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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의 평행이론】<1>

1. 포를 로그 – 의식의 평행

가설 1) 정서는 어떻게 길을 찾는가

오늘의 나로서는 사실 아버지를 닮았고 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잇는 꼬리로 추적하면 결국 사회의 공통, 혹은 민족성에서 공통점에 이른다.

이러한 정서는 오랫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형성된 유사상의 측면에서 파악이 된다.

이를 한마디로 민족의 특성 혹은 사회 관습의 일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생존을 영위하기 위한 사람, 산속에서 삶을 지속한 정서는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특성이 도출된다.

환경이 주는 영향은 인간의 심성이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기에 -

물론 약간의 차이는 내포하지만 유사성의 접근에서는 특성 혹은 자기 개성을 짜 맞출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시를 서구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감동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나를 버리고 가는 사람에게 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정서가 서구인에겐 보편성을 가질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순종 미학이 참되고 착한 도덕적이었던 것을 대입한다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1920년도의 합리성이지만 현대인에겐 전혀 다른 반응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서 또한 변화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변화의 길은 있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


가설 2) 변화는 어떻게 오는가.   


정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변모한다. 예를 들어 1592에서 7년 동안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의 변화 – 임란 이전의 문학은 양반의 문학이었고 이후로 내려오면서 서민문학으로서의 변화를 갖게 된다.

언어도 된소리나 거센소리로의 변화, 가령 갈(力)이 칼로 변하는 것들은 전쟁의 참화를 지난 후에 나타난 의식의 현상 -  


양반만 문학을 하느냐 서민인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산문으로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격식의 파괴는 사회변화의 매듭에 따라 나타나는 추수(追隨) 현상인 것이다.

작가도 평탄한 일생을 살아온 것보다는 굴곡의 삶을 살아 이것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실감이 필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때문에 위대한 명작은 대체로 체험의 원숙한 인생 후반기에 나타나고 시(詩)의 경우는 상상의 산물로 인해 인생 전반기에 왕성한 욕구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2. 의식의 집중화 – 이별과 자연 그리고 물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또 자연으로 돌아간다. 맞는 말이라 본다.

때문에 모든 작품은 자연이 소재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 혹은 대상화가 된다. 강이 있고 강은 바다로 가고 다시 증발하여 하늘로 순환한다. 너무나 풀밭의 초록 등 흡수력을 갖는 자연의 이름은 작품의 주요 배경을 이루고 용해된다. 이별은 만남의 반대이면서 이 또한 순환의 싸이클로 인생사를 이루는 요소일 것이니, 인연법의 고리를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문학은 휴머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의 축도(縮圖)를 그리면서 비판과 긍정의 모양을 실감으로 재현하려 한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과정은 인간과 인간의 맞부디침이 문제를 만들고 다시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고 비판하는 과정도 모두 건전한 사회의 구축을 위한 일과 더불어 문학의 영원한 명제인 휴머니즘 구축에 모든 의식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학의 영원한 사명일 것이다.


1) 이별의 평행     


이별이라는 말은 만남의 반대편 개념일지라도 생로병사 혹은 우주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즉 계절의 순환에 해당할 개념인 것이다.

만남은 떠남이 이어지고 다시 만남으로 돌아오는 길이 일정한  궤도로 작동할 때, 인간은 거기에 감정을 개입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연결시킨다.

인간은 인간의 줄기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그 줄기를 벗어나는 일이 매우 힘겨운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뜻이 이별이다.

부재(不在)로의 거리(距離)를 가질 때, 이별은 문학작품 속에서 비극적인 개념으로 줄거리를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표현은 만남의 대한 사랑과 떠남에 길을 아쉽게 표현하는 관념이 주요 대상이 될 뿐이다.

