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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모습을 그리는 등가의 법칙〗

【1. 의식의 그림】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라는 특성은 시인의 마음이 고백의 창문을 통해서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이겠지만, 낯설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시적인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詩가 다른 문학이나 장르보다 지난 <至難> 한 것은 이러한 장치를 어떻게 유효하게 배열하고 효과를 최대한 극대화할 수 있는 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시인의 기교적인 흔적과 시인 자신에게서 채득 된 시적인 감수성이 융합되어 보다 명징하고 깊은 의미를 함축하는 언어의 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에게 따라오는 생의 문제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출구가 있지만 질서를 존중하는 시의 특성이 있는 반면 아예 질서를 왜곡하거나 비틀어서 자신의 의도를 나타내는 시인도 있다.

가령 이상 시인 시를 읽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지만 그의 메시지는 그런 측면에서 독특한 입지를 갖고 있다. 반면 대부분의 서정시는 의식의 질서를 갖고 순차적으로 시간을 배열함으로써 쉽게 이해의 해석을 넓힐 수 있다.


의식의 전개는 시인의 성품이나 삶의 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자신의 개성일 뿐만 아니라 시가 갖는 특징이 될 수도 있다. 왜 그런가 하니 모든 시가 한 가지 얼굴이라면 이미 시는 죽어가는 시라는 것이다. 가령 장미꽃이 아름답다 해서 정원에 장미꽃만을 심어 논다면 무미건조함은 필설이 감당할 일이 아니다. 나팔꽃도 있어야 하고 패랭이 꽃도 혹은 망초, 다양한 꽃들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감(美感)의 조화라는 목표를 향해 기하학적인 배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시인의 의식이 다양해야 한다는 점에서 깊은 사상의 형성이나 체험의 용해와 지혜의 보편성을 갖고 있을 때, 시의 얼굴은 다감하고 정감 있는 감동의 파문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미연의 시(詩) - 첫 대면 하는 인상은 초현실 의식의 조합, -이런 의식이 출몰하고 시종 시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쉽게 이해의 영역을 장악하고 있지 않는, 그만의 개성을 나타내는 시라는 느낌을 준다.

다만 김미연의 시에는 사물에서 조응하는 감수성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자아를 초월하는 – 4차원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2. 그리기 의식】          


1) 무형의 시심

김미연의 시는 무형이라는 이미지를 개성의 전부를 바라보는 상징이면서 시심이 어디로 지향하는가를 가늠하는 촉수를 갖는다.

이 같은 현상은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응고된 생각들이 무형의 모습에 투사(Projection)된 감정이입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쓸데없는 사람이나 실권 없는 사람의 지칭 혹은 괴뢰, 주관 없이 행동하는 사람, 새를 쫓는 임무를 위해 위엄(위엄(威嚴)의 넝마를 입고 가을 하늘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의 모습 – 이런 모습에서 슬픔과 연민을 느끼는 것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모한 허상 무형의 모습에서 인간은 누구나 허수아비로 살아가는 때로 허무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상징의 영역은 넓은 것이다. 『허수아비』 『욕망의 그늘』 『팔월 열나흘』 『허수아비의 꿈』의 시에 허수아비의 이름이 지속적으로 들어가고 등장하면서 시심의 향방을 지칭하고 있다. 시어의 빈도는 때로 시인의 정신의 현주소 혹은 지향하려는 목적지의 상징을 일깨울 수 있기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가 있다. 아래와 같은 인용의 시로써 김미연의 시적인 특색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여준다.


논두렁에


8월의 허수아비가

거울 속에 보인다.


그 앞에 마주 섰다


눈빛이 마주치는

거기

허수아비는

눈물 흘리고 있었다.


내 돌아섰다.

