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모두 내려놓기】

{비우기 방법}

욕심과 마음이 가득 차면 비워야 한다고들 한다.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버려야 비우는 것인가?

이러한 이치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 일상이다.

가득 채우고도 욕심을 부리는 부류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더 어렵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어쩌다 저녁 식사에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었다면 속이 더부룩하여 어김없이 뛰고 걷고의 반복을 해야만 거북한 속을 달랠 수 있어 편안히 잠들 수가 있듯이 이런 이치는 비단 먹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비유는 아주 현명한 예일 것이다.


어느 대학에서 2~3년간 강의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의 예를 들어본다.

학생 대부분 버리지 못하고 지리멸혈 하게 글을 끌어 학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글이 이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수업을 받는 입장이라면 수업받은 내용을 인용이나 가공하지 말고 자신의 창작으로 만드는 것이 기본이라 할 것이다. 글을 인용이나 가공하여 끼워 넣는 일은 욕심과 표절이라 밖에 할 수 없다.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창작을 위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산뜻하고 글이 신선해지는 경우를 본다면 그때야 긍정하는 것을 볼 때면 나 또한 그런 젊은 시절의 삶을 살아왔다는 고백이 아픔으로 변한다. 이런 후회의 경우는 자꾸 반복된다는 점에서 수도(修道)라는 말이 타당할지 모르겠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다짐에 지속성을 가져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지만 망각의 늪에 빠져 지나치는 일이 빈번할 때면 자학의 자화상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벽을 둘러치지만 이 또한 얼마쯤이면 다시 되풀이되는 필자가 스스로 놀랍기까지 하다.

모두가 욕망에 먹히는 일이 이유에서 이기 때문에 새로운 발상으로 더욱 가열하게 창작에 열과 성의를 다해야겠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버린다는 것, 비운다는 것에 대한 명상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숙제일 때 늘 염려가 자라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비운다는 또 무엇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하는가의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어느 지점에서는 약한 소리로 잦아드는 것도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바퀴는 비어 있음에도 큰 짐을 실을 수 있는 것이나 빈 강의실 때문에 학생들로 가득 차는 일이 기대로 돌아눕는 이치는 익히 아는 일이지만 이러한 교훈이 꼭 들어맞는 진리로 행사하기엔 너무 복잡한 세상사에 저축의 의미는?

많으면 많을수록 여유가 있고 풍부한 재력이 있으면 그로부터 가득히 채워지는 일이 다가들면 비워야 한다는 일상의 진리는 발이 아프고 정신이 아프다. 왜 그런가 하니 그 재물을 관리하려면 그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겠는가?

인간은 교훈만으로 살 것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렇기에 때론 우둔하게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둔만으로 살았다가는 무덤에 갇히는 운명도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에 따른 저축은 비우고 버리는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치부하련다.      


남쪽의 땅 많은 부자가 베풀기만 해서 세상사 인심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작농에게 과도한 상환 재촉을 거두고 집 앞에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미곡을 내놓아 가난을 돕는 일로 후하게 처신했으므로 얻었던 찬사는 “있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면 어려운 사람을 위해 베풂은 곧 나를 채우는 일로 보답을 받는 일일 것이다.

비우고 버리는 일을 열성으로 하다 보면 없어지는 소멸이 아니라 결국 채워지는 넉넉함을 얻게 되는, 빛나는 이야기가 따라올 것이라고 분명하고 명확하다.


우리는 늘 욕망에 포로가 된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욕망에 적당의 함량은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도 될 수 있고 비로소 여유롭게 타인을 위한 몫으로 마음을 정리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2가지의 경우가 균영 추를 적정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다.

결국 중용(中庸)의 미학이 선두로 나와서 실천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그 기준이 모호하지만 결국은 타인의 경우와 조절 점과 기준점을 갖출 때 비로소 너와 나의 균형은 이름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눈이 떠지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너와 나를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있을 때 비로소 헤아리는 마음의 평화가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 속에 꼭꼭 채우는 욕망은 어떨까?라는 의문에 다가선다.

왜 그런가 하면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쌓아지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 종일 청탁의 원고를 쓰고 있노라면 엉덩이가 아파 도저히 산책해야만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의 욕망은 잘못일까?

사실 산책과 안마기로 조력받을지언정 이런 글 쓰는 날이 없다면 필자는 폐품의 낡은 운명을 감내하는 시간이 될지라도 이 글쓰기의 욕망 덕택에 재미와 고료로 산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나의 미래의 시간이 될 듯하여 피식 웃음이 나온다.    

기실 필요에 의해 응대하는 것은 존재의 가치와 같다고 한다면 틀린 말일지?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토해내는 글의 수로를 갖고 있음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신을 만든 인간의 지혜가 신의 발목에 걸려 함정에 빠지는 영악한 우둔이 되는 것이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인내와 절제가 우선시되는 것은 이치라 굳게 믿으며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1. 1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작가의 이전글 【한국문학 이념의 심화 이대로 좋은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