그 이외는 무대를 장식하는 소품의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이별이나 만남은 줄거리의 본질에 질서를 형성하는 인자(因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 작품에 이별은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의 <왕조가>는 서정시의 바탕을 찾을 수 있는 이별의 노래이다. 여자의 질투가 가져온 이별이 남자 <왕>의 가슴을 물기로 적시는 줄거리가 한국의 이별 문학의 모태가 되었다면 신라시대 향기 -

누이의 죽음을 슬퍼한 <제망대가> 등은 일찍이 이별로 서정시의 근간을 이룬 셈이라 할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大平盛代)

날러는 엇디 살라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大平盛代)

자버와 두어리마

선면 아니 올셰라

위 증즐가 대평성(大平盛代)

셜온님 보내노니 나

가시도 셔 오쇼 셔 나

위 증즐가 대평성(大平盛代)


                       <가시리>


우리가 알다시피 고려 475년은 초기 100년을 제외하고 375년이 전쟁과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시대였으니 고려의 시인 정지상 또한 대동강 가에서 이별을 노래한 <송인도> 이별의 문학이었으니 백성 양반, 평민 모두가 참상의 아픔을 감내한 슬픔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님 보내며 서글픈 노래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이 언제 마르랴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더하는 것을


                                

                                                             정지상(宋人)


대동강을 건너 진남포로 떠나는 임과의 이별에서 대동강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애절 성은 친구 김부식이 시기할 만큼 명작이 틀림이 없겠다.

슬픔의 마음이 묻어 있어도, 질축하지 않고 애타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깨끗한 마음의 진정성이 담겨있어 “첨록파에서 이별에 건강성이 슬픔의 고개를 넘어가는 시인의 정신이 빛나는 것 같다. 양반인 시인이 얼마나 깊고 아픔의 시대가 절절했으면 명작의 이별이 탄생할 수 있을까는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다시 말하면 멀리서 오는 파도는 점차 다가오면서 모두에게 파급력을 갖는 이치와 같이 아래로 천민 백성에서부터 높이로 양반에 이르기까지 이별이 거의 전 영역에 아픔의 물살을 덮어 씌었다는 뜻일 것이다.

반면에 당시 양반의 술타령은 <한림별곡>에서 부패한 냄새가 얼마나 자심(滋甚)한가를 알 수 있는 모순의 시대였다. 아마도 우리말로 쓴 <가시리>는 이런 시대의 고통을 가장 잘 쓴 시라는데 일치할 것이다.

<서경별곡>또한 이별의 주체가 여성이면서 좀 더 강한 의사가 담겨있음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다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이별은 아픔이고 슬픔의 언덕을 넘는 한탄과 장탄식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반복 후렴을 제외하고 67자의 <가시리>는 단순히 이별을 아픔으로 노래한 내용이 아니라 ”빨리 가는 것처럼 “ '빨리 돌아오라는 “ 는 뜻으로 구속력을 갖고 있음에 현대의 김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서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1920년대의 사회는 여자는 남자의 종속처럼 대접을 받던 시대였다. 이른바 절대의 복종은 고려의 여인상과는 오히려 더욱 순종적인 유교의 문화의 사상 속에 여자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모순의 속내가 <가시리>와 <진달래꽃>과의 거리가 역전되는 전도 현상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의 기류에 삶에 가치도 발전적인 진행이 아니라 역류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1920년대의 여인은 거의 숨을 죽이고 남자의 처분에 따르는 '역겨워 가실 때에는' 진달래 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속내 –


사실 속으로는 안 가면 좋은 것이지만 적극적인 요구는 깊이 감추어 두는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완전 수동적인 자세가 1920년대 김소월의 이별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되었던 것이다.


고려 <가시리>는 오히려 현대적인 적극성의 여성상이라면 <진달래 꽃>은 에이츠의 <꿈>과 유사하다는 이양하의 지적은 솔직히 말해서 ‘나의 생각’ 가득한 꿈 위를/ 그대여 가만히 밟고 내라 ‘ 지내라 라는 점 -

'꽃을 밟고의‘ 김소월과 ’ 꿈을 밟고 ‘ 지나가라는 에이츠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로드 바이런의 <maide of Athens>와는 이별에서 같은 주제이지만 이스탄불로 시인은 떠나 갈지라도 나의 마음을 간직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은 아픔이기보다는 작별에 일반적인 형식이 재치(才致)로 담겨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이별의 노래 중에서 아마도 <가시리>는 짧은 형식 속에 강, 약의 되풀이에서 가장 뛰어난 백미(白眉)를 창조한 이별문학으로서 출주 하다는 데는 누구나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이별에서도 자식과의 이별은 아마도 가장 심대한 통증이 나타날 것이기에 허난설헌 <곡자>에 이르면 처절의 농도는 극치에 이르는 이별이 아니겠는가.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디 슬픈 광릉 땅)雙墳相對起(쌍분상 대기)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은 일고)鬼火明松楸 (소나무 숲에는 도깨비불 반짝이고)紙錢招汝魂(지전초여 혼) (지전을 태워서 너의 혼을 부르고)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네들 무덤에 맑은술을 올린다)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그래, 안다 너의 남매의 혼이)夜夜相追遊(야야 상추유)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안 가기 장성)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느냐)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하염없이 슬픔의 노래 부르며)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나오는 슬픈 울음 삼키고 있네)


