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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주는 효과와 꿈 이상]]

『1. 시가 주는 위안과 꿈의 상상 창조』

시(詩)가 주는 효과는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면 시(詩)를 쓰는 목적에 근접하는 말이 될 것이다. 토마스 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예술은 선(善)에 가깝고 친절성에 뿌리박고 있으며 화합을 위해 단지 위안(慰安)일 뿐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왜 그런가 하면 거창한 목표에 헌신하는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력한 허무주의자의 독백도 아니다. 생기와 즐거움을 이어주는 단순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무목적이 아니라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다.

시인은 무료의 심심풀이 풍선 띄우기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3~4가지의 조건이 있을 수 있다.  


『2. 시의 구축 또는 왜』


관(觀)이란 말에는 “‘보다 자세히 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 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다. 시(詩)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있을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는 확연하게 대비가 된다. 전자의 경우엔 언어의 조합일 뿐 이리저리 무엇을 표현하려는 목적에 대한 햇갈림이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엔 비록 짧은 응축의 정결함에 언어의 의미의 숲은 이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작정 길을 걷는 나그네와 목표를 정하고 길을 간다는 비유이며 무엇을 의미로 구축하는가의  대한 자문자답이 있어야 하며 그다음 대상을 정하고 관찰, 투시하고 문자로 의식을 표현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사실 나이가 들면 과거 지향형이 되며 앞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과거형 추수의 길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지나치면 나태의 그물에 걸린다는 문제는 살아가는 문제의 개성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아, ~ 고향에 돌아와 혼자 여기 서 있네}.

              

                          <신중신 귀향 시초에서>


어린 시절에 뛰어놀던 기억은 나이 70이 훨씬 넘어 기억은 여전히 기억 흔적에 매몰된 시심이 아쉬움으로 넘쳐난다. 넓고 길었던 골목이 “기껏 스무 걸음 남짓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파릇파릇한 고개를 넘어 쳐들었네”의 모아들고 지금은 “목이 쉰 노래”를 허공에 빛바랜 꿈의 파편으로 회상의 길목을 지키는 오늘의 모습이 처연한 듯하다.

깊음이 깊어지면 허무가 되고, 어느 것도 구분하기 어려운 추상의 숲을 소요하는 귀향의 품-

노년의 신중신 시인의 모습이 차라리 친근함으로 다가든다.

시는 원래 진솔함의 문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접신(接神)을 만나는 신명(神明)』


하늘과 땅의 신령이라는 의미가 바로 신명이다. 시인은 접신(接神)을 만나야된다고 묻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신명이 잡힌 사람이 접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더 풀이한다면 시인은 산문(散文)작가와는 달리 신들린 집중력을 가질 때. 시의 모습은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무당이 신이 절정에 올랐을 때 날카로운 작두날 위에 맨발로 서서 주술을 외우듯이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전기가 통해도 전류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그것이 알고 싶다>는 실험이 있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일이야말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관습에 젖은 일반적인 사람은 불가능할 것이라면 간단하게 정리가 될 것이다.

타이타닉호는 “보이는 얼음”에 충돌하여 비극을 맞았다. 얼음덩어리는 70%가 물속에 있다고 한다. 이를 간과했기 때문에 충돌 참사가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시인의 의식은 바로 무의식의 깊이를 발굴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물론 산문을 쓰는 사람은 현상의 리어리티-

보이는 것을 얼마나 실감 나게 묘사하는 방법을 기술하는 작가와 시인은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후 어떻게 무엇을 에 목적의식을 두면서 살아간다. 전자는 방법의 문제요. 후자는 대상에 대한 구분법이 될 것이다.

시 쓰는 일에도 이런 구분의 명확성이 곧 어지러운 상태를 벗어나는 첩경일 것이다.


더러는 비비고 핥기도 하면서

꼬리도 만들어 흔들여 보는 것이다

세상 한번 편하게 살아보는 것이다

             

                 <최영욱/달콤한 상상>에서


어려운 것과 쉬운 것에 차이는 자기 자신에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중심 잡기의 생은 기준점이 필요하고 여기서 개성은 더욱 필요의 항목일 것이다.

