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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명감이란?】

『자신의 그릇 크기』

[경북 영덕 바닷가에서]


달을 탐사하고 다누리호가 우주 궤도를 세계에서 7번째 달 탐사를 한다는 것은 대부분 알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크기가 얼마인가? 별의 크기가 얼마인가를 가늠하는 일은 인간에게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억만 전 전에 떨어진 별이 지금에야 떨어진다는 과학자의 말을 빌 보면 수수께끼이며 난제는 난제이다. 물론 객관화일 때는 별과 나와의 관계설정에서 크나큰 괴리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러한 예들은 무수히 많으며 인간의 숙제는 너무도 많은 양이 인간의 뇌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모두를 뇌에 저장해놓고 살다 보면 각 종 스트레스, 많은 질병이 생기는 것이라고 정신의학에서는 연구하며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여 적당히 잊고 살며 나만의 생활공간을 찾아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며 잊고 사는 방법도 현명한 삶의 한 방법이라는 가정을 할 때, 우주의 중심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식이 자아 <나>가 중심일 때 객관성이 성립되고 많은 크기의 사물들이 존재 이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사실 필자도 글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글은 나를 위한 위안의 글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래야만 창작이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술술 풀리는 글이 되는 것이다.


글이란 원래 나를 위해 나를 위안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상의 문학을 조금만 연구하면 대부분 자기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희망이나 미래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말이다. 그와는 반대로 한용운의 글을 보면 자기를 위한 글이 아니며 타인 즉 나라를 위함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내가 배우고 읽고 나름대로 유추해보면 다수의 시인들도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청마 유치환선생의 글은 대체적으로 사회적 관심, 혹은 자기와의 설정에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인식을 비분형으로 기록한다면 이 또한 삶과 생을 이끌고 나가는 방법 중에 하나로 예를 들 수 있겠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나는 해양(海洋) 같은 권태(倦怠) 속을 헤엄치고 있다. 지느러미는 미적지근한 속에 있다.

아해(兒孩)들은 아우성을 지르면서 나의 유쾌한 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구릿빛 살결을 한 남아(男兒)처럼 뵈는 남아(男兒) 두셋이 내가 누워있는 곁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모색(暮色)이 마니토 모양으로 그들의 시체(屍體) 같은 불결(不潔)을 휩싸고 있다.

오호(嗚呼)라 아해(兒孩)들은 어떻게 놀아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다.』


『이상(李箱)』 <이 아해(兒孩)들에게 장난감을 주라> 등에서

사실 스스로 잘 놀 줄 아는 김혜경(이상)은 객관적으로 놀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라는 의도라는 것은 따지자면 자기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상의 문학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이런 형태의 수동적 상태, 즉 절망을 희롱하고 놀이로 삼는 기록이 이상의 1인칭 문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말 거창하고 초 현실적인 주의를 회피하고 무거운 의상을 걸치고 있다는 것은 설익은 학자들의 이상한 편법에 불과하다고 개인적으로 보는 것이다.

<날개> 또한 금홍과 이상의 기록일 뿐이며 <주지회시> <봉별기>등은 가장 두드러진 자기 형태의 기록물이라 하겠다.

장난감의 의미를 풀어나가는 일은 곧 이상 문학의 본질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며 개인주의적인 자기표현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욱 명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놀아야 하는가를 모르는 아이들은 ‘급기야 그들은 발명을 한다. 장난감 없이도 놀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됨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해(兒孩)가 놀지 않는다는 현상은 병이 아니면 사망(死亡) 일 것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으로 진행된다.

결국에는 이상의 문학은 1편의 수필에서도 쉽게 자기 자신과의 놀이 문학이라는 발견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기를 천재라고 생각했으며 모든 현상이 절망과 희망이 없는 절벽과 절망으로 둘러싸인 사회적 상황에서 탈출구를 확보하는 일이 지각될 때, 불안한 존재의 탈출 방법이 예술이었고 그중에도 문학은 가장 적합한 자신이 나아가는데 탈출구였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절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혹독한 겨울이라는 상징을 앞세운 일제 치하를 대입한다면 똑똑하고 탈출을 모색했던 젊은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설정하고 놀이로 치부하는 기법이 과연 옳았는가는 앞으로도 지각이 있는 평론가들의 몫이라 하겠다.


어여쁜 온갖 꽃들

모두 보았고

안갯속 꽃다운 풀

두루 누볐네

그러나 매화만은

못 만났는데

눈바람 이러하니

어쩜 좋으랴


               =한용운 <고우(古友)에게 보내는 선화>=


고우는 최린의 아호이다.

독립선언으로 감옥에서 3년의 옥살이 중에 쓴 한 시(詩)를 풀이한 시(詩)이다.

“눈바람”의 시대 공간을 한탄하면서 매화를 그리워하는 염원이 절절함에서 자기의 목적이 아니라 공익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아픔을 친구 최란에게 하소 하는 시이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보다 큰 자기를 구원하는 이미지가 월등하다.

한용운은 거의 모든 표현을 이런 기준 잣대에서 벗어남이 없는 작품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아울러 그의 소설 <박명>의 주인공인 순영의 삶도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불행을 준 남편을 끝까지 봉양하는 희생과 헌신을 테마로 설정한 것은 바로 한용운의 정신 기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상과 한용운의 표현 방법이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결국 자기만큼 표현하고 대 사회적인 의식과 자기만의 한계를 갖는 이 두 방법은 어느 것이 월등하다는 판단은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 자기만큼의 스케일을 표현한다는 그 자체는 차이가 엄존한다는 뜻에서 볼 때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글은 그 무엇이라 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쓰면서 자기만큼 표현한다는 주장=

사실 나는 얼마의 크기이고 사명감을 갖고 계량하지 못하는 우둔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지는 글쎄올시다? 이면서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누가 누구를 평한다는 것은 자기 자유이지만 그러나 글을 쓰는 작가라 한다면 사회적 국민적 공감이 가는 크기와 정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보면서 나만의 개인적 비평을 하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1. 1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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