                                  허난설헌 <곡자> 함종임 <채련>에서


경기도 초월리에 있는 남편 김성립과 후처 홍 씨의 묘가 나란히 있고 난설헌은 맨 아래 안장되었고, 그 오른쪽에 두 남매의 무덤이 있어 죽은 뒤로 비로소 함께 지정을 나누는 모정의 애달픔 -

먼저 떠나보낸 자식의 죽음은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에 시(詩)의 슬픈 가락이 모아든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응어리진 한(恨)이 버릴 수 없는 이별의 최고의 정점을 꾸미는 시(詩)의 형태가 허초희의 운명적인 비극의 극치를 대변한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을 넘어선 슬픔의 가락에 뼈가 슬어지는 느낌이다.


사전적으로 이별은 “서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을 사전적 의미라 하지만 드라이한 측면이 감동을 일탈(逸脫)한다.

사랑이라는 말도 남녀가 좋아함에 이르면 느낌이 매우 삭막함을 느끼 듯이 그렇듯 문학적인 수용으로의 이별은 '아픔과 눈물' 그리고 회색의 절망이 깊은 상심을 유발하는 지경에 사전을 간과(看過)한 점에서 깊이가 없는 것이다.

얼마나 깊고 처절한 인상을 창조하는가의 문학 -

시(詩)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는 체험의 농도가 결정 요소로 작동하리라 본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이별의 용어일지라도 비극적인 인식과 재치의 인식에서 차별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의 슬픔을 슬퍼한 어머니로서의 허난설헌의 이별은 남녀 사랑에 대한 이별과는 또 다른 절망의 길이 넓어지는 느낌이고 바이런, 에이츠, 김소월의 이별에는 처절성의 농도가 얕은 이별의 형식일 것 같다.       



2) 대 자연


모든 인간은 자연에서 자라고 자연에서 산다고나 할까 다시 말하면 자연을 응감(應感)하면서 대상으로 바라보는 소재와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갈망과 자신도 대상화로서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이 무한대의 대 자연의 넓이에서 문학은 언제나 배경의 역할 -

인간이란 주체로 활동하고 자연은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한 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다.


미국의 삼림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의 콩코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은 시인이자 철학자인 그가 1854년 2년 2개월에 걸친 월든의 숲 속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기록한 월든〗은 대 자연과 인생의 참된 삼의 천착에 바친 실험의 저서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많은 사람들과 자연의 위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철학적인 명상이자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물론 동양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 또한 대 자연의 대상화를 비유로 살아나게 한 철학서이지만 난해의 숲이 울창한 것이 일반인에게는 난도가 높은 단점이지만 소설에 처음 도입은 항상 전체 줄거리의 예보적인 역할을 암시한다.

음산한 영국의 날씨와 줄거리의 전개가 안개 자욱한 날씨로 시작하는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Wuthering Heights>는 도입부의 자연 묘사는 남자 주인공 히이드클리프와 주인공 나와의 운명적인 전개를 예고하는 <폭풍의 언덕>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터 ㅡ전개해본다.


<웨더링 하이츠>란 히이드클리프 씨의 집 이름이다. <웨더링>이란 그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이 많은 독특한 형용사로서, 폭풍이 불 때는 위치 관계상 그 집이 정면으로 그 바람을 받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집 사람들은 줄곧 그 꼭대기에서 일 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올 것이다. 집 옆으로 몇 구루 자라지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가를 알 수 있으리라 -

다행히 이 집을 지은 건축가도 그것을 생각해 집을 정말 튼튼히 지었던 것 같다. 좁은 창틀은 벽에 깊숙이 박혀있고, 집 모서리는 크고 울퉁불퉁한 돌로 튼튼하게 지어 있었으니 말이다.  


