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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프랑스

비 오는 날

by 숲풀 supul

올해는 장마가 아주 길다.


햇빛이 내리는 날보다 비가 내리는 날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즐거울 정도지만, 인간의 행동과 그 결과이자 과정인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렇게 장마철이 길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마치 울다가 웃으면 얼굴이 볼품없이 찌그러지는 것처럼, 장마철 속 방울진 물방울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길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그래도 비가 오면 늘 마음 한켠에 비집고 나와 존재감을 과시하는 기억이 있다. 아주아주 행복하고, 조용하고, 활기차고, 외롭고, 또 다시 미소가 질 만큼 행복한 기억이다. 평소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이, 마치 그 기억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줄도 모르는데, 한 번 부풀기 시작하면 펑 소리가 나며 터져버릴 때까지 끝없이 커진다.


비가 내리는 날의 보르도에서는 늘 그 냄새가 났다. 아마 지금도, 보르도에 비가 내리고 있다면 그 냄새가 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빗방울. 풀. 포도. 바닐라. 초콜릿. 밀가루. 강. 와인. 흙. 캐러멜. 그리고 다른 모든 좋은 것들.


보르도에서는 늘 혼자였다. 그 곳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언젠가 떠날 사람이고 그들은 그 때 남을 사람이었다. 그 구분선이 늘 머리 한 구석에 그어져 있었다. 어쩌면 나 혼자 그어놓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후, 입바람을 불면 날아가는 고운 분필 가루로 그어진 새하얀 선이었는데 나에게는 새하얀 밀랍으로 단단히 굳어진 벽처럼 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혼자 보르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지 않았던 곳을 가는 것도 좋아하고, 목적지 없이 걷는 것도 좋아하고, 비가 오는 것도 좋아하고, 보르도도 좋아했기에 그 비 오는 날은 나에게 딱 좋은 산책날이었다. 우산 하나 덜렁 들고, 훌쩍 트람을 타고 20분 쯤 지나 다른 선의 트람으로 갈아탈 수 있는 광장에 내렸다. 그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건너고 싶으면 건너고, 오른쪽으로 꺾고 싶으면 꺾고. 날이 좋을 때는 양산으로, 날이 좋지 않을 때는 우산으로 쓰는 작은 접이식 우산을 들고, 우산의 완만한 언덕에 맞아 토독토독 소리를 내는 음악의 리듬을 타고 걸었다.


그 날은 비가 내리면서도 해가 나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의 보르도 냄새를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만끽하면서, 발목 너머까지 오는 짙은 카키색 장화가 물웅덩이와 만나 울리는 찰박찰박 소리를 즐기면서, 어느 순간 토독, 하고 귓가에서 울리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알았다. 비가 그쳤나,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걸어온 길, 바로 한걸음 뒤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딛으면 해가 나고, 다시 뒤돌아 한 걸음 걸으면 비가 내렸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아서 그 자리에서만 몇 번을 뒤돌아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 세상에 존재하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나와, 물방울이 도르륵 굴러 떨어지고 있는 풀색 장화와, 다갈색의 작은 우산과, 비 오는 날 보르도를 감싸는 바로 그 공기. 바로 그게 전부였다. 내가 모르던, 내가 그때까지 모르던, 바로 그 3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던 그 세상에서 내리는 빗방울이 햇빛을 받아 빛방울이 되는 그 장면을, 나는 아마 비가 오는 날마다 생각할 거다. 해가 난 날에는 내 안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비가 오는 날이면, 그때와 같은 빗소리가 들려오는 날이면 이 기억, 바로 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질 것임이 분명했다.


바로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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