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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gooni May 02. 2023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 흔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남편이 오늘도 변함없이 양말을 뒤집어서 세탁기 바로 앞에 벗어놓았다.


남편이 침대에서 과자를 먹고 부스러기를 잔뜩 흘려놓았다. 


남편이 치약을 중간에서 눌러 짜놓고 역시나 뚜껑도 닫지 않은 채 그대로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내도, 아이들도 어지럽히기도 하고 말을 잘 안 듣기도 하지만, 남편만큼 말을 듣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흔한 남편들의 행동으로 예를 들었다.  


몇 번이고 말을 했지만, 언제 어디서나 흔적을 남기는 사랑스러운(?) 그들…… 


평소 같으면 그런 흔적들만 봐도 말을 듣지 않는 그들을 떠올리며 화가 나기도 하고, 나 혼자만 치운다는 생각에 서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런 사랑스러운(?) 흔적이 마지막이라면 어떨까?  


평소에는 그런 흔적을 볼 때마다 화가 났겠지만, 

그 흔적이 마지막이라면 그 흔적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것 같다.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인지할 여유조차 없을 것 같다. 


그 흔적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힘들고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긴다.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흔적들을 보며 생각해 본다. 


저 흔적이 마지막 흔적이라면?  


마지막을 생각하면 사람이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그동안 나를 짜증 나게 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내 맘에 들지 않았던 행동 하나하나도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를 나타내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인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바꾸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연했지만, 그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며, 그에게는 당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들인 것이다.  


내가 원하던 것, 그게 뭐라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거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혔을까?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생각들은 우리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감사하게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곁에 있다.  


여전히 양말은 뒤집혀서 세탁기 안이 아닌 세탁기 입구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고, 세면대 위에는 허리가 잘록한 치약이 뚜껑이 열린 채 잠을 자고 있다.  


잠시 마지막을 생각해서 그럴까? 이런 현실의 모습도 감사하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흔적들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흔적을 남긴다.   


그들의 흔적은 때론 내가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생각해 보면 나 또한 그들이 원하는 것과 거리가 있는 나만의 흔적들을 남기고 살아간다.  


함께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힘든 일이다. 


내가 원치 않는 상대방의 흔적을 보며, 상대방이 원치 않는 나의 흔적들을 만들어 간다.

  

때론 지저분한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치워진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내가 상대방의 방식에 맞추는 것이 힘든 만큼 상대방 또한 내 방식에 맞추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


누구의 방식이 맞는지 재판을 통해 따져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누가 옳은 것도 누가 틀린 것도 아니다. 


어떤 흔적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남기는 흔적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의 습성이 고스란히 담긴 흔적이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남긴 흔적이든, 어떤 흔적이 남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흔적을 남기고 살아가는 그들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리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생각과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반복되는 그들의 흔적에 또 짜증이 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나겠지만, 가끔은 마지막 흔적을 생각해 보며, 잠시 그들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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