<웨더링 하이츠>는 요오크사 지방의 황야를 무대로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가 주변의 환경 묘사와, 일치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실 핵심구절은 '집옆으로 몇 구루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 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리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에 앞으로 전개될 인간관계의 설정이 음산하고 거센 북풍에 주인공들의 개성과 맞닥트리는 암시를 엿볼 수 있는 황량한 대 자연의 설정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김동인의 단편 <배따라기>은 다소 미숙한 형태로 도입부터 흔들리면서, 화창한 봄날의 묘사로 서두가 시작된다.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할 위험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리고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김동인 <배따라기> 서두   


우선 서두가 너무나 장활하게 나열된 듯하다. 가령 <마지막 잎새>의 오헨리 같으면 간편하게 It’s fine spring day의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묘사가 장황하게 6행을 추가한 것은 그 미숙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불구자나 죽음의 그늘이 있는 3.1 운동이 실패로 끝난 1920년대의 우울한 사회 풍토에서는 화창한 봄 날씨의 전개가 어색하지 않은가.


신석정시인은 대 자연과 밀접한 시적 접근이 그의 수필에서는 더욱 강조점을 마련하고 있다.

40평 남짓한 앞뜰에 그저 되는대로 질서 없이 심어놓은 나무가 신우대, 식나무, 수수꽃다리, 태산목, 꽝꽝나무, 북가시 나무, 칭영수, 백목련, 독일가문비, 이팝나무, 치자나무, 뽀뽀나무, 동백나무, 호랑가시나무, 낙우송, 산수유, 국로, 감나무, 모란, 청매, 벽도, 은행나무, 후박, 철쭉, 박태기나무, 개나리, 서향, 파리똥나무, 죽도화 등 30 여종이 있고 이밖에 장미 10여 종이고 보니 그 면적에 비하면 초만원인 셈이다. 이 나무들 사이에 수선화, 백합, 국화, 파초, 등 숙근초(宿根草)가 자리를 잡고, 콘크리트 항아리에는 백련이 있어 모두 제철을 기다리고 있다.


                                     신석정 수필 <정원이야기>에서  


신석정의 시는 우아적인 노란색이 《촛불》과 《슬픈 목가》에 주류로 등장하고 있고,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이런 현상이 사라진다. 나무를 주체로 보면 신석정의 정원은 초 만원의 욕심이 자연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가짓수로 보면 나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 것인가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초목을 사랑하는 신석정의 시심(詩心)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노장사상의 침투와 연결 고리를 가질 것으로 유추가 된다.


a) 산 경관, 초목 경관  


거개의 시인들은 자연을 소재로 선택하는 시적 표현이 압도적이다. 왜냐하면 자연과 경관을 떠나서는 시심의 근거가 작아질 뿐만 아니라 주제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평생 산천초목을 바라보아도 앞산은 앞산으로 있고 뒷산은 뒷모습으로 서 있지만 인간은 다른 감각을 동원하는 것은 마음의 탓이기 때문이다. 2.30대에 보는 산이 다르고 4.50대에 보는 산이 또 다를 것이기에 60의 마루턱을 넘어올라 서보지 않고서는 누가 감히 산천초목의 산의 진미를 안다고 할 것인가, 는 신석정 시집 《산의 서곡》에 머리말로 쓴 조지훈의 글이다. 산을 현상으로 바라본 시선과 나이 들어 산을 바라보는 산의 모습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산은 정복으로 올라보고 싶은 충동이라면, 나이 60 넘어 산은 정복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의 체온과 같이 친근 미를 갖는 것이 사실일 것이기에 -

조지훈은 이런 산의 묘미를 서문에 새겨 놓았음은 매우 조숙한 판단이었을게다.

그는 50 이전에 운명(殞命)했기 때문이다.     


1. 산

<파이랗다>

2. 넌지시 뻗어 나간 저어 산맥(山脈)을 보아라

<햇볕이 강물처럼 흐른다>

3. 아슬아슬 저어 봉우리를 보아라 <휘휘 칭칭 구름이 감았다.


4. 말없이 얼싸않은 산협(山峽)과 산협을 보아라

< 퍽은 다정도 하이...>


5.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껴안은 산

<따스한 체온이 돈다.>


6. 볼과 볼을 문지르고 있는 산

<연거푸 주고받는 뜨거운 kiss>


7. 이윽고

정상(頂上)

<정상에 나는 서있다.



