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의 무게 균형]

『균형 감각과 언어의 탄력』

1. 인격의 수용

[이승섭의 이천 설봉공원 나들이]

“언어의 성숙은 정신과 행동에 수반하는 것” 또는 T.S ELIOT <고전 전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정신의 원숙은 행동의 원숙으로 이어지고 조건의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글의 무게를 감당하는 역할을 갖기 때문에 시의 무게와 인격을 겸비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가치가 문학의 가치와 비례하는 등식을 도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량한 사람만이 글을 쓰는 것이냐 묻는다면 사상의 고성, 인격의 수용성 깊이가 따라야만 언어의 맛깔스러운 표현이 감동을 자극하는 임무가 주어질 때 가능한 것일 게다.

격식과 균형감각을 갖춘 성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고매함이란 그런 격식을 갖춘 성품에서 나온다고 할까?

사실 문학의 언어는 곧 인격의 수용, 문학표현과 인간의 인격의 상관성은 궁극의 도달점인 감동에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기에 균형과 언어의 탄력은 상관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지적인 여자 혹은 지적인 남자라고 우리가 표현들 하지만 과연 지적이란 무엇인가?


영어로 지적을 말한다면 <Intellectual>즉 인텔리, 지성인, 지적인 등으로 통용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설픈 언어의 과시가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맛깔스러운 감수성으로 나타낼 때 느끼는 삽상(颯爽)함과 풍미가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한국시의 역할이 기대가 되는 시인인 것 같다.

홍일영의 시에는 특히 청아한 가을과 메아리로 들리는 글에는 안도감과 잘 균형된 미소랄까? 하는 반갑고 연애편지 같은 느낌을 주는 듯하다.

이제 그를 프롤로그 해보자.


2. 창조의 상상과 성품


시는 지작인 결과물은 아니다.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설픈 현악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있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 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시에 담긴 정신의 요체이며 “무게의 균형과 언어의 탄력”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냉철한 칼날이 번뜩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다정 다감하며 따스한 인정이 배어 있는 그런 정서가 그의 마음에 다가든다.


<고향 3>

이 가을 그리운 고향이 보고파요.

흙과 산천 모두가 내 것인 양

반갑게 맞아주는 이 없어도

그냥 그리워서 왔습니다.

당신이 주는 그 큰 산 큰마음

자리에 잡으며 편안한 마음입니다.

당신이 주는 그 흐뭇함

저녁노을 붉은 꽃으로 피어납니다.

그리곤 내일부터 다시 힘차게 달릴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내 품속 내 고향


너무 많은 정보와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철근 콘크리트 속에서 부대끼며 사는 도시가 어쩌면 망각의 세계를 유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천이 있고 푸르름과 “이 가을 그리운 고향이 보고파요” “흙과 산천 모두가 내 것인 양” 개울이 있고 작은 마을이지만 늘 잊지 못하는 동네는 시골 냄새, 후각의 마을 이미지 등 언제나 귀환의 에너지는 심장 깊은 곳에 숨 쉬는 인자가 있기에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골에서 만들던 추억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연어의 귀향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을 정취와 후안 인심을 새기는 마음속에서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것은 그의 마음 줄기에 각인된 동질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시인이 인식을 하든 아니든 시적 이미지가 선명성을 유지하면서도 정감의 맛을 보여주는 이유가 될 것이다.


보일 듯 말듯한 밤이 되면

슬며시 다가가 잎 맞추고 싶어

고운 얼굴 놓칠 수가 없어서

날마다 매달려 바라만 보는데

벌이 날아와 그 꽃에 입을 맞춥니다.

얄미워 거미줄로 엮어 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벌은 영영 다시 오지 않고

그리움 견디지 못한 꽃은 시들어 버리고

그 순결 지켜주지 못한 속죄에

남몰래 제 몸만 옭아맵니다.


                <거미 애련> 중


원래 “글이란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 뷔풍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시인이다라는 말도 될 것이다. 시속에 시인의 인생을 투척하고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한다면 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일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인간도 저마다 다른 개성과 성품을 갖고 있을지라도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흔히 거미는 포식과 탐욕의 그물을 치고 번뜩이는 눈빛으로 기다림의 시간 속에 그만의 욕망을 위한 일이지 사랑을 베풀기 위해 그물을 펼쳐놓은 일은 아니라는 뜻이 될 수도 있겠다.  

“속죄”벌의 기다림을 깨우치는 일은 대상을 포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면하려는 기다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마음에 들어있는 지도인 것이다.


