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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영국

컵케이크

by 숲풀 supul

봄의 끝자락, 여름의 시작이 수평선 너머의 하늘에 얼핏 보일 즈음 런던에 갔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루에 사계절이 다 담겨 있었다. 아침에는 바람이 서늘하니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고 낮에는 햇빛이 눈부셔서 안에 얇은 옷을 입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점심이 좀 지나자 흐려지더니 비가 한바탕 내리면서 쌀쌀해졌고, 저녁 즈음에는 또 그치고 노을이 지면서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가 되었다. 해가 지고 나서는 바람 끝이 생각보다 차가웠고 발걸음이 빨라지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왜이리 변덕스럽냐 구시렁 댈 만한 날씨였으나 나에게는 런던의 다양한 모습을 겪을 수 있어 환영할 만한 날씨였고, 또 좋았다. 런던의 공기와 분위기에 취해 마냥 예쁘게 보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런던에서는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 근처를 산책하고, 맛있는 빵집에서 빵을 사고 아기자기하게 치장한 컵케이크를 포장하고 일행이 일어나기도 전에 돌아왔으니까. 물론 일행이 늦게 일어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한바탕 아침의 런던 공기를 즐기고 들어와 그제서야 일어나려고 하던 일행과 내가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고 온 빵과 컵케이크로 전날 근처 가게에서 미리 사두었던 우유와 오렌지주스로 그 날 아침을 대신했다. 맛 별로 골라 포장한 여섯 개의 컵케이크는 가게의 로고가 그려진 하얀 종이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이제 슬슬 열기를 띠기 시작하는 오전의 햇빛에 코팅된 설탕이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와 일행은 하나씩 번갈아 골라가며 여섯 개의 컵케이크를 아침에 모조리 먹어치워버렸다. 나야 아침에 산책을 하고 왔다지만 일행은 눈을 뜨자마자 그 달디 단 컵케이크를 세 개나 먹었으니, 단 것에 후한 내 입맛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컵케이크 집은 꽤 맛이 훌륭했던 것이 틀림없다. 설탕 코팅이 오독오독 씹히는 약간 짭짤했던 캐러멜과 새빨간 빵 위에 하얀 크림이 부드럽고 달콤했던 레드벨벳, 담백한 것도 같고 고소한 것도 같고 달콤한 것도 같던 캐롯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컵케이크라고 하면 미국, 머핀이라고 하면 영국이 생각나는데, 지금은 나에게 컵케이크 하면 런던의 그 작은 가게가 가장 먼저 눈 앞에 떠오른다. 이름부터 아기자기하고 잘 어울렸던 가게. 딱 그 이름 같은 분위기, 맛, 컵케이크였다.


요즘은 여행을 가는 것은 커녕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어려운 시기라 그런지, 이전에 다녔던 곳을 찾아보고 사진을 보면서 추억하고 하는 일이 잦다. 나는 가 보았던 곳을 구글 지도에 카테고리를 나누어 표시해두는 습관이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구글 지도 앱을 켰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안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자주 있다. 저 컵케이크 가게도 빨간 레드벨벳 컵케이크처럼 빨간 하트를 찍어 표시해두었다. 컵케이크가게 뿐 아니라 분위기 좋았던 펍, 걷기 좋았던 공원, 빅 벤, 킹스크로스 기차역, 내가 갔던 곳들 여기저기에 별을 찍고 하트를 띄우고 깃발을 꽂아 두었다.


그런데 이번에 런던 지도를 다시 살펴보면서 추억 속에서 헤엄치다가, 문득 언제쯤 다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면, 나에게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지갑 사정이 넉넉해지면,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면, 더 이상 미룰 핑계를 생각해내지 못하게 되면. 어쩌면 그 때가 그 컵케이크를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컵케이크도, 서늘하던 날씨도, 강을 따라 걷던 산책도, 빨간 이층버스도, 내가 다시 그 도시를 걷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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