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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시조(諷詩調)의 수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3행의 <룰> 정답인지는?』

문학도 굳이 에 콜리지의 이론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생사의 과정을 거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생존의 정글 법칙은 살아남는 이유를 내장하면서 진화하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문학의 땅은 이런 존재 법칙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격과 표정을 갖고 삶을 유영하는 점에서 인간의 곁에 머물러 온 것이다. 기쁨과 행복에서는 환희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며 분노와 슬픔에서는 앙상한 가시를 앞세워 사나운 기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자체는 모순과 어리석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현장이다. 이 현장을 바라보는 지적 뇌수(腦髓)에는 두 가지의 태도가 발생할 것이다.

첫째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과 이를 비판의 시각으로 자기화하는 사람으로 구분하면 둘째는 대상에 동화되는 거리의 소멸(掃滅)이 있고, 후자에서는 대상과 일정의 거리(距離)를 유지하는 점에서 비판의 지적 기능이 작동되는 것이다.


박진환선생은 해남에서 태어나 87세에도 불구하고 다작을 펴낸 인물이다. 동국대 국문과를 거처 동 대학원 졸업에 이어 언론인(기자)으로 활동했고 동아신춘문예에 입선한 뒤 시집 <귀로, 사랑법, 등> 평론으로는 자유문학에 평론으로 문단 등단 하였고 <조지훈론. 60년대의 미학, 아쉬운 시적 사명감 >등을 상재하였고 지난 몆 년 전 풍자 시(詩)를 1-94권을 펴냈다. 풍시조의 개척자였으며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정은 죽었다”]의 94권에 일관한 시인으로서 총 404권이나 묶어냈다. 양적인 면에서는 조병화 시인보다 압도적이다. 2000년도에 접어 풍시조를 개척한 분이다. 친구로는 조지훈, 박진호, 문효치, 조병철, 이우석 등이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시집을 출간하여 화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풍시조를 개척하여 “풍시조 시구” 이론을 제시하는 등 시론을 실제화, 시론을 통해 실험과 통한 시집을 펴내고 있다.

그의 삼행 시를 열심히 연구하고 그의 기록을 참고하고 문헌을 보았으나 3행 70자 내외의 시를 쓰기가 쉽지 않고 평도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다시 한번 [그의 3행시] <풍시조(諷詩調)>를 개인적으로나마 수용하지 못하는 함량을 이곳에다 옮겨보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않기를 바란다.


시인에 의해 시도된 풍시조 <쪼>의 형태는 오래전부터 풍자 시에 <쪼(調)>를 더하여 대체로 3행 70자 내외에 실험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몇 권의 저서를 발간하고 있다. 그러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산문적인 형태의 기법에서 일탈하고 있고 형식에서도 일정한 형태의 3행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과거의 친숙한 모습과는 아무래도 다르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풍시조는 몇 개의 실험을 거친 과정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1991년 시집(詩集, 기타)을 발간하면서 풍시조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슨 실험이나 의도에서 쓰여졌다고 할 수 없고” 의 말로 보자면 확실한 것은 신념에 의해서 시도된 변화는 아직도 물음표(?)이다.

그러나 그의 25, 시집(詩集)에 이르면 모조리 시집의 제목이 풍시조(諷詩調)> 2007년 3월로 탄생되는 것이다.

서문에서 “살아있는 문화적 육성이 있다면 바로 풍자 시를 들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는 주장에 이어 “꼬집고” “비꼬고” “비아냥” 하고 비판, 고발, 폭로를 목적으로 하는 시라면 악의 규정, 또는 “개선의 의도”의 비 정성과는 달리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이 말은 풍시조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물론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으로 귀환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장은 아닌 것 같으나 풍시조의 형태가 짧은 3행시라는 점과 내용에서는 풍자 시와 다름이 없다는 이유에서 풍자의 자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개인적인 생각이다.

3행을 가지고 꼬집고, 비꼬고, 깎아내리는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점에서 기본적 룰을 가지고 있다는 아주 특이한 생각이 든다.



풍자의 특성은 때로 사설(社說)인 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한계를 설정하고 의미를 구겨 넣는 일은 시적 한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창시자인 그의 말처럼 새로운 것이 아니고 다만 “명명과 시형일 뿐”이라는 점에서 정말 3행의 룰을 유지하는 이유와 새로운 명명이 시적 변형에 어떠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의 궁금증이 생긴다.  


2023. 01. 2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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