왠지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허수아비의

눈물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허수아비의 눈물>


의식의 거울을 통해 허수아비를 상정(想定))하는 것은 슬픔의 마음이 포장된 시심을 암시하고 있다. 8월의 들판에 허수아비의 고독은 하늘을 향한 (원망(怨望)이나 또는 희망의 줄기가 허무로 돌아섰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의 암담함이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인은 아예 눈물조차 나타낼 수 없는 동화(同化)의 경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눈물도 흘릴 수 없는 “젖음”의 내면을 간직한다. 동화는 일체화이면서 정서의 완벽함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허수아비의 눈물』에는 시인과 허수아비라는 존재와 대치된 혹은 떨어진 거리감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완벽한 일치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의 시인과 “허수아비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의 상반된 대척이지만 의미를 뒤집으면 실제로는 눈물에 일치점을 형성하기 때문에 허수아비에서 역설의 정서를 접하게 된다.


Paradox는 시를 이루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허수아비는 곧 시인의 정서를 완곡하게 나타내는 표상으로의 역할이라는 뜻일 것이다. 『허수아비 하늘로 가다』는 존재의 허망을 나타내었다면 눈물이 나 슬픔의 흔적조차 메마른 아픔을 수반하지만 김미연의 시심은 정작 꿈과 허상을 향한 문을 열어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지?


겨울이 찢기고 간 고통보다

홀로 서 있는

외로움이 더 잔인하다.


허수아비의 아이들

그들은

나 같은 삶을 살게 할 것인가


허수아비는

생명을 준 바람에게 말한다.


온전한 다리와

떠날 수 없는 자유 의지를

그리고

강과 산

삶과 함께 하는 세상으로 보내고 싶다.


앙상한 겨울에도

꿈이 있어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왠지 

바람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허수아비의 꿈>


꿈은 세상을 바라보는 환한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역경과 아픔을 고통의 늪에서 희망을 갖는 일은 생명의 환희 혹은 희망의 메시지를 자기 스스로 에게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에 신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다. “홀로 서 있는 외로움에” 근본적인 의문을 발하는 시인의 의도는 “자유 의지”를 갖기 위해 강과 산천의 호흡을 열망하면서 생명이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세상으로 보내고 싶다.”의 소망이 발동된다. 거기에는 사랑과 미움 그리고 매서운 겨울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슬픈 공간에서 사람들의 부대낌을 받을지라도 인간의 체취가 있는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허수아비의 소망은 간절하지만 “바람”은 끝내 어떤 암시도 보내주지 않는 절망의 아픔이 다가오는 것이다. 희망은 절망의 반대쪽에 있는 명칭이고 이 명칭을 찾아내는 풀숲의 방황은 곧 사는 일이고 사는 일은 곧 희망의 길을 찾아 나서는 길 찾기라는 점에서 시인의 고독은 허수아비의 이름을 빌며 자신의 발언을 대신하고 있음이다. 김미연의 시에 허수아비는 그의 시를 찾아 나서는 허무의 이름이면서 문을 열어가는 단서로서 이미지가 되는 것 같다.


2) 허무의 날개    

    

허무라는 것은 삶의 이름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살아있는 것들은 결국 허무의 무형에 먹히는 존재가 곧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무 무형의 희망의 징검다리를 찾아 나서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중요한 신념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허무 무형의 성장할 수가 있기에 -

『미망의 숲』 『바다로 간 나뭇잎』 『머물 곳이 없으면』 『짐은 어디에 있는지』 『전시관에 가면』 등의 시에는 이런 본질에 대한 허무와 무형의 대답이 무엇을 암시하는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때론 지친 시간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조금조금씩 더욱 지쳐만 간다.


푸른 하늘이 있다 해도

어둠이 가시고

해가 떠도

내가 사는 모습은 없다.


그것이 나의 슬픈 하루이고

삶에 대한 회의다.


해가 지기 전의

그 화려함이

어찌 내가 가져야 할 몫인가를

가슴 아프게 부정해도


나의 남은 시간 속에

사라져 간 것들의 대한

연민과

남은 것들의 대한

따뜻한 열정이 더욱 나를 괴롭힌다.


어디에 내가 머물 것인가.