비유로 논하자면 개처럼 핥고, 고개 숙이고, 유순하게 사는 것도 도처춘풍(到處春風)의 인생을 일어 개 같은 놈이라 칭하면 욕이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없을 때 받는 통칭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살면서 명예를 얻으면 그 가치는 짧은 것이며, 정신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면 명성이 길게 따라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들의 지조는 당시에는 고관대작의 삶이었으나 그 자손들은 숨기고 감추면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명백해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그래서 정신의 중심 잡기가 필요한 목록이다.

“달콤”의 망상은 쓰디쓴 아픔이 된다는 것을 모른 다면 역설의 기교가 시인의 의도다



『4. 토운<tone>의 일체화』


시의 가장 중요한 목록은 대상과 시인의 의도가 하나로 통합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표현하려는 사물, 대상을 어떤 의도로 충실하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의 여지는 시적인 기교를 넘어 재능으로 귀환하기 때문에 언어의 기교지만 이는 정신의 중심을 뜻하고 목적의 하나가 되기라는 점에서 일체화는 동일성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언어, 리듬, 이미지, 상징, 세제, 비유의 모든 것을 일러 토운<tone>에 충실할 때 시의 신맛 단맛의 색깔이 살아난다.

가령 아래에 시적 구절을 보기로 하자.

  


내 신발은 젖었지만 그림자는 젖지 않았다

그림자가 내게 자유를 명령했다

몸살이 시작 된다.

아직 이른 봄꽃 나무처럼     


                 <그림자가 명령했다>에서


주인공인 나는 또 하나의 나인 그림자를 끌고 다니면서 산다. 이 녀석을 떼어내기 위해서 온갖 음모를 꾸미고 벼랑에서 밀어도, 어둠에 갇혀도 다시 일어나는 숙명의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존재의 형상으로 깨닫고 바라볼 때는 새로운 자각의 길이 존재 문제로 부각 된다. 여기서 무심히 사는 사람과 시인의 통찰이 주는 삶의 무게는 완전히 길을 달리한다. 시인에게 필요한 사물이면 관찰기는 곧 시에 신선함을 부추기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5. 미상불의 신념』


시와 신념은 불가분의 개성으로 “무엇”에 해당 될 것이다. 시를 싣는 모든 책에서 공통적인 현상은 음풍농월(吟風弄月)의 그저 그 풍경의 연출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지만 자기 선전광고를 작성하는 것에 불과한 뜻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감상적인 덫, 이미지 사용의 장식, 관념이나 의도의 지나침, 모순이나 충돌이 내포된, 지나치게 종교적인 강조는 안 좋은 시의 표본이라는 지적은 학자들이 강조하는 요점이다.

미상불 시의 신념은 자기 정신 중심을 세우는 일이라 시의 표정에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관찰하는 요인이 된다.


눈물 씨앗 뿌려도

아직도 통일의 꽃

굳은 땅속에서 몸부림치며

싹을 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에서   


한때 지금도 그렇지만 민중타령의 놀이에서 문단의 중심을 장악하고 80년대를 풍미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통일의 문제는 유행처럼 아우성이었지만 막을 내리기 시작하고 목적의식이 공고하지 못하고 유행의 결론이 되었다.

“아직도”에서 분단의 아픔은 진행형이고 언제 꽃으로 피어날 것인가는 지금도 요원하다.

체제의 선전 도구일 때 광고 문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통일이라는 맹목적 타령에 문학은 상업성에 매체에 휘둘리는 지경에 까지 오고 있다.

이제 문학 가치에 방점을 찍을 때, 참된 가치의 문학이 꽃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의 제목처럼 “아직도”는 유행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본질로 눈을 돌려야 할 책무인 것이다.

무작정 통일을 기대하는 것 보다는 내실을 튼튼히 하고 서서히 탑을 쌓아 대국적인 차원에서 정부와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통일을 위한 염원은 진정한 우리 민족의 꿈이라는 갈증이 인상적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다른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라는 필자의 견해이면서 이만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2.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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