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꾹 누르던 숫자가 전하던 마음에 관하여
요즘에도 회원가입을 할 때 집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칸이 있기는 하지만, 필수가 아니라 그냥 넘어가고는 합니다. 많은 업무나 본인인증이 핸드폰이 없으면 진행이 어려울 정도니 대체로 모두 한 대씩은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집 전화기의 존재는 쓸모를 다 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처럼 해외에서도 편안하게 통화를 할 수 있기 전. 전화 번호부에 숫자를 꾹꾹 적어 놓거나 친한 사람들의 번호는 외워뒀다가 전화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집 안에 한 대 있는 전화기의 동글동글한 버튼을 꾹꾹 눌러서 전화가 가길 기다리던 추억이 있던 시절이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은 한 번 전화기를 바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연두색의 둥그런 디자인의 전화기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번호를 누르는 판도 둥글둥글 귀여워서 제 마음에 꼭 들던 녀석이었습니다.
저는 저녁이 되면 외가댁, 친가 그리고 아빠에게 순회하듯 전화를 했었습니다. 꽤나 오래 했던 일인데 할머니 할아버지도 좋아하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저 역시 제가 번호를 눌러서 연락을 드리는 게 너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별별 이야기를 다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뭐 했는지 이야기도 하고, 아마 애교도 부리고 하면서 서로 잔뜩 신나서 통화를 했었는데 어느 부분에서 '앗, 우리 아빠가 아닌데?' 하는 시점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이 안 나지만 한참 통화하고 끊으려던 참이었던 것만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아빠 이름을 대면서 아빠가 아닌지 물어봤었고, 저희는 그렇게 한참 통화를 했지만 부녀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마 번호를 누르던 중 하나 정도를 잘못 눌렀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말한 딸 이름이 저랑 거의 차이가 없었거든요. 저는 끝 글자가 '현'으로 아저씨의 딸은 끝 글자가 '연'으로 끝나서 유선상으로는 정말 아무런 이상함을 못 느꼈었습니다.
번호는 모두 저장되어 있고, 프로필 사진도 확인 가능한 지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당황스러웠기는 했지만, 한참을 떠들 만큼 즐거운 통화였고 지금까지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그 아저씨도 저희 아버지처럼 나이가 들으셨겠지요? 아주 이야기가 잘 통했었는데, 잘 지내고 계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