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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과 운문이 통합될 수 있을까】

1. 산문과 운문

사실 우리가 수필을 가지고 산문(일정한 운율, 정형성)이라 하기도 하고 아니면 시적 기법을 가리 킨다고 하여 운문(운율적 작문= 시에서 느껴지는 가락)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수필에 대한 우호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산문과 운문의 경계를 통합하는 면에서 볼 때 어느 문학 장르보다 포용력이 넘치는 주요한 기능을 수필이 감당하고 표현해야 하는 의미라 볼 수 있겠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장르 개념에서는 수필은 산문에 소속을 두고 수필을 산문이라 칭하며 대세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필을 산문의 영역에만 한정할 때 수필이란 특성에 문을 닫아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넓은 의미의 수필이 소 논문류,라는 기대감조차 허물라는 뜻은 아니며 오히려 수필이란 특성을 확장시키는 기능에 뜻이 앞서간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수필의 특성을 고조하는 이유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소견이다. 지금까지 수필은 산문의 영역에 한정시키는 일들이 필요한 일이었던가 아니면 수필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운문의 2번째 주자로 임명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닐까도 생각이 든다.


필자가 많은 글을 읽고 쓰고 있는 바 수필을 쓰면서 느끼는 감정과 표정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산문이란 글의 이미지가 문장 팽창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시 말하면 연필이면 연필의 사실성과 가치는 곧 상상력의 근거에 의해 충실하기보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와 근거를 대입하면서 실물을 대면하는 것 같은 리얼한 실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실감을 외면하면 추상적이고 목적성이 떨어지는 뜬구름 잡는 허상이며 질이 떨어진다는 가능성이다. 이른바 현 사회를 복사하며 정치를 복사하듯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일이 충실성을 거론한다는 점에서 수필은 결코 따를 수를 첨가하는 일이 아니라 작가가 주도적인 마음으로 이끌고 가는 글의 속성을 가져야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중심이 있는 묘사이거나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울러 수필은 무드를 중하게 여기는 뜻을 윤오영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는 뜻이다.

그의 희세의 대작은 타고난 천재라 했듯이 말이다.


사실 수필은 딱딱한 현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아니라 보이는 것에 근거한 이유 혹은 왜, 그렇게 보일까,라는 분위기가 살아 있을 때 비로소 미적 감수성이 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남, 여 가 결혼을 하기 전에 이벤트가 있는 고백의 의식이 있는 사랑의 무드와 절차 없이 무뚝뚝하게 사랑이라는 입구로 들어가는 경우 전자에는 성공의 확률이 높지만 후자에는 실패할 수가 더욱 많다는 뜻에서 즉 꽃과 음악 혹은 분위기를 띄우면서 사랑의 권유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여지가 많다는 뜻에서 수필은 무드의 고백이라는 뜻이 맞지 않을까?

이러한 무드는 시적 혹은 음악적이라는 유연성을 갖는 이치일 것이라면 수필이 무드와 손을 잡는 것은 그만큼 여백과 여유가 넘쳐날 것이며 부드러운 서정에서 빌어올 수 있다고 본다.


수필에서 서술이 드라마틱하고 긴박하게 나간다면 단편 소설에서도 빌어올 수 있다는 논리는 어떨까?

설리는 평론의 방법이고, 묘사는 배경소설의 수법에서, 문장의 탁의는 시의 메타포에서 확 중 된 것일 것이다.

문맥의 어휘와 정연함은 논설문의 수법에서, 독자에게 친절감, 관심도, 등을 잃지 않는 것은 저명한 서간문의 수법에서 사색적이요 반성적인 것은 저명한 일기문의 수법, 문장의 활기 있는 긴장(緊張)은 희곡의 수법, 문단과 문단이 갈릴 때마다 청신(淸新)한 전환(悛換)은 시나리오의 찐한 장면을 바꾸는 솜씨에서 자유자재로 섭취, 습득 활용해 가며 자신의 톡특한 문제와 신선한 문태(文態)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진정성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결국에는 산문(희곡, 소설, 수필)과 운문(시적 기법, 정한 리듬)이 결합하여 수필의 특성이 있다는 요지의 경계라 수필은 경계의 공간에서 능수능란하게 왕래의 특성을 완성할 수 있다는 근거로 도출되는 것이다.

사실 문학의 모든 영역의 장점을 습득하여 수필의 표정을 관리하는 일은 아무래도 부드러움에서 나타나는 특성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2. 경계의 구분 허물기]


운문은 탄력적이고 계획적이면서 미래를 보면서 여정을 재촉하는 것 같은 묘미가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이는 제3의 변화이면서 수용에서의 더욱 넓은 의미를 담는 일과 같은 뜻이 있다.

요즘은 문학의 특성을 퓨전(fusion)이라는 경계 허물기라고 주장하다 보니 예외는 아닌 듯하다. 문학뿐만이 아니라 사회현상이 그러하다. 이미 남녀의 경계는 무너지면서 남남, 여(女)여(女)의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문학에서도 수용하는 추세이며 넓이의 확장성이 다양하고 벽이 없어졌다.

음식에도 퓨전은 다양한 음식의 맛을 낼 수 있다는 논리이다.