                     신석정 <푸른 Symphony>에서


17까지 이어지는 산의 노래 중 7까지만 옮겼다.

신석정을 정원시인 혹은 목가시인이라 칭하는 것도 시(詩)의 대상이 거의 모두가 자연을 소재로 했고 4. 19 이후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은 시들은 비교적 각광을 받지 못한 것도 지나치게 경도(傾倒)한 자연현상의 탐닉(耽溺)때문일 것 같다.

전북 부안의 바닷가에 살았어도 산의 시맥(詩脈)을 두고 자연의 소리를 취합한 신석정의 정서는 자연을 떠나서는 그의 정신이 혼미(昏迷) 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만큼 애착으로 자연에 동화되어 그의 시는 형해(形骸)를 담아 표현미를 구축 했을 것 같다.


b) 강 혹은 바다   


물이란 인간 에너지 정신의 중심인 것이다. 강이 바다로 이어지고 바다는 파도와 파고를 가져오면서 이방(異邦)에의 갈망을 전달하면서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바다가 서방에 대한 동경(憧憬)으로 이어지고, 어둠으로 상징되는 나라 형편을 깨우침으로 방편을 삼았던 선지적인 사고 -

새로운 문물이 바다를 통해 이입되는 계몽의 길목이었음을 잘 알았던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지용은 내륙 충북 옥천을 그리움으로 채색한 <고향(故鄕)>의 시인이다. 그의 <향수>에는 실개천이 흐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짙은 음영으로 배어 있지만 <바다 1~5>와 <갈릴레아 바다>와 <호수 1~2><호면>등 그의 시에 비해 물의 소재가 많은 편인 것 같다.


고래가 이제 횡단(橫斷)한 뒤

해협(海峽)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히나 물결 피여 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꼬자꼬 나려 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

한나절 노려보오 흠켜잡어 고 빨간 살 빼스랴고



                              정지용 <바다 1>에서


고래로 배로 환치(換置)하면 -

배가 지나는 길에 파도는 은방울 날리듯, 종달새의 노래를 떨어트리고 가는 모양이 마치 바둑돌의 하얀 포말, 연신 올랐다 내려가는 반복에서 -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그네의 표정 -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완상(玩賞)으로 가까움을 대상화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인 것 같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 <호수, 2>


순수가 절정을 이루면 천진의 극치에 오르는 것이다.

<호수>는 정지용의 마음을 대변하는 아주 간결하고 순수함을 나타내는 시화(詩化)이다.

한국시는 비로소 정지용에 와서 거추장스러운 의상을 벗어던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의 신비경에 이른다 볼 수 있다. 이는 호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의 정서와 이미지가 결합하여 천의무봉 한 시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 일게다.


인간의 신체 조직은 약 80% 정도가 물로 구성된 – 5대양 6대주처럼 물로 구성된 지구의 모습을 함께하는 인간의 신체 조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물은 곧 생명이고 삶의 모든 진행을 영위하는 원소이기에 동물이나 식물은 곧 물에서 존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 강물이 되고 강에서 다시 바다로 흐르는 것이 또다시 증발하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인영법의 절차가 물에서 암시되는 것이다.



물은 될 수 있는 대로

힌돌이 퍼져있는 곳을 가려서 걸어 다닙니다.

조이밭 속에서 그 소리를 엿듣는

팔이 부러진 허수아비는

여기서는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외다.



                      김기림 <물>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추구점은 물에서 “가려서” 다닙니다에 이르면 시인이 추구하는 물과 가는 것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답은 흐름을 유지하면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노자적인 철학을 꿈꾼다. <<보물섬>>과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쓴 로봇 루이스 스티븐슨은 <rain>이란 평이한 시(詩)를 썼다.


The rain is raining all around

lt falls on field and tree

lt rains on umbrellas bere

And on the ships at sea



                          <R.L.Stevenson <Rain>

 


들이나 나무 위에 그리고 온 바다에 혹은 우산에도 눈은 변함앖이 골구로 내린다. 차별이나 구분이 없는 점에서 수주 변영로의 <봄비>와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변영로는 봄비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암시가 되어 있는 반면 스티븐슨은 온 세상을 적시는 비의 모양에 초점이 모아진다. 어떻든 비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에너지의 근원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바다와 친화적인 인간의 삶은 항상 그리움의 공간이 설정되기도 한다.


