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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虛風)과 허세(虛勢論)】

『1. 허풍과 허세가 주는 사회』

허세는 실속 없이 과장되게 부풀린 기세, 아니면 겉만 번지르르하게 보이는 사람을 허세라 하며 실속 있는 사람은 알짜 이익을 보는 사람을 알찬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허풍은 내용보다 뻥튀기해서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퀴가 탱탱하면 차도 잘 나가지만 바람이 빠지면 덜컹거리고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차를 운전하기가 거북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듯 인간도 허세와 허풍이 많으면 진중하지 못하고 실속이 없고 허풍쟁이 또는 뻥쟁이라 한다.

[기흭 특집 이승섭]

요즘은 자기를 넘어서는 행동을 함에도 뻔뻔하게 각종 뉴스와 언론에 허풍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곤 한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건지 아니면 주위를 생각지 않고 자기 주관성이 너무 강하고 편견으로 보는 눈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보는 것이다. 사회는 함께하는 사회이지 누구 한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는 아니기에 금도가 있는 것이다.

세상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런 일들은 우리가 흔히 보면서 산다. 그러나 자기를 수양하고 다듬고 수행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 위에서 사회에 일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지난(至難) 한 일이기에 감수하고 노력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사노라면 바람에 휩쓸리고 비바람에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 앞에서 망연함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꾸준하게 일관성의 유지가 절대 명제로 대두되고 이럴 때 존경의 이름이 따라올 이름이라면 삶의 가치와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이 살면서 가치를 내버리면 악동이거나 지조 없는 이름이 붙게 되고 결국에는 나락의 방문은 필연이기에 자기를 세우는 일을 항상 게을리할 수 없는 덕목이라야 할 것이다.



일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돌아보는 일에 회고담이 줄줄이 흘러나올 것이다.

잘했던 일 혹은 실수로 창피했던 일 아니면 의도적으로 악을 방문하는 일 등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길이 달라지는 것이다. 자기가 가는 길은 언제나 타인의 영향을 받고 자기화를 수행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심을 잡는 사상의 확립이 필요한 이유일 것 같다. 물론 교육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중심의 요체는 부모 혹은 가족의 에너지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개성의 중심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인자(因子)이지만 이를 더하고 빼는 일은 생활 속에서 타인의 영향이 직접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인자의 중요성은 본질이다. 이 본질에서 가감의 길이 나타나는 것이며 여기서 전혀 다른 선택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렇게 심각한 변화는 오지 않는다.

가령 배우 집안의 자녀가 대부분 그런 일에 종사하고 가수는 가수 부모의 경우 자녀들도 그런 일에 가까운 경우는 우리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요점은 인생의 길을 부모로부터 전수받는 인자일 것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애국자의 집안에는 그런 인자가 흐를 것이고 이런 흐름은 곧 영향을 받은 것이기에 자기화로 굳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 지휘를 진행하는 것은 각자의 이성에 교육되는 것과 같은 점이 될 것이다.

과거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 생각하지만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직업이 무엇일까 라면

아마도 정치가가 아닐까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가들의 권모술수와 이간계로 거짓말을 수시로 하는 일이 다반사라 도의와 정직은 아예 무시하고 듣는 것이 정당성이지 않을까?

사실 허풍이 크고 위선의 농도가 커질수록 정치는 퇴보하는 것, 아니 진전이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직이 자 잡았다 볼 수 있겠으나 정치가의 경우만은 아니올시다, 이다

사고의 구조적인 형태가 후진이라 쉽게 개선의 기미를 갖지 못한다면 정치는 쉽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사실 백성이 뽑는 선거이긴 하나 이 선거가 선동가들에 의해 호도(糊塗)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에 인내와 느림의 길인 것이다. 서로 끼리끼리의 담합이나 자기들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특권의 지속이 쉽게 변하지 못하는 단물 단맛이기 때문이다.


요즘 통일이라는 문제가 세간의 유행처럼 번지는 듯하다. 그러나 의식의 할애가 전 백성에 전파되어 공유될 때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 백성이 북한의 동포들에게 얼마 양보와 할애의 사랑이 있을 것인가를 미리 가늠하면 자신들 위치에서 허풍이 커서 부작용만 클 것이기에 참혹한 북한의 백성을 위해 아직도 인권법이 그 자리에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정치가들은 자기 이득을 계산하면서 골몰해 있고 미래를 예상하는 허풍의 바람 소리가 미명으로 호도되는 일은 특히 야당의 경우 자심한 것 같다.

정치가의 계산은 애국이고 이 애국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우 맹목적으로 이익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기 합리를 주장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당략에만 땀을 흘리는 일이 그동안의 일이었다면 틀린 말일까?