동성애가 인간의 결합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하는 시대이다. 그 변화가 새로움, 혹은 신선 담백하다고 한다. 이러할 진데 문학의 이해 수필의 이해에 변모는 곧 수필의 변모 현장을 새로움으로 교육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하물며 소설이나 희극을 쓰는 작가들이 인생 마지막에도 시집을 출간하고 시를 소설의 장르를 삼아 유연미를 표출하여 그만큼 감칠맛난 음식으로 변모하는 재료들의 구비와 같이 수필의 속성 그리고 산문과 운문의 경계에서 이 둘의 특성을 살려 표정의 다양성을 화려한 모습으로 그려내는 재탄생의 퓨전 수필이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평면적 글쓰기가 보다 확장된 입체성으로 변화가 전제되는 시기가 왔다고 볼 수 있겠다. 가끔 브런치에 들어가 글을 올리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의 글 내용을 보면 창작의 다양성을 보면서 필자도 이제 생각을 이상적으로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확장된 입체적 산문과 운문의 조합성을 개발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3. 지구의 순환 구하기]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래전부터 문학의 퓨전화라는 말이 곧 사회적 변화 현상의 특성과 맛 물리는 현상을 대입해 왔다.

장르의 추세가 탈장르가 될 것이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현실화될 것이기에-

왜 그런가 하면 과학적 사고의 발달은 추상의 아득함에 이르고 언젠가는 다시 구상으로 돌아가 돌아가는 순환의 논리는 늘 원(圓) 즉 지구는 회전한다는 평행이론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느 때부터인가 과학 <science>(인터넷, ai, 반도체, 로봇, 바이오)이 절대의 신뢰성을 부여하기 시작하고 달을 탐사하고 화성을 탐사하는 위치까지 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빙하의 얼음덩어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 3/2 도는 물에 잠겨 있다고 한다.

기후 이상으로 기후 대사라는 명칭까지 붙이고 있다. 그만큼 기후가 지구에 보내는 신호는 더 심각하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도 우리는 일이관지(一以貫之)로 남게 된다.

문학의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사치를 가질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런 현상은 사물을 바라보는 문제 Min’s Eye(심안)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문학의 표현은 보이는 것의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안으로 숨겨진 것을 말하는 점에서 표현의 묘미를 구유(具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의 경우 사상의 깊이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이란 삶의 축적 혹은 생각의 깊이를 이름한다면 수필은 보이는 것을 말하면 독자들에게  식상하게 되고 글의 맛을 저상(沮喪)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생의 시간을 보내고 곰삭은 맛을 가질 나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아무리 적어도 지천명쯤 되어 체험과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함이 아니겠는가?


결혼의 늪에서 고통의 맛을 보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초조와 실패의 체험을 겪은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길에서 맛본 여러 감식안을 가질 수 있는 경우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여 시를 쓰는 시인은 약관의 나이에 뛰어난 상상력의 작품을 생산할 수 있지만 수필은 사십은 넘어서야 수필의 묘미를 감식하는 혀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원숙은 곧 글의 원숙과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하는 길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여기서 체험과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실 상상의 창작으로 이어지기에 하는 말이다.


[4. 상상력의 채득 경험]  


시는 상상력의 함량이 80% 이상이라면 아마도 상상의 길을 만드는 일이 곧 시인의 길이다. 유명한 명작 소설은 대개 50세 이후에 나왔다는 산술적인 답안은 경험의 원숙이 곧 사상의 형성을 의미하고 이를 표현하는 일이 곧 소설이 전(全) 과정이라면 수필은 어떨까?

경험만으로 쓰는 글인지, 아니면 상상의 요소를 도입하는 점일까 라는 의문에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더러는 인용의 페달 틱 함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일과를 스는 미셀러니 <개인적인 일>의 표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도 문학의 장르일 때 상상력의 근원을 차단한다면 수필을 예술의 입구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수필은 체험의 요소를 바탕에 두고 상상의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나의 입장이다.

약 20% 정도의 상상-

사실 여기서 계량적인 문제는 문학에서 한심한 인용일 것 같다.

여하간 수필의 경우 상상력의 개입이 있을 때 윤활유의 역할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수필은 경계를 철저히 타고난 운명이라 말하고 바칠 수 있는 장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5. 문학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수필의 주인은 좌고우면의 방법을 익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작가들과의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공유하는 일정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임무이어야 한다. 배로 예를 들자면 선장이 되어 선원과는 다른 정신적 사고가 있어야 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동력을 이끄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선장은 선장의 임무가 있고 선원은 선원으로 임무 몫이 엄정하게 다르기에 마찬가지로 수필도 이러한 이치에 따를 때만이 명확한 표정을 연출하는 임무가 생기게 되는 것이며 특징 또한 생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도 아닌 맹탕의 정의는 곧 정신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다. 

사실 문학에 주인이 그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통합의 리더십을 말한다면 수필은 시적이면서 산문적이고 운문적인 특성을 통합할 수 `있기에 비로소 수필의 역할이 확고하게 설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시(詩)는 어디까지나 시(詩)의 길이 있는 것이며 수필은 수필로서 길이 있으나 굳이 수필이 어느 장르로 가야 정의인가 한다면 필자는 시(詩) 쪽으로 와서 수필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수필의 유연성, 확장성, 설득, 그리고 표정에 미(美)의 심도(深到)와 맛을 한층 더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반면 수필가가 시인의 흉내를 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통합의 중심을 잡고 기교를 한층 부릴 수 있다고 아웃사이더인 필자는 당당하게 가는 길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끝을 맺으려 한다.


2023. 01. 1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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