일주일 동안쯤 파도와 놀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가자는 청에

처음엔 그러마 하더니

몇 걸음 지나니 마음이 변하여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는 말에

섭섭하여 놓아주니

깔깔거리면서 손을 흔드는 작별은

너무 아쉬운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노라니

다시 만날 날을 통보해 달라는 부탁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안도감이지만

내 생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을 몰라 입을 다물고

뒷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졸 시><바다의 묘망(渺茫)



친밀도라는 것은 시인과 대상에 어떤 교감을 나눌 것인가의 달려있다.

대상을 적개심으로 바라볼 때 무서운 파도의 위압에 지질릴 수 있지만 바다와 놀이로 삶을 이어갈 때면 바다는 놀이터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쓴 졸시는 죤 메이스필드의 <바다의 열병>에 “나는 아무래도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의 첫 구절부터 친밀도 --

두려움이 없고 친구와 외로움을 달래는 대상화일 때 <바다의 묘망>처럼 하나로 결합을 꿈꾸는 평안하고 시원함을 가져온다. 떼오필 고띠에의 <바닷가에서>도 시각적인 기교의 바다의 정감이 담긴 것들 -

모두 바다에서 정서의 고양(高揚)을 추구하고 있음이 공통적이다. 어떻든 비에서 물 그리고 강으로 변화를 이루면서 다시 바다에서 커다란 꿈의 이름이 순환의 곡조로 되풀이될 때, 시인의 선택은 항상 자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사회적 의식 또는 휴머니즘


인간은 살아가는 존재 -

작은 단위인 나로 출발해서 가정 그리고 마음 또는 사회로의 확대 현상이 일정한 집단을 형성한다.

하여 사회적인 존재로 군집(群集)-

일종의 사회학적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는 일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평안하고 아늑한 세상이기보다는 고통과 신음이 넘치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인간사라는 뜻인 것이다.

여기서 어떤 추구의 길을 선택하는가의 따라 마음 -

결국 마음의 길이 결정되면서 자기의 삶에 무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의 피륙을 짤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색상의 비단을 만들 것인가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만든다는 자기 책임설이 곧 삶인 것이다.


a) 부정과 칼날  



사물을 바라보는 사물에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이 답일 것이다.

전자를 낙관의 태도라 한다면, 후자는 긍정보다는 저항의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려는 복수가 때로 시적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른바 권력에 항거하는 형태를 저항이라 말하고 순응하는 모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모순의 시대에 목소리에 칼날을 감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가 지나칠 때는 자기를 찌르는 비수(匕首)로 둔갑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70년대부터 모순의 극치에 항거의 목소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인은 김수영시인이라 말들을 한다. 죽기 전에 쓴 (1968. 05.29) <풀>은 마포구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그해 06. 16. 사망. 48세 때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수영은 평가 이상의 평가를 누리고 있지 않나 한다. 이는 한국 시(詩) 문단의 판단에 병폐가 아닌가 하지만 엄밀한 분석과 평가에 의해 명성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로 명망의 성가를 높이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각되지만 -

사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구절은 췌사(贅辭)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앞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틀림없이 그 구절은 삭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뿌리가 누워서는 논리상 안되기 때문이고 이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한번 전문을 인용해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지난 60년대 말은 흐린 날씨의 사회라고 하겠다. 모순과 불합리가 권력자에 의해 또는 가진 자에 의해 침탈(侵奪)당하는 슬픔의 시대라고 해야겠다.

이때 바람은 훼방의 이미지라면 풀은 저항의 탁월한 이미지 구축의 시어였다. 그러나 맨 마지막 구절은 삭제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상의 방해가 안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김철수의 <잡초>와 비교가 되는 -

영문학 전공에 미국의 국민시인 월터 휘트먼의 시집 <<풀잎 속에서>>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두 사람의 일치된 이미지는 오히려 김철수에서 잡초는 불에도 또는 마차의 바퀴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저항의 이미지가 단단하다. 물론 시적인 완성도에서는 김철수의 <잡초>가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의 전개에서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b) 긍정과 휴머니즘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했다.