지난번 북한 김정은이와 대못 회담을 한 것은 아마도 후유증은 현 정권 내내 지속되어 발목이 잡힐 것이다. 한 사람 지도자의 판단이 잘못되면 그 영향은 너무나 오래갈 것이고 백성에게 미치는 아픔과 혼란을 부추기는 일이 또다시 한국 정치사에 남을 것이다.



재차 강조해 햇볕을 쬐면 옷을 벗지만 교활한 북한의 김정은 집단은 오히려 그를 이용하는 비열한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인가를 몰랐다면 순진, 아니면 교활한 정략적 사고 중에 하나일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누구를 위해 북한에 굴종하였는지를 질문하면 전부 허풍과 허세로 일관한 정치가들의 말의 성찬을 들은 것이다.

허풍의 과장된 옷을 입고 국민을 우롱하는 일들이 여전히 진행형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로다.  

이 사회는 그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변하는 것이 사회의 원리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북한의 참상을 외면하면서 당리당략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민족사의 큰 죄인이다.


『2. 허세의 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행동에는 누구나 눈살이 찌푸려진다. 언제나 자기만큼의 기준 설정을 갖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스스로에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정치가는 정치가의 금도가 있고 그만큼 큼의 한계를 가져야 하고 백성은 백성에게 주어진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기”를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가치 혹은 위치에 걸맞은 행복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종교를 가진 자들이 정치적인 발언으로 국민이 뽑은 지도자를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하느니 말의 행패는 자기를 잊고 사는 어리석은 행위라 이런 일이 권위가 엄정한 시대도 아닌 데서 비난이 지속된다. 종교인들이 무슨 멘토를 자처하여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도 내가 보기엔 한심한 일인 것 같다. 누가 누구를 충고하고 지도하는 일이 종교인에게 누가 부여했는가?

종교는 오로지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거나 힘을 주는 일에 한하는 일이지 선악을 자기가 구분하며 지도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일도 허세의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이고 일종의 과시에 해당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기는 자기에 스승이고 스스로에 책임을 지는 일이라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학생도 아닌 경우에는 더욱 어리석음을 갖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무슨 멘토라는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자들의 모습에서 연민을 갖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사실 자기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삶의 파도에 휩쓸리는 일이 잦을 뿐만 아니라 변화가 많은 세파에 중심 잡기가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치 피겨선수가 얼음판 위를 곧추서는 일이 지난함을 갖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일은 피나는 연습이 해결의 답이기에 코치는 조언에 그치는 일이지 간섭하는 종교인들의 태도는 볼썽 사납다. 꽃은 향기가 나는 법이다. 이는 안으로 꽉 찬 의미이고 중심이 확실한 경우에 만나는 기쁨이라면 응당 삶의 모습은 이런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중심에서 벗어난 일들이 세상을 간섭할 때 혼란이 오고 그 혼란은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부메랑이 되는 이치를 아는 일은 생의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문인들은 정신을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본다. 여기서 비평 정신이 필요한 소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존경의 지름길은 확보하는 일이 될 때 글의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면 그 나름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어느 문인 행사에 참석해 보니 무슨 국회의원, 등단시켜 준 사람을 상석에 아 손가락질을 하며 위풍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그 이후로 그런 행사 자리에는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위계질서가 행정적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도덕적인 일이 우선인가는 글쎄올시다?이다.

존경이 자리로 결정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부모 자식이 뒤집혀 앉는 일과 같은 행사로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사소한 일과 같은 행사 같지만 문제 아닌 문제가 오히려 문제로 돌아서는 것은 관심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점이다.

단체의 목적이 화합이라거나 아니면 무슨 자리를 만들어 억지로 존경을 만드는 일이 아닐 것이라는 추론에서 볼 때 나의 행동은 차라리 외면하고 돌아서지 무슨 거기서 큰 자랑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추하게 앉아있을 그런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이 곧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다.

사실 글이라는 것은 나를 찾는 정신의 탐구이지 생각만으로 수도하는 그런 것이 글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흔적은 문인의 경우 좋든 싫든 글이 말하는 것이기에 신명을 다해 글에 목숨을 거는 나의 곧은 성격은 패배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뒤돌아보니 모두가 허세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선배들을 보아왔음은 교훈의 한 항목인 것이다.

그렇기에 명품 글 지적 글 한 편을 고대하고 소망하며 끝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가도 가도 허기를 채우는 소식이 아득함이라는 것도 알고 있기에 나를 깨우는 일에 정신을 둘 것이다. 앞으로도 늘 그런 모습일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2023. 01. 29.


대중문화 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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