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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사상의 예술혼]

{사상의 심화}

미래의 풍요를 위해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며 열심히 사는 것일게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우리가 고난의 시대에는 예술은 희망의 인도와 예언의 역할을 해왔다면 풍요의 시대의 예술은 장식의 기능이라 한다고 한다. 또한 예술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고 정서적 안정감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이성의 회복을 기할 수 있을 때 인간성의 유지가 가능해 진다고들 한다.

인간성의 돌변은 가치가 변모할 때 가장 불행한 경우에 직면한다면 예술은 인간이 알고 있는 구원의 메시지라 보는 것이다.


미술은 안정감의 여행을 촉구하고 상상의 부산물로 따라올 때, 현실을 보다 더 조직적으로 의식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긴장감을 가질 때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자기 발견의 모티브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 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 된다고 믿는다면 지금 우리는 현재 너무나 상업성의 의존해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되는 현상을 올바른 판단이며 미래를 낙관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문학은 심도에서 사상의 승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명망이 높은 어른들을 말한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서로 갈라진 남북의 이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어 레마르트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같은 위대한 전쟁 문학이 결여 되었고 삼국의 정립에 따른 각축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찰의 안목이 없었으며 근대사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


7년여의 임진왜란, 삼베구고도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 문서를 갖다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도 통렬한 가슴 아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에 그새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은 결국 자신의 문제로 시작해서 객관을 바라보는 접근법, 귀납적 논리학이 주류를 이룬다면 우리는 연역적 논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보편에서 특수로 가는 결말이기보다는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적 논리로 익숙한 것이 추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허나 귀납적 논리도 아니고 연역적인 논리도 아니며 중간에 머무는 일 때문에 특성이 없는

결말에 직면하는 것은 아닐지...

여기서 우리 문학의 심도는 돌부리에 체이는 안타까움일 것이다.

만약 서구적인 사상의 발전 모델이라면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로 돌아가는 공허만이 있을 뿐 깊이가 내제되어 표피적인 현상이 만연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한때 유행했던 대하소설도 대부분 가족사이거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로 보여 (Showing) 주었을 뿐 정작 작가의 고뇌어린 해답(heaithy thoughts)은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에 깊이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한다면 사랑방 이야기가 되는 고작이라 하지 않을까?

톨스토이의 대작품에서는 그런 대답이 가득하며 예를 들자면 결론은 자명해지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의 귀족으로 자기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땅만으로는 살수 없다>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결국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러시아의 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그가 추운 1월 우랄 철도의 시골 역장 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은 감동은 그의 깊은 인간미에 대한 참된 삶의

실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의 유언의 마지막 말이 “진리를 나는 열애한다...

왜 저 사람들은 ...이란 마지막 말에도

그의 사상은 녹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영원한 사명이라 라고 황금찬선생이 말했듯이 현실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를 이룰 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수차 강의를 들은바 있다. 20세기의 최대 소설인 <모비 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 있을 때  온갖 모멸과 굶어 죽다 시피 했고 죽었을 때는 신문에 부고 한 줄도 안나 올만큼 무시와 고독을 감내 했으며 생전에 1775수의 시 를 쓴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딕킨슨은 살라 7편 쯤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70년후에 평론가의 연구에 의해 빛나는 미국의 시인이 된 일이나 우리의 한용운선생은 1926년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운동의 실패, 감옥살이 3년을 겪고 난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에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시라는 점 --



1965년 – 그러니까 40년 후에 박노순, 인건한 <한용운 연구>에 의해 유명의 시인으로 등극을 했으며 생전에는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윤동주선생도 해방이후 유고 시집으로 살아난 시인이다. 그들은 한결 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이며 또한 이육사도 마찬가지이다.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또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결국은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의 파문은 따라오게 되어 잇는 것 같다.

고로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경계의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르지 않을까?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신을 버리고 제 3의 공간을 창조하는 길을 얼마나 진정성으로 표현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인간애의 따스함도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강조가 옳지 않을까?

대부분 문학은 정신이라 하지 않든가

문학의 본질은 결국 사상의 실현이고 어떻게 구조화하는 하는 가의 소설이 되며 수필이 되고 이미지를 결합하여 시가 된다는 것이라면 본질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일 것이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넋두리로 본인을 감추는 것은 문학적 깊이가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예술은 시대적인 의미에서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때나 비극은 있으며 슬픔도 있지만 여기서 희망의 대칭이 이루어진다면 예술은

언제나 이를 방지하는 깨달음의 약이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혼이 필요한 소이가 아닐까 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갖고 내면의 마음을 그린다는 생각을 하며 나가려 한다.


2023. 02.2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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