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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이념의 심화 이대로 좋은가?】

『문학 편향(偏向)성의 문제』  

한국문학은 현재 이념의 사상과 상대성 원리로 갈림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섭 칼럼집]

한국문학은 현재 이념의 사상과 상대성 원리로 갈림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픈 부위를 치료하고 메스(mes)를 들이대 종양을 제거해야 할 상항이라 판단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이념에(이데올로기) 매몰되어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학인, 세속에 묻혀 아웃사이더로 활동하는 인재들을 불러내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이 현상을 타파해야 한다.

사실 한국문학은 1998년부터 현재 문학의 판도는 조용하다 못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소수의 문학인만이 한국문학을 좌우지 하는 것을 보면서 뚜렷한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초야에 묻혀 사는 수많은 문학인이 있거늘 침묵이 일관하는 현 상황이 과연 좋은 것인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문학 발전을 위한 발언이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필자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또 시작되었다. 이사장을 선출하느니 분과 위원장을 선출한다느니 카톡, 문자 등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사실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한국과 북한의 대비가 중요하겠지만 현 북한의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젊은이 하나가 왕족 세습과 우상 숭배가 무슨 문학인가?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 무슨 문학이 있겠는가?

한국문학도 만인보니 노벨상 입후보 다 하면서 문학인을 흥분시키더니만 기껏 미투라는 소송에 걸려 보이지 않다 무슨 심산으로 시집을 출간했다고 언론에 집중을 받는 것을 보니 참으로 이율배반이다. 최소한의 도덕적, 윤리적 사과를 하고 상재를 하든가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리도 뻔뻔할 수가 있으며 그리 추한 모습을 보이는지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알만한 이름들이 줄줄이 있으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모두가 안속주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문학의 문 앞을 서성거리던 작가들의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지는 물음표일 뿐이다. 늘 반복적으로 환기(換氣)시키고 어필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문학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평가이지 무슨 이념과(이데올로기) 세력과 패거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에게 치열성을 강화하는 일이 한국문학의 심도에 이바지하는 대답일 수밖에 없을

때 한국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문학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국은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 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분명히 말하지만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思想)의 승화(昇華)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 그런가 하면 설명이 간단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 보다는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은 이상 없다> 같은 위대한 전쟁 문학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고대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통일 = 『필자는 통일이라고 보지 않지만』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 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 정립에 따른 각 충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일의 안목이 없었으며 근대 시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7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나 통렬하고 패배주의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에게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에 금시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정치가는 지난번 한국에 무슨 간첩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정말 한국에는 간첩이 없는 것인가? 그 정치인에게 묻고 싶다.

버젓이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 해지며 서시 예산으로 아이들 북한 교육을 시켰다는 뉴스에 기가 막힌다.

북한은 아직도 세습정치를 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겠는가?

오로지 김일성 일가로 향하는 문 이외는 모두가 차단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우리>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합리로 둔갑이 되고 지속적인 미사일을 쏘아대는 현실에 <우리>라는 정서가 필요한 것인가.

완전 좌파 사상 최면을 이용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서 북한을 찬양하며 편 가르기, 우리라는 이분법으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라는 실정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의 터가 없는바, 일방적으로 공동선(善)이 없어지고 독선적 메아리만 울리니 이 어찌하오까?


<나> 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자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 사상의 발전 모델이라면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끼리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는 것이기에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한다는 점에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유행했던 대하소설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로 보여(Showing)주었을 뿐 정작 작가의 고뇌가 담긴 해답(healthy thoughts)은 없다고 단언한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텔링의 깊이에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한다면 사랑방 수준이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귀족으로 자기 사상을 실천하기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배분하였고 <땅만으로 살 수 없다.> 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종국에는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이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가장 추운 겨울 1월 우랄철도의 시골 역에서 쓸쓸하게 죽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었다는 감동은 그의 인간의 도의와 의리를 참된 삶의 표상을 보고 멋진 삶이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진리(眞理), 열애(熱愛) 왜 톨스토이는 그런 말을 했을 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실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等價)를 이룰 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불어 놓고 획득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최고의 걸작 소설인 <모비 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생전 갖은 모멸감과 굶어 죽기 전 언론에 죽었다는 기사 하나 나오지도 않았으며 그만큼 멸시와 모시와 고독을 감내했다.

살아생전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그 후 70년이 넘은 후에 평론가에 의해 빛나는 시인이 되었고 우리의 애국지사 한용운은 1926.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운동의 실패, 옥살이 3년을 한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1965- 40년 후 박노순 인권한의 <한용운 연구>에 의해 유명 시인으로 등극했으며 애국지사라는 명칭까지 얻었다.

사실 윤동주도 많은 시(詩)를 집필하지 않았지만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유명해지고 애국지사라는 칭호까지 받은 것이다. 다만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 사상의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이다. 물론 이육사도 그렇지만-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이 파문은 따라오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라는 함정이 기다리고있다는 것도 경계해야 할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3의 자리에서 창조하는 길인 것이다.

흔히 문학은 정신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결국, 문학에 본질은 사상의 실현이고 정신이 곧고 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바라보는 본질에 있어 올바름은 사실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기에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는 멀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끝으로 문인의 사회는 정신이 올곧은 집단이다. 때로는 얼음에 박 밀 듯 완고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신의 기둥을 갖고 살아온 선비 사회가 아닌가  

선비를 선거로 뽑는 일이나 숫자 놀음으로 어른을 뽑는다면 정치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집단이 이리저리 쓸려 다닌다면 외면은 당연지사이다. 바로 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는 일이 곧 옳은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라는 점에서 정신의 조타수인 문인 사회의 헝클어진 현상을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특히 문단이 선거꾼들의 경연장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문단의 상층부엔 쏠림 현상으로 눈을 두리번거리는 협회의 간부들로 가득한 현상이라면 퇴보로 이어지는 이상이 있음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필요할 것 같다.


2023. 01. 2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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