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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사랑이란】

『1. 시를 만나는 길』

시를 만나러 가는 길엔 햇살이 유쾌하게 비추어도 좋고 비가 내려도 좋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변화의 정서를 담는 그릇이기에 비가 오면 젖어 찾아오는 그리움이 있고, 햇살은 찬란한 미소가 가슴에 점령되어 희망의 노래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즐거움이거나 아니면 슬픔이거나 시는 늘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는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기에 사랑을 믿고 또 찾아가는 길이 봄비가 된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사랑의 호감으로 포장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시적으로 완성된 이미지를 만날 때, 비로소 눈이 뜨여지고 속삭임이 들리고 희망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지고(至高)한 가치로 의미의 의상을 펄럭이는 향기에 묻히게 된다.

더구나 완성도 높은 시의 숲에 들어가면 황홀한 마음에서 하늘로 오르는 열락(悅樂)의 나래는 삶의 의미를 고상하게 그리고 높은 지향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꿈이 깃드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시는 꿈을 만드는 일이고 시인은 이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투척하여 언어의 조합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에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심지어 콤마 하나에도 열정의 땀이 들어 있을 때, 비로소 시는 눈을 뜨고 독자의 곁으로 다가서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김여선의 시는 사랑과 그리움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서 다른 정서의 숲을 이동하는 특성이 있다. 하나의 중심에서 다른 정서의 숲으로 가본다.


『2. 의도적이면 길이 보인다.』    


⑴ 사랑 혹은 그리움

인간의 삶이란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을 한계로 설정할 수는 없다. 삶이라는 중핵(中核)에서 그 주변을 위호(衛護)하는 여러 요인들이 모아 져서 의식을 형성하고 이 의식에서 자기의 의도가 가미된 행동 양식이 도출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행동 양식은 곧 개성이 될 수도 있고 생활을 이룩하는 특징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개성이란 일종의 이름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중심의 의지가 특징일 때, 커다란 이미지가 누구는 “어떻다”라는 결과로 결정된다.    

시인 김여선의 시에 그리움이나 사랑은 곧 그의 삶을 구성하는 인자(因子) 중에서도 가장 중심을 이룩하는 이미지로 작동되는 시들이 선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명확하게 정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즉 그리움이 먼저인가 아니면 사랑이 앞선 의미인가에 대한 정리-

물론 그리움이란 아련한 느낌이 점차 굳어질 때, 사랑은 그 뒤를 따라오는 순서가 당연한 질서의 개념이라는 편이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리움의 요소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진실로 막연한 시작으로 사랑을 불러오는 계단을 점진적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그리움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일은 턱도 없는 것이다. 때로 둘의 이미지는 뒤섞어서 앞서거니 뒤 서거니 하며 교차 감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움은 첫째로 물로 젖어서 찾아온다.


비가 내리는 날에

풀잎은 잎을 벌려 온몸을 씻어내지만

그대는 낯선 그리움 하나 가슴에 몰고 온다.


                         <그대>    


시인마다 시적 대상을 의식으로 옮기는 방법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동의 매개체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바람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 혹은 현재 등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의식의 이동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보 오들레오의 조응(照應)(Corres pondences), 발레리의 운율(melodies)나 랭보의 견자(Voyant) 혹은 말라르메의 무한(lnfinite)등은 상징 시인의 의식 전달의 수단으로 작동되었다. 이렇듯 시인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막론하고 자기의 정신을 시로 옮기는 수단의 일환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물, 혹은 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햇살이 밝은 날보다도 오히려 “비가 내리는 날”에 시적 감수성이 그대 하는 미지의 대상에 젖어서 다가오는 의식 혹은 기다리는 개념이 교차하면서 시의 행로를 진행시킨다.


비가 “오면” 풀립- 이는 시인의 상징을- 씻어내는 정화의 개념을 수반하면서 “그대는/낯선 그리움 하나 가슴에 몰고 온다”는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오면”의 조건은 그대가 올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으로 기다리고 바라보는 마음의 애타는 면이 그리움의 가치와 등가(等價)를 형성하는 이미지가 성립되는 것이다.

시는 대상의 집중화에서 일체화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숨는다.

안갯속에 숨어도 그대는 보이고

은행나무 잎새에 숨어도

나직이 그대의 숨소리가 들린다.

새가 날지 않아도 호수는 그리움을 토해내고

달빛은 사각대는 바람 소리를 삼킨다.

숨는다 아무리 숨어도 그대가 보인다.   


               <그대의 그리움> 중


사랑의 대상이 세상 어디에 숨어도 보이는 눈을 가진 시인의 의식-

그야말로 시를 위한 파파라치라는 명찰이 선명해 보인다.

어디에 숨어도 “그대” 미지의 대상-

사실 시로 바꾸거나 그리움의 연인으로 바꾸거나 시는 애매성(ambiguity)의 의상을 걸치는 것과 같은 뜻을 첨가하면 그대의 의미를 굳이 명료하게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안개” “은행나무 잎새” 등 세상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는 형형한 눈을 가진 시인의 마음은 통찰의 시선을 레이저로 발산하는 것 같은 시인의 모습이 매우 진지하고 애달프다.