3, 자연과 식물 정서


시인마다 개성의 진로에 따라 관심의 분야가 다르게 표출된다. 그러나 태생적인 환경에 의식의 지배를 조종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왜 그런가 하면 아는 것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이유식 때 많이 먹은 음식이 평생에 거부반응이 없고 좋아하는 목록에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라 증명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화성에서 태어나 작은 학교 동무들과 어울렸고 추억의 탑을 쌓고 도시로 나가 다시 귀향을 하면서 태생적인 공간에 대한 에너지는 평생을 지배하는 요소로 전원과 식물의 연관이 시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도시의 딱딱한 정서가 아니라 자연을 배경으로 작동되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꽃의 대한 시이거나 아니면 식물, 자연이 향기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것은 시를 구성하는 관심의 집중화가 아닐까?


사물 모두가 잠든 침묵에

내 안에서 언어들은 꽃이 되고

나비가 되고 새가 되며 어느새

낯선 것들은 친숙하게 다가왔지

어릴 적 돌담길을 걷는 듯 초가집 골목사이

애들 깔깔거림과 할머니의 시끄러움이

계집에 봉긋한 가슴이 수줍은 듯

여력 한 햇살까지 쉴 사이 없이 다가오는 추억들

꽃잎 위에 끝없는 몽상으로 펼쳐졌지

한참을 그 신비 속에 길을 잃고 헤매다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

네 우주에서 끝없는 여행하는 실바람이 되고 만다


                          <시골 풍경>


시는 사물의 비유에서 변형(deformation)의 기법인 것이다. 물론 비유와 상징은 모든 기교를 다하여 사물의 본질에 이른바 몰개성의 이론(lmpersonal Theory of poetry)을 더하면서 의미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핵심어가 시인의 시적 의도 맥을 함께하는 “어릴 적 돌담길”“애들의 깔깔거림” “초가집” “골목”들이 다가오는 요란스러운` 영상의 중심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라는 것이다.

그 공간 속에서 길 잃고 헤매다 다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로 현재의 공간이 화면으로 펼쳐지면서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형상이 펼쳐진다.


정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모든 인간 동물들이 갖는 특징인 것이다. 희귀(稀貴) 의식과 더불어 자아의 중심을 내 안에 넣고 의식의 넓이를 확대하는 것이 곧 우리네 사는 의식이라면 인간이란 원래 원점에서 지향(志向)을 갖는 것이 정신으로 압축되는 것이기에-

“시골풍경”은 우리는 시골에 가면 마냥 펼쳐진다.

공간을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평균율로 나누어 위치를 정하지만 시골풍경의 이미지는 같은 어느 계절이든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한다. 시인은 수평적인 공간에서 시골 풍경을 꺼내어 고향의 절절함에 자신의 사고와 추억을 의탁하는 고백이 선행된다는 것을 본다. 일종의 상상의 승화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무튼 식물의 모든 면을 시인이 시적 바탕을 이루면서-

그는 바다의 파도 소리보다 더 강렬한 식물의 향기를 강조하는 것은 그가 살아온 고향의 영향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그런 향기가 발동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본인이 잘 아는 것은 정확하고 명료하게 잘 알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애매 모호한 것을 표현한다면 결국 시는 시가 아니기에-

처음부터 익숙하고 경험한 것이 맨 앞에 나오는 것이 시의 주제와 주재료가 되기에 전체 맥락을 지배하는 요소가 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지 마음대로 다가와 온통 흔들어 놓고는

말도 없이 떠나고 터진 심장 끌어안고

이렇게 애만 태우다 혹여 다시 만날까

꿈길로 찾아갔지만 그 모습 볼 수 없어

행여 다시 오지 않을까 그 길에

무성히 피어납니다.


                    <야생화>


때론 흔한 것이 그립다. 아무런 이름도 없는 야생화이지만 언젠가는 반가운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오래전에 기억으로 묻어있는 인연일 것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요소들이 기억의 층을 뚫고 나올 때 시간의 벌판에는 이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을지라도 함께 했던 정서가 춤을 추는 것이다.

자연미는 자족성과 자발성의 특성이 있지만 예술은 이와는 달리 노력이라는 담론을 개입되어야 성립이 되는 것이다.

자연미를 노래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애정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인간의 손이 개입하지 않을 때 가장 순수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예술성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에서 미적 순수성은 더욱 고양되는 경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시인은 자연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자연을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료로 시인의 감수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질서의 구축을 서두르는 것이 시인의 자연관이자 놀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꽃이 등장하고 풀숲의 바람이 신명을 돋우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야생화>는 “애만 태우는” 수용에의 사랑이 앞장서 길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명제는 시의 궁극이자 지향의 공간 확보가 숙제가 되는바, 시인의 시적 태도가 된다.


