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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가는 길]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을 불통이라 하며 가면을 쓴 위선자라 할 것이다.

자기주장만 앞세우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 사람을 일컬어 고집불통이라고 하며 정도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단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휩쓸려 다니는 사람을 주관이 없는 인간이라고 한다. 맞다.

우리는 근래 정치를 보면서 더욱 그런 현상에 얼굴이 찌푸리고 외면을 하게 된다.

참으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슬픔이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겨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사노라면 언젠가는 평원을 만나는 일도 있겠지만 사실 외면하고 거래를 끓는다.

따지고 보면 불통이란 교육의 문제도 아니요, 오로지 성격 문제나 아니면 정서의 층이 너무 크면 좁힐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렇다. 요즘 여당이나 야당이나 하는 짓거리를 보자

필자가 보기에 애국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정치에만 열을 올리는 정치인들만 눈에 보이니 참으로 어두운 생각뿐이다. 이것이 진정 세계 10위에 있다는 한국의 정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편만 공정의 논리이지 상대방은 아무리 좋은 대안이라도 거부하고 멸시하는 요즘의 정치를 보면서 아집의 정치, 불통의 정치만이 우리 시대를 좌우지하고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작금의 여당은 젊은 당 대표가 성 상납을 받았느니 안받았다는 등 온 나라를 흔들고 있으며 야당은 온갖 비리 의심을 받는 자가 대표를 한다는 등 요란을 떨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정서의 층위에 어긋날 때 불행의 장막이 드리워진다. 정서의 화합만이 답인데 이들은 정서가 메말라 있기에 오로지 독선과 아집에 정지되고 있으니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자기를 모르고 위장과 위선만이 판을 치는 세상인지라 그냥 가엾다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으며 연민만이 드는 것이다.

사람은 많아도 필요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말 잔치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진실이라 우기면서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출세하는 세상은 아닌지-

 특히 정치가의 말은 거개가 그런 범주에 들어 있어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고 억지를 쓰고 있으니 참으로 불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서로 싸움만 하고 있다면 무슨 미래가 있으며 찬란한 미래가 오겠는가?

그러 미래는 절룩이는 미래요. 빈 공허의 미래에 담길 내용물이 없는 혹은 지극히 빈약한 표정을 대면할 때 좌절의 순서는 명백하게 자기 것이 되기에-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의지로 세계를 지니는 마음을 가질 때 새로운 IT, 반도체, 제5차 산업을 이루어 갈 때이다.

인간은 자기 함정 모순을 피하는 일이 성공의 담보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나를 부풀리는 일이 우선이며 나를 축소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너보다 더 월등하다는 가식보다는 낮음과 겸손한 자세로 인간은 항상 깨어 있는 상태에서 똑바로 걸을 수 있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서성이기만 해도 미래는 온다.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 순간에 않아 있는 미래는 이미 지나가는 이름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포착하고 대화를 나누는 소통의 기회를 확대하는 일은 인간의 임무일 것이다.

물론 미래는 현실의 바탕 위에서 오로지 공고한 성곽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에 충실할 때 미래조차도 쉽게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문제만을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로 이어지는 연결 이가 될 경우에만 미래는 우리들의 세상을 구축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이 원론적인 미래의 사고에는 나를 이끌고 내일의 높이에 이를 수 있다는 사유(思惟)의 길이보다 명확하게 나타날 것이다.

아무튼 팽창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정작 공간의 부족에 현대인들은 욕망을 불태우는 일은 걱정을 달고 사는 일과 같은 일이다.


엉터리들이 많은 인간의 진실을 판별하는 사기한들이 들끓는 오늘의 넘침은 오히려 부족 속에 갈망을 띄운 시절이 더 인간미의 따스함을 가질 수 있었다는 모순의 발판이 넘침의 반대쪽에 있는 실상이다.

넘치는 것에 비례하여 행복은 오히려 줄어드는 이 역설의 벌판에서 현실은 고달픔의 표정을 짓고 울상을 보내는 현실 -

그렇다고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는 것을 주장하는 것도 어설픈 일이다. 다만 넘침에 대한 감사와 자기를 알려는 노력이 선행할 때 발달의 즐거움은 더욱 배가 될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기도처럼 깃대를 세워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지혜로 희망을 찾아야 하며 길을 만들며 신념을 일으켜 세우는 불을 켜야만 한다.

무엇일까?

눈이 먼 사람은 지팡이나 길 안내견이 있어야 하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은 보청기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희망의 지혜로 정서의 불을 켜는 일은 신념의 책을 소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돌아보는 샘물을 퍼서 올리고 전자파의 충격을 주어야 하는 시기이다.

진리는 언제나 미래를 선택하면서 길을 닦고 만들어 가야 되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순간부터 반성의 나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의 정서로 출발하는 이기적인 사고를 버려질 때 사회 질서가 잡히기에 하는 말이다.



세상 모든 빛은 같다. 그러나 중심을 잡고 미래를 보면서 보편적 가치가 있을 때 균등과 일체화가 수립된다는 점에서 오늘은 어떤 흥미로 미래로 갈 것인가를 우리는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 도약할 시기인 것이다.

속고 속이며 사는 일이 인간사라 할지라도 어차피 인간의 속내를 모르고 만나고 살아가는 일이 전부인 바에야 달리 방도가 없기에-

언제나 보편성과 상식을 지키는 지혜는 양식으로 갖추어야 할 깨달음이 있다면 자연스레 미래는 환하게 보일 것이다.

인간- 참으로 모순의 얽힘과 설킴에도 자유를 구가한다는 목청에 끼지 못하는 나의 모양은 어리석음일지라도 미래로 나가야 한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거울을 닦듯 내 마음을 닦는 일이 일상이기를 기대하며 옛 속담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을 믿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2. 08. 26.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필/칼럼니스트/

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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