바람도 구름도 없는

하늘은 어디에도 없으니,


저녁

나뭇가지 사이

주인 잃은 빈 거미집에 머물며

하늘의 별을 세리라


                         -<머물 곳이 없으면>


허무와 무형은 번민을 가져오고 이 무형의 번민은 고독의 그늘을 갖게 된다.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 시인은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며 희망의 언덕을 상상하는 길을 재촉하는 모습에 숙연하고 아려온다. 부재(不在)의 하루 속에 점차 지쳐가는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삶의 애환이나 아픔으로 다가오는 일상은 시인에게 결코 행복한 공간은 아닌 듯하다

그렇기에 “어디에 머물 것인가”를 자문하고 일면 사라진 것들과 남은 것들에 대한 감정이 “주인 잃은 빈 거미집”의 무형의 허무가 깃드는 장소로 자기 스스로를 감금하게 하는 느낌을 준다.


사실 무형의 허무는 항상 큰 입을 벌리고 다가온다. 특히 고독의 키에 눌리는 사람일 경우 외로움과 고독은 인간 공통의 언어이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개성과 성격이 좌우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별을 셈하는 고독 속에서 미래를 향한 언덕이 설정되었기에 꿈과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이 안도감을 준다.


꽃잎이

힘겨워 떨어지는

산촌의 외 길가


작은 무덤 하나 외롭다.


                             -<비문을 쓰는 꽃잎>


인간은 언제나 혼자 살아가는 존재이다. 항상 외로움과 고독의 옷을 벗을 줄 모르며 살아간다. 그리고 방황을 하다 사라지는 사람, 아니면 그렇게 방황하다 고독과 외로움을 이기며 승리하는 사람도 있다. 때문에 보편의 진리를 수용하는 조건이 따라붙고 너와 나를 갈라놓지 않으면서 통합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詩)는 “외 길가” “무덤 하나의” 뉘앙스에서 흥건하게 젖어지는 슬픔의 이름이 남는다. 고독의 숙명에서 칙칙함이 아니라 밝음으로 지향하는 길을 확보했기 때문에 회색의 슬픔이 연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미연 시인은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시심이란 표현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표현되는 시의 모습에서 늘 시인의 마음과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출몰하는 이유이기에 “외” 의 고독한 암시와 “무덤 하나의” 숫자에서 처연한 정신의 줄기가 흐르는 느낌에서 기억에 남는다.


3)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철학은 자기를 찾아가는 길을 늘 묻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자답하는 것이 철학이라 한다. 그러나 시(詩)라는 것은 철학이 아니며 다만 철학을 수용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나 – 일인칭의 무게는 우주이면서 전부를 뜻한다. 내 질문은 항상 겸손하고 근 험한 윤리성을 요구한다. 『허난설헌 1⚫2』는 시인 스스로가 허난설헌의 일생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내재하고 그런 생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는 유사성의 일체화에서 시인은 스스로에 객관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또한 『토함산』엔 개미와 나의 불구성이 극복의 언덕으로 설정되면서 자신을 찾는 여행은 고달프게 전개된다.


작은 개울이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냇물로

강물이 좀 더 큰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강

평화와

유장한 아름다움을 넘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내 모습이

비친다.


젊은 날에

한때 깊은 사색에 잠기고 했던 문제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흐르는 강물처럼>    


물이란 원래 흐르게 되어 있다. 고인물은 썩기 때문에 본질이 흐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은 냇물이 모여서 강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 다시 바다로 길을 재촉하면 비로소 물의 운명은 세계의 큰 공간에 수용된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곧 운명을 이끌고 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 “어떻게”는 방법이고 “어디로” 는 존재의 지양 공간을 암시한다. 여기에 오늘이 있고 내일이 연결고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있음으로 내일이 드러나고 내가 공간을 점령하고 있기에 미래가 길을 만들게 된다.

나를 찾는 일은 운명이고 이 운명을 이끌고 내일을 찾아가는 유영(遊泳)이 삶의 대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시인은 항상 나를 찾아 나서는 일로 강물을 비유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정지된 것인가 아니면 흐르는 것인가를 묻게 된다. 정지는 슬픔이고 흐름은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방랑이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허물을 벗는다.


단순히 껍질만 벗는

변신이

일상적인 것으로


그래서 늘 몸체와는 달리

정신은

그냥 그대로다.