4. 자아 찾기와 자화상


인간은 가장 먼 공간에서 자기를 찾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기를 바란다. 이 역설의 모순을 의미하면서 어떻게 극복하느냐를 놓고 방황하고 절규하고 애태우는 길에 서게 된다. 이 모순의 해결은 깨닫는 일도 되겠지만 “깨달음”의 숙제를 위해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려 한다.

자화상 혹은 자기 찾기라는 이름은 인간 철학의 출발이고 종점이기 때문에 지혜의 방도가 앞을 가로막는다.


자아의 세계 누구도 본 적 없는

귀는 있을 듯 다가오지 않고

보려 하지도 않고 접촉도 원치 않는

어떤 때는 들을 것도 같은데 한마디로

얼음 속 같은 언젠가 깨진 그를 보았을 때

조각들 널브러져 구름만 끌어안고

어느 건물 지붕 모서리만 붙들고 있는 것

무언가 휑 하고 지나간 것들

그중 하나,

휘둥그레 반쯤 들여다보는 것

철저히 자아의 세계 누구도 본 적 없는


                         <색경>     


색경은 거울의 방언이다. 색경은 나르시스의 고향이지만 결코 대답을 주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를 바라볼 때는 이미 자기가 아닌 것을 낯선 얼굴과 대면하는 일이지만 나라고 확신하는 순간 나는 멀리 달아나는 길에서 웃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숨바꼭질 때문에 나를 찾고 확보하려는 여정은 끝을 모르게 이어지고 삶의 발판에 변화의 숲이거나 계곡이 나타나는 장면이 전개된다.

나를 찾아 반가워하는 순간에 나는 또 다른 나로 분화하는 나르시시즘의 흔들림은 바람 탓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없이 많은 호소로 바람을 부르고 다시 바람을 만나면 일그러진 자화상에 슬픔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누구도 자기를 아는 철학 개론을 펼쳐준 적이 없다는 이방성 때문에 일상을 견디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만약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정지 화면을 안고 죽음을 부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철저히 이면의 세계의 간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와 같은 나를 두고 나라고 믿는 착각이 존재의 이유이고 삶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색경은 이런 견지에서 자기를 찾는 실마리의 이름이고 또 다른 존재의 신기일 것이다.


날마다 수없이 눈 마주치고

같이 울어주고 같이 웃어주는

그런 사람 있을까?


                   <색경 2>


인간이란 본질의 질문을 늘 던진다. 영원한 동반자가 과연 있을까?

그 대답을 몰라서가 아닌 설의법(設疑法) 일뿐, 이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은 영원 속에 찰나로 존재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지혜로 찾아낸 득의로움이라 칭찬할 수는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영원한 물음을 던지는 숙명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해답을 갈증으로 삭이면서 사막 같은 일상을 넘어가는 존재-

그 숙명을 이끌고 가는 나그네라는 이름이다.


색경에는 숙명에의 닿지 못하는 거리가 있다.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거리가 색경이지만 그 색경에는 누구도 들어간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Van Gogh의 1886년 작품 <농부의 구두>를 예로 들어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닳아버린 구두의 밑창에서 고달픈 발걸음의 슬픔이 소리로 들리고 또는 농부의 강인성이 엿보이고 저문 숲길을 터벅이며 걸어오는 서글픈 발자국 소리가 대지의 충만한 풀숲의 노래와 바람이 따라오면서 고독을 재촉하는 주름진 표정의 보인다고 구두에서 인간 심연의 노래를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위대성을 증언하는 낡고 해진 한 켤레의 구두에서 심오한 철학이 인간을 위무한다. 여기서 시는 철학을 포용하고 철학은 시를 위해 설명의 준비를 갖는 상보적인 혼이 펼쳐진다.


5. 에필로그 <내 상표>


시란 시인 정신의 바로미터라면 한 편의 시에 대한 분석은 늘 치밀한 뇌수(腦髓)의 조력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는 종합적인 정서의 흐름을 ‘느끼는’ 일에 더욱 깊이를 맛볼 수 있다면 그의 시는 산뜻한 명칭을 감지할 수 있는 조짐이 넉넉하게 보인다.    

사실 곰삭은 깊이와는 다를 수 있지만 정서 균형의 안도감과 언어 운용의 지성, 더불어 사물을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나 언어 탄력의 요리 솜씨는 더 많은 진전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다. 앞으로 그만의 상표를 가진 독특한 시가 생산될 것으로 믿으면서 논지를 접기로 하겠다.


2023.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자연의 섭리]
[이천 설봉공원 자아 도취]
{이승섭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작가의 이전글 【향기 나는 사랑 정감의 흔적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