고 추우면 춥다고 찾아 나서는 위안의 공간을 찾는 방랑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동생활이라는 얼개를 만들어서 이리저리 엮어진 밧줄에서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을 하면 그럴수록 조여 오는 조직의 심각성은 다시 조직을 만들고 또다시 파생되는 문제 앞에 법이라는 그물을 펴고 나가지 못하게 통제의 사슬을 펼친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모순이고 또 역설적이게도 발전의 모티브가 된다는 아이러니 앞에 논리의 발상이 새롭게 변명을 만든다. 갈 곳이 없고 있을 곳이 없지만 이를 무시하고 무감각의 촉수를 내려놓으면 아무런 탈이 없다.



지금 엮어져 나가는 망상의 진로처럼 논리라거나 이성이라는 도구를 무시하면 할수록 자유를 얻는 일도 불안해지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희귀성의 모순 앞에 서성거려진다.

원점이란 무엇인가?

이 또한 망연함에는 똑같은 무게가 부여된다. 모두 사방을 둘러치고 춥기 때문에 불로 따스함을 유지하는 겨울이나 더우면 그늘을 만들어 자기 보존의 방편으로 삼는 거처가 원점은 아니다. 나는 타인에게 모순의 대상이고 타인은 또 나 때문에 모순을 감당하는 이 불가분의 관계를 끊을 수가 있다면 참된 자유는 바람을 만날 것이다. 이런 유대 관계가 톱니바퀴를 이루면서 하루하루 모순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빨리 간다 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선착을 위해 땀을 흘리는 달리기 선수의 영예는 그럼 무엇인가?

신들은 인간에게 모순을 넘겨주고 해답을 강요하는 경주의 재촉은 참으로 이율배반이고 여치 없는 오 골인 것이다. 이런 처지를 알면서도 인간은 다시 길에선 걸음을 어제와 같이 진행하는 경주에서 변함이 없는 일이 또한 가상하다.

어쩌면 “변증법의 창시이자 파타고라스의 제자인 Zenon”이 “사람은 경기장을 건널 수 없다.”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라는 억지 감성에 현혹되지 않는 순수한 사유에 긍정의 고개가 기웃거려진다.

모든 불합리와 모순의 이유를 알면서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인간의 행동 양식임을 대입하면 모순과 불합리라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를 내장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것이 역설 정서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아우성 난장판이 정답이라는 듯 저마다 떠들고 주장하고 악을 쓰며 악다구니로 난장판이 날마다 매스컴, 신문, 종편들과 무슨 교수, 정치평론가 등이 침 튀기며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 고개가 돌려지고 외면이 전부다  

뉴스 특보라는 공갈로 날마다 영일(迎日)이 없는 듯하다.

사실 특보라 한다면 이번 자연재해 등이 특보이지 무슨 사람이 감옥에 갔다는 등 무슨 정당이 무엇을 냈느니 집권자가 비가 오는데 왜 퇴근을 하였느냐 직무유기가 아닌가 하는 등이 무슨 특보인가? 정작 그 타령이 이미 식상한 말에 포장을 덧씌우는 일이 무슨 특보이며 그 사람은 다시 그 사람의 말로 해설을 한답시고 늘어놓는 말의 성찬이 이젠 괴롭다 못해 다이얼을 돌리거나 아예 끄고 만다.



요즘에는 더욱 상대는 역적 같은 정치가처럼 아귀다툼으로 싸우고 말에 대한 꼬리를 달아 우리 쪽이 아니면 내가 아니면 동의가 될 수 없다는 비논리를 피면서 정서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정당의 정치인이라면 여야를 떠나 이러한 자연재해와 재난이 암울할 때 이때만이라도 모두가 함께 재해를 입은 국민에게 한 목소리로 보듬어 주고 감싸주고 위로를 해주어야 하지만 이것은 반대 아닌 반대만이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날 지경이다. 자기들만의 박수가 연일 이어지면서 반대편의 주장은 천하에 지옥에나 들어가 화형을 당해도 싸다는 복수심의 발로가 이글거리는 모습에 참으로 한심하다.

웬 원수가 그렇게 많으며 적개심의 전쟁터에 휴전조차 없는 이 사회의 통곡을 신은 듣고 있는가? 아니면 직무유기를 일삼는 신의 표정에 찬물을 끼얹어야 할 노릇이다.



정말 우리 모두 정서의 블랙홀인가?

아무것도 없다. 보이지 않는다. 바람도 없고 산도 없고 오로지 어둠의 깊이에서 살아야 하는 의무감 밖에 달리 없음을 뉴스 속에는 가득한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먹은 인간의 위장은 소화불량의 탈이 났고 고칠 수 있는 제동장치나 의사가 없다는 부재의 갈망이 서성거림이다   

그러나 인간은 희망을 찾아야 하고 길을 만들어야 하며 신념을 일으켜 세우는 불을 켜야만 한다는 노래가 들려야 한다. 마지막 절망에 이르면 되돌아보는 인간의 지혜를 믿어야 한다.

무엇일까? 눈먼 장님 에게는 지팡이가 있어야 하며 귀가 먹은 벙어리 에게는 보청기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정서의 불을 켜는 일은 한 줄의 책을 읽고 자기를 돌아보는 샘물을 퍼서 올려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너무 약하다. 현대인은 강하고 억세고 사나운 정서의 충격파를 던지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 심성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말” 언어를 쓰레기장에 던져지면 아우성이 된다. 질서를 회복하는 일은 말의 줄을 옳게 세우는 일이라면 결국 돌아가는 길은 한 가지다. 문학의 장이다.

물론 소설은 현실을 묘사, 설명하는 주 임무이기에 시(詩)를 앞세우는 이유는 까칠하고 단정함을 요구하는 특성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가?

사실 인간이 사는 땅은 새로운 것이 없는 오로지 과거의 반복이 새롭다는 의식을 가질 뿐이지 새로운 것은 존재할 뿐이지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고 과거의 것을 다시 보는 시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말의 성찬에 기울다 보면 이성이 마비되고 이른바 설득당한다는 뜻이며 이런 현상은 정서를 잊어버리는 결과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자유의 구 가에서 이성의 일탈이 심하고 정도가 없는 혼란이 가중되는 느낌을 많이 갖게 된다. 정말 우려스럽다.

지금 젊은이와 어른들의 의식 대결이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하는 불행이 깊다는 것도 말의 성찬을 알지도 못하는 정서 마비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인상 깊은 한 구절이 구원의 메시지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될 것이다.

언어의 꼬임에는 너무도 쉽다 하지만 상대가 받은 충격의 말은 너무나도 크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자신의 말 성찬에 늘 초심으로 돌아가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말하는 언어 조심과 말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정치가들도 말에 대한 성찬을 개선하는 언어 표정의 정치이기를 기대하며 에필로그 한다.     


2022. 08. 14.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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