모든 전제(前提)는 실존의 형태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왜 그런고 하면 존재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고기 잡는 항아리”의 처지가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詩) 또한 결국에는 휴머니즘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설득하고 말하는 길을 제시할 때, 감동은 더 커다란 사랑의 뜻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문학의 영원한 숙명은 결국 휴머니즘의 실천에 방법론의 전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시인은 순수와 깨끗함, 영혼이 맑아 추구하는 사랑과 용서하는 사도(司徒)

 

   


















일뿐, 고함치고 거드름 피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싸는 보자기를 펼칠 때 추위를 가려주고, 목마름에 물이 되는 것이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니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하는 불타는 향수(鄕愁)

네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젠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려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자



                                  김동명 <파초>


조국을 벗어나 이국의 외로운 고독이 밀물 지는 처지를 파초로 의인화되었다. 갈증이 있고 또 남방을 떠난 몸은 추위에 가릴 수 없는 노출에서 휴머니즘의 뜻이 시인의 마음으로 감싼다. 샘물로 갈증을 시켜주고 추위를 가리기 위해 방안에 기거함을 허락한 시심은 곧 사랑의 마음이다. 더구나 종처럼 시중을 위해 “우리”로 펼치는 마음에는 사랑이 넘치는 시심(詩心)에 꿈이 더불어 피는 듯하다. 고함치고 욕지거리하면서 살벌한 아우성이 아니라 뜻깊은 호의로 감쌀 때, 세상은 의지 할만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서로의 체온 나누기에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음을 <파초>는 역설한다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나는 얼마나 순결한가

대답이 머뭇 거린다

죄 없음도 죄가 되는

사는 일 그렇기 때문


욕망이 문을 닫을 수는 없지만

나오지 말라 나오지 말라는

부탁 더불어

고개만을 숙이고

살아 예 이르렀어도

희색 빛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내

그림자의 길이에

안도감이 다시

부끄럽다.


       

                 졸 시 <순결과 깨끗>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잘해도 때로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는 경우도 있고 너무 정직해도 아픔을 폭포로 맞을 때도 있다. 너무 하얗기 때문에 비난의 과녁은 피할 수 없는 경우도 너무 많다. 그러나 순결함이 미덕이고 깨끗함이 옳은 일이라면 감수의 파도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어렵다는 뜻은 이런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지만 신념을 개성으로 내세울 때 구름은 항상 비켜간다. 순결하고 깨끗함 또한 인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곧 휴머니즘의 정도에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한다.

시와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의 밝은 표정을 찾아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 문학의 숙명인 이유가 아닐까?


4. 에필로그(epilogue) – 인간 사랑의 그림 그리기


문학에서 만남이란 기쁨이며 이별은 아픔의 표적일 때, 거기에는 인간사의 복잡 다기(複雜多岐)한 전개가 감동의 줄거리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별은 만남으로 순환하는 길에 이어질 때, 우주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라야 이별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곧 섧리에 따라 이어질 때 비로소 감동이 정당한 길로 다가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생의 터전이며 이를 통해서 생로병사의ㅐ 회전이 진행혀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서 생의 가치를 구축하고 발견하는 일은 곧 자기를 찾는 일이며 이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밭갈이에서 생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개성으로 용해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푸른 생명을 키우고 강은 물로 바다로 이르는 우주의 법칙에 따르는 표현미는 곧 문학의 질서라 하겠다.


사실 문학이 이 질서를 벗어나 순응치 않는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으며 질서에 순응한다면 그것을 희극이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은 언제나 사랑을 말하고 질서에 순응을 가르친다.

비단 도덕적인 가치 우선의 공리주의자 플라톤이나 공자에 이르러도 문학은 인간 우선에 이름을 강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예술은 사진을 모사(copy)하는 것이 아니라 “ 있음 직한(probability) 현실”을 그린다는 점에서 예술론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설득력 있게 주장되는 것이다.


아무튼 모든 예술의 목적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실천에서 한치도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독자의 감동은 배가 될 것이며 작가라는 타이틀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문학이란 숙명을 안고 변화의 현상을 그려나갈 수 있다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지는 계기라 보면서 그리기를 마치려 한다.



 2023. 02.1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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