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진흙 속 연꽃이 돼야지】

『자기 정화』

경기 이천으로 안착한 지 1달이 넘었다. 집 앞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다. 그곳에는 수련이 가득하고 넓은 연잎이 서로 세력을 겨누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경북 영덕 카페에서]

연못이라 하지만 너무 작아서 연못이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붕어, 잉어, 미꾸라지 등 다양한 종류가 서식하고 그 외에도 수많은 생명체가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낚시를 즐기려고 했지만 눈이 내리고 동면이라 얼음이 얼어 낚시는 고사하고 연못으로 구경거리만 되었다. 오히려 봄이나 가을이 되면 연꽃의 광장으로 보는 풍경이 좋아 그런대로 만족이다. 일단 수련의 힌 꽃과 붉은색의 조화가 아름다울 것 같아 필자가 글을 쓸 때 막힐 때 슬리퍼를 끌고 연못에 않아 물속을 바라보는 일이 될 것 같아 다소 봄, 가을이 기다려지는 호사도 누리고 있다.

수련보다 잎이 큰 연꽃의 모양새가 단연 수련보다는 높은 키를 앞세워 우뚝함이 좋을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 연못을 한 바퀴 돌고 얼음꽃이 맺어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자연의 신비함에 어떻게 살아가는 일이 좋은 방법인가를 터득하면서 정말 어느 선이 되면 어김없이 물이 넘치는 현상, 그리고 솔직함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올바른 태도인가를 가르쳐주는 자연의 신비함에 나 자신을 숨 고르게 하는 자연의 이치를 배운다.


불가에서는 연꽃이 상징으로 사용되므로 연꽃은 사실 교훈적이고 고고성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래 사색, 고독, 멍 때리기, 등은 자신과 싸움에서 끝없는 인내를 수반하는 일이고 고달픔을 이끌고 가는 보폭에 때론 물이 고이고 아픔이 다가오는 신음도 수반되기에 검은 물감이 들어 추한 오욕의 운명을 감내하는 일은 세상사에 너무 자주 보는 일이기에 추한 세상 판도와 적당히 떨어진 세상을 저만치 두고 사는 태도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일 것이라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나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꽃과 연잎은 오물과의 거부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순수를 지키는 사실일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상징으로 말하는 이름이 연꽃일 것이며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욕심에 지칠 때 더러운 나락(奈落)으로 떨어진다. 더 많이 추가하는 욕망의 이불을 덮고 결코 따뜻할 수 없는 것이 욕심의 결과라 한다면 당연히 버려야 하지만 오히려 성곽을 높이 쌓고 성벽을 높이는 것이 인간사의 욕망인 것이다.

그러나 연꽃, 연잎의 솔직함을 연상한다면 작은 바람에는 슬슬 움직이는 뜻이 보이고 강한 바람이 불면 물에 닿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며 바람이 지나면 키를 높이는 고고한 모양의 하늘이 담아지는 것이라 한다면 서리꽃이 지워지면 욕심을 버리는 일은 말 그대로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사람은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어지고 꺾어지는 흔들림에 스스로 견딜 수 없는 비극을 부르지만 연꽃, 연잎처럼 곧은 의미 앞에서는 비교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연꽃과 연잎을 지속으로 비유를 드는 것은 연꽃은 자기 정화의 숭고함과 거룩함을 갖고 있는 자연의 순수이기 때문이다. 구정물에서도 아름다움의 꽃을 피우고 신성한 상징으로 옷을 입는 것은 바로 자기 정화의 수순이기에-

인간의 일생이 넉넉잡아 100년이라 한다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수유(須臾)인 순간을 넘기는 것도 괴로움과 아픔 그리고 고난의 언덕을 넘기 위해 멈출 수 없는 중심 잡기의 어려움이 있지만 이기와 타락을 범하는 속된 욕망이 넘실거리는 일상을 넘어 자기의 중심을 바로 하고 귀감의 삶을 사는 일은 풀잎에서도 혹은 작은 꽃잎 하나에도 빛나는 교훈이 될 수 있다면,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바로 하는 자세야말로 가치의 삶일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일생을 살면서 지로로만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의 숙명처럼 타고난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으로 자기 자신을 정화하면서 불을 크게 켜고 곧게 산다는 명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기 수련, 혹은 중심 잡기라는 숙제를 처리하는 신념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시련은 일생을 살면서 쉬지 않고 다가오고 이를 극복하는 일은 방심하지 않는 자기의 발견이 없다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오면 바람을 따르고 물이 차면 비우는 일이 우선이고 때 묻는 일을 한사코 거부하는 생리적 몸짓에서 내 삶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연꽃(잎)에 마음을 묻는 것은 바로 나를 건져 올리는 숙제를 재촉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심 잡기를 양심에 따른 것도 용기라면 용기를 얻으면서 정화하는 연꽃을 기다리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갈 것이다.

비록 산속이지만 말이다.


2023. 01. 1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자택 연못 1]
[우아하고 정갈한 연꽃]
[자택 겨울 연못 2]






작가의 이전글 【글을 쓰는 사명감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