어떻게 절름거리며 사는 것이

운명적으로

때론 불편한 것으로


껍질의 의미를

잊은 나의 변신은


죽음이 허물을 벗는 그날까지

한 마리의

곤충이기를 기다린다.


                       -<변신>  

변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과 분명히 다른 것이다. 전자는 의도적이고 후자는 의타적인 이유가 그렇다. 그러나 전자에서는 자기 의지에 따라 운명의 노래가 있지만 후자에서는 끌려가는 신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변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찬란한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고 미래를 예약하는 지혜를 갖기도 한다. “날마다 허물을 벗는다”에서 날마다의 변신은 곧 오늘을 사는 의미를 충실하게 수용하는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몸의 변신은 있을 수 있지만 정신의 줄기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시인은 이런 이치를 “정신은 그냥 그대로이다”를 주장하면서 변화를 맞이하기 위한 예감을 나타내고 있다.


절름거리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다. 절름거리기 때문에 곧추서기를 위해 하루를 숙고하고 반성하면서 현실을 진행한다. 이런 각오를 다지기 위해 “죽음의 허물을 벗는 그날까지”라는 한계를 설정하고 정진하는 모습이 너무도 의연하다. 시인의 삶은 일반인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변신의 위함이 의지 없는 일이 아니라 자기 신념의 성을 지탱하는 자로 인식되면서 시심을 장악하고 있는 듯하다.


4) 의식 풍경  



시(詩)는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풍경화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문자로 표현하는 그림 속에는 시인의 정서와 삶의 모든 요소들이 구성적 요건으로 작용한다. 독자는 이를 해석하고 찾아보는 재미를 예외로 하지 않으면서 감동의 진원지를 찾아 시인과 독자는 서로 치열한 탐색을 계속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의 작품에 “낯설게”라는 의상을 입혀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유발하며 독자는 해독의 근거를 찾아 재미를 읽어내려 하는 것이다.

이 둘의 요소는 분리된 이질성이 아니라 감동이라는 공간을 찾아 하나로 결합하는 점에서 의식의 동질성을 이루는 점이다. 독자는 시인의 표현에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 되는 절차를 통해 정서의 고급화는 시의 궁극적인 사명에 부응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여러 유형의 풍경으로 드러난다. 쓸쓸함이나 즐거움 혹은 둘이 결합하는 방식 등등 다양성이 특징일 것이다.   

김미연의 의식은 쓸쓸함 속 혹은 허무가 많은 편이 아닐까 한다. 이는 삶의 특징 혹은 환경적인 요소가 스며든 결과로 인지된다.


10월 어느 날

슬픔이 잊히지 않는 시간


콩깍지 터지듯

아픔은 가슴을 찢고


빈 들녘에 비친

그 얼굴

저녁 햇살에 외롭다.


                     -<가을이 남긴 얼굴>


가을날의 쓸쓸함과 시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하다

자연의 조락이 주는 허무와 여기에 동조(同調)되는 생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슬픔이 잊히지 않는 시간” 의 근거를 제공하면서 “아픔”과 “빈 들녘”의 허무와 결합하여 황혼에 “외롭다” 의 발성이 “서슴서슴 떠난 가을의 슬픈 모습으로 잔상(殘像)을 남긴다. 다시 말해서 슬픔으로 외로운 가을이 서러움을 부추기는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상징성 – 이는 시인의 ‘현재’ 상황을 시의 구조로 말하는 근거가 되면서 등가(等價)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한다.


3. 나가면서   


김미연의 시는 가을 하늘에 서 있는 허수아비의 슬픔과 허무의 큰 눈 그리고 삶에 고단한 여정(旅程)이 시화(詩化)된 느낌이 우선한다. 이는 시인의 정서에 간직된 체험의 요소와 삶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시의 얼굴을 나타내지만, 현실의 질서와 어긋난 느낌의 언어 구조가 많은 듯하다. 이는 무의식의 안개 혹은 철학적 깊이가 명징한 시야를 가리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세상의 진실에 갈증을 나타내고, 인간의 숙명에 고단한 눈길을 보내는 시심(詩心)에는 여백의 물살이 흐르고 있는 시를 그리는 시인이 아닌가 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2. 09. 15.


금요 저널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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