시인은 사물과 의식이 하나로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을 위해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시인은 숲을 소요하면서 혹은 차를 마시면서 또는 음악을 들으며 등 시인의 의식이 하나로 합치하기 위한 일종의 방법 찾기라면 김여선의 의식은 집중화가 남다른 특징으로 그리움의 거처를 어디든 찾을 수 있는 자신감 때문에 그리움이 사랑으로 길을 만드는 방법론이 뚜렷하다.


그대 오고 있는가

비 뿌리는 강을 건너 안갯속에서

그대, 발을 적시는가

오늘도 낮은 창가에서

그대를 기다렸지


       <그대 오고 있는지>


역시 비와 시인의 사고에는 그리움의 길이 보인다. 이는 의식을 연결하는 일이 곧 시의 완성도와 밀접하다면 심리적인 집중의 초점이 명확해진다. 이처럼 그의 시는 물이 가장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하는 기능이 있다.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방법론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면서 큰길과 작은 길이 분기하듯이 목적을 위해 가는 방법이 한 가지 방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메신저의 본질은 “그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이 간절함에 모아들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백련/에서도 그리움은 절절하다.


지금 우리는 저 서글픈 영혼의 아픈 숨소리를 고이 간직한 채

찬 겨울 씨앗을 잉태하는 아픔을 되새기며

거센 비바람과 폭풍보다도 더 세차게 일고 있다.

먼발치의 인내로 가녀린 시녀의 옷깃과도 같이

다시 사랑이라는 불씨 하나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사랑의 불>    



사랑은 달콤한 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선 신산(辛酸)하고 굴곡의 계곡을 지나거나, 천인 단애(千仞斷崖)의 벼랑을 지나야 하고, 비바람 폭풍의 악착한 도정을 지나서 당도하는 어쩌면 슬픔의 정점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형극(荊棘)의 가시 발길을 지나 사랑의 땅에 이르려고 열망하는가?

그 대답은 아주 간명하다. 고통의 심연을 지나 얻는 행복감 때문일 것이다.


<3 육친의 정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은 다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궁극에서는 다른 것이다. 외면적인 행동반경이 아버지라면 어머니는 내면으로 따스함을 창출하는 뜻에서 다름이면서 같다는 말이 성립된다. 왜 그런가 하면 큰 울타리의 아버지와 그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주어지는 분담의 사실을 깨달으면 사랑의 공간이 따스해진다. 시인의 그런 균형 감각이 깨달음으로 표시되는 듯하다.


늦은 귀가에

아버지는 서둘러 군불을 지피고

아궁이에 거품 문 생가지의 아우성,

매운 연기에 먼저 눈물을 쏟고

굳은살 가득한 손으로

어린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신다.


아버지 기침 소리

가끔 들리던 밤,

어느새 잠든 나를 안고

군불을 때던 아버지


            <아버지 사랑>


어제는 비가 내렸죠

어머니가 심어 놓은 신 꽃에게

눈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소중한 자식

어머니의 예쁜 꽃입니다.


난 알아요

우리를 보듬는 거칠어진 손마디가

우리에게 주는 값진 사랑리라는 것을


                    <어머니 사랑>


아버지 역할은 비교적 어머니보다 행동반경이 크고 어머니는 내면적으로 사랑으로 대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아버지의 큰 사랑 어머니의 작고 속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는 것을 시로 표현하고 시로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지가 곧 사랑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식을 위해 온갖 시련을 감내하면서 사투를 벌인다. 짐승이나 인간이나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아픔이나 비극도 몸소 감내하는 이유는 단지 종족 보존의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위한 존재의 합리화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누구나 그렇듯 맹목일 수도 있고 그런 일로 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은 식솔을 위함이고 이는 긍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면 그 이유를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은근하면서도 깊은 내면의 따스함이 어머니의 사랑에 닿고 있을 때 한 가정의 화목과 평온 행복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이기에 기둥으로서의 아버지 사랑은 너무도 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날아오르는 꿈을 위해> 에필로그-


시인은 그리움과 사랑을 모티브로 그의 시 정신을 현란하게 요리하는 듯하다.

모든 시의 바탕은 이런 정신의 기저(基底) 위에서 출발하고 또 귀환하는 것이다.

그리움이 사랑으로 가기도 하며 또 사랑이 그리움으로 내장된 의상을 걸치는 순환의 이미지가 포장될 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라 본다.

또한 시인의 시적 기법은 물의 의미를 통하여 이쪽과 저쪽으로 이동하는 매개체의 구실을 하기 때문에 비나 물이나 바람의 이미지는 그런 충실한 전달의 임무-일종의 배달과 같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역시 삶의 깊은 원동력의 근거가 되고 이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에너지 공급의 은혜를 잊지 않고 노래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정이 깊은 시적 감수성이 예리한 듯하다.

삶의 동력은 다이내믹하지만 심사(深思)한 내면에서는 애조의 마음이 때로는 여린 듯하다.

그의 시에 자유정신은 중심축을 이루면서 시의 깃발을 휘날릴 때, 안식과 평화의 도달을 염원하는 정서적인 사랑의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라 느끼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02. 09. 16.


금요 저널 주필/칼